도시 정체성과 비전 담긴 랜드마크
창원이 보여줄 정신은 '국난 극복'?

지난달 말 허성무 창원시장이 창원시 통합 10주년을 맞아 높이 100m에 달하는 동상형 이순신 타워를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최초의 이순신 동상이 진해에 있고, 해군사관학교가 창원에 있으며, 진해 인근 해전에서 승전한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많고, 다른 도시에 비해 진해의 이순신이 덜 유명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그러면서 뉴욕 '자유의 여신상'과 리우데자네이루 '예수상'을 비교 대상으로 언급했다.

예수상은 가톨릭 국가에 세워진 것이니 논외로 하고, 허 시장이 모델로 삼은 '자유의 여신상' 이야기는 한 번 더듬어볼 필요가 있겠다.

'자유의 여신상'은 잘 알려져 있는 대로 미국 건국 1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가 선물한 것이다. 한 외교 모임에 참석한 프랑스 법학자이자 정치학자였던 라불레가 "미국이 건국 이래로 모범적인 국가상을 보여줬기 때문에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우정의 선물을 보내자"는 제안을 했고, 이에 호응한 사람들이 수차례 모금운동을 펼쳤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바로 '공화국 체제'였다.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언한 뒤 영국과의 전쟁을 거쳐 1783년 비로소 독립을 이뤘다. 조지3세가 지배하던 영국에서 독립한 신생국 미국은 다른 왕국을 세우는 대신 서구 계몽사상가들의 꿈이었던 공화정을 새로운 정치 체제로 채택했다. 미국 독립이 완성되고 정확하게 10년 뒤인 1793년 1월 프랑스 혁명정부는 루이16세를 처형하고 곧바로 공화국 헌법을 제정했다.

프랑스의 공화정은 도입되자마자 역풍을 맞았다. 공화국 주역 로베스피에르는 이듬해 내부 반란으로 처형됐고, 그 공백은 젊은 군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차지했다. 이후 프랑스 정치체제는 그야말로 엎치락뒤치락이었다.

파리 지식인들이 미국에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하자고 의기투합했을 때 프랑스는 공화국이 아니었다. 2월 혁명으로 시작된 두 번째 공화정에서 뽑은 대통령이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황제를 자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바다 건너 미국은 그해 처절했던 남북 전쟁을 막 끝내고 공화국 기반을 다시 확립한 참이었다. 현실에 무기력했던 공화주의 지식인에게 미국은 여간 기특하고 다행인 나라가 아니었다.

1886년 '자유의 여신상'을 세우며 프랑스 지식인들은 그 받침대에 엠마 라자루스의 시를 새겨넣었다.

'지치고 가난한 자유를 숨쉬기 열망하는 무리들을, 풍성한 해안가의 가련한 족속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폭풍우에 시달린, 고향 없는 자들을 나에게 보내다오. 황금의 문 곁에서 나의 횃불을 들어올릴 터이니.'

여신이 횃불로 선포한 자유는, 정확하게는 유럽의 폭력적 절대왕정으로부터의 자유였다. '자유의 여신상'이 세계적인 랜드마크로 높이 평가 받는 것도 뉴욕에 있어서가 아니라 이와 같은 시대 정신이 반영돼 있기 때문이었다.

도시의 랜드마크는 시각적 자원으로 매우 중요한 상징이다. 랜드마크만 봐도 도시 정체성과 비전을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은 조선시대 국난 극복의 상징이다. 특히 일본과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돋보이는 캐릭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민주공화국의 창원시를 대표하는 정체성이 과연 '국난 극복'이어야 할까? 산업도시 창원의 모범을 조선시대 무인 이순신에서 찾는 것으로 충분할까? '자유의 여신상'만큼 창원시민과 창원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에게 이순신은 영감을 던져줄 수 있을까? 이제 질문을 시작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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