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 못 잡거나 놓치는 것도 역사
과정을 기회 삼아 착착 쌓아가자

사회의 마음을 보여주는 책 제목들이 적나라하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되지도 않을 기회를 찾아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소리치지만 더 열심히 살아보고 싶다는 뜻이다. 암담한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은 삶에 간절한 욕망이 보인다. 청년들의 입장에서는 너무 적게 주어지는 기회를 생각하면서 초긍정의 고갯짓을 수십 번쯤 할 것이다. 이런 사회가 되는 과정을 살아온 중늙은이는 '정말 열심히 살았는데 왜 이럴까?' 하는 자괴감이 높아진다.

실사영화 <알라딘>이 순위를 역주행하면서 인기를 모으고 있다. 왜 그럴까? 달라진 사회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스민 공주는 백마 탄 왕자를 기다리지 않고, '말하지 말라' - speechless - 는 오래된 명령 앞에도 굴복하지 않는다. 스스로 왕이 되고 싶어한다. 역량도 갖추었다. '왕족의 소원은 모든 백성이 배고프지 않게 된 이후 이룰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실, 대중문화 속 여성에 대한 시각이나 대접은 놀라울 정도로 높아져 있다. 비록 현실과는 괴리가 있다 해도, 어쨌든 시대정신이다. 영화나 소설, 노래를 보고 듣는 대중이 그것을 원하니, 아니, 돈쓰는 소비자들이 원하니, 생산자들은 당연히 최선을 다해 보여주고 있다고 봐야 한다.

램프의 요정인 지니도 새로운 모습으로 등장해서 보는 이들을 즐겁고 통쾌하게 한다. 인간이 되고 싶은 램프의 요정! 인간의 욕망을 이뤄주는 '신'의 욕망을 '인간'인 알라딘이 램프를 통해 이루게 해준다. 신과 인간이 인간으로 만나서 진정한 친구가 된다. 개멋지다.

'램프'는 비빌 수 있는 기회를 세 번 준다. 인생에서 세 번의 기회는 많은 것일까, 적은 것일까. 문득 신라시대까지 연원이 올라가는 설화 속 '도깨비방망이'가 떠오른다. 놀랍게도 혹부리 영감이 얻었던 도깨비방망이는 두드릴 때마다 원하는 것을 다 준다. 기회가 무한하다. 얼핏 도깨비방망이가 더 좋을 것 같지만, 사실은 램프가 훨씬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기회가 한정돼 있다는 사실은 오히려 기회를 헛되게 쓰지 않도록 만든다.

하지만 도깨비방망이는 마치 재벌의 망나니 후손들이 물려받을 재산을 물 쓰듯 하는 것처럼 허망하다. 그들은 좋은 것의 액면가를 최대한 낮춰버린다. 가장 큰 죄다. 도깨비방망이가 제공하는 무한한 그것은 어찌 생각하면 없는 거나 다름없다. 다 가질 수 있으니 하나도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불행해한다. 약도 하고 미친 짓도 한다. 말도 안된다.

다르게 생각해 본다. 도깨비방망이가 재벌 망나니 후손 따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되풀이되는 역사의 과정이라면 어떨까. 그 과정 속 얻게 되는 램프를 비빌 세 번의 기회는 개인 삶을 위한 보너스 같은 거라고. 무한히 반짝이거나 로또 같은 삶은 단언컨대 가까이에도 멀리에도 없다. 그저 '앗, 저 사람이야' 하고 사랑하는 이를 만날 때, 땀방울의 가치를 알아차린 순간, 이 모든 희로애락이 인간 스스로가 만든 것임을 알게 될 때가 램프를 비빈 순간에 얻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삶들의 욕망풀이가 되풀이되고 쌓여간다. 도깨비방망이 같은 역사를 만든다. 인류의 삶이다.

알라딘의 램프가 보여주는 의미를 차근차근 깨물어 보자. 도깨비방망이가 의미하는 큰 그림도 놓치지 말자. 무엇이라도 찾으려고 정말 열심히 살면 억울하지 않을뿐더러, 떡볶이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나면 죽음이 떠오르지 않는다. 세 번의 기회는 누구에게라도 주어지지만 욕심이 과해서 인정하지 않을 뿐일 수도 있다. 도깨비 방망이로 보면 기회를 잡지 못하거나 놓친 실패조차도 역사의 과정에 속한다. 이미 낡아버린 삶의 기준으로 우울해하는 중늙은이나 새롭게 기준을 만들 청년들도 절대로 남을 보며 기준을 만들지 말자. 결국 도깨비방망이도 램프도 내가 쓸 도구이니까. 그저 살아가면 된다. 과정을 기회삼고 기회를 과정으로 쌓아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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