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노히트노런 주인공 강정일
1972년 ‘야구 역사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일이 일어난다. 마산고등학교 투수가 ‘노히트노런(무안타·무실점 승)’을 기록한 것이다. 그 주인공 강정일(65) 씨를 찾아 나섰다. 부산에 살고 있는 그는 당시 장면 하나하나를 어제 일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아버지 반대에도 몰래 운동

강정일 씨는 진주에서 태어났다. 8남매 중 다섯째다. 집안은 부유한 편에 속했다. 아버지는 건축 일을 했는데, 유독 그에게 건축 도면을 그리게 했다. 그 역시 재미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운동에 더 흥미를 느꼈다. 천전초·진주중 시절 특별활동으로 야구·축구를 했다. 교내 체육대회 때마다 선수로 뛰었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못마땅해했다. 학업 성적이 운동 때문에 조금 떨어지기는 했다. 아버지는 학교에 찾아와 선생님들에게 “운동을 절대 시키지 마라”고 했다. 성적 부진에 중학교를 1년 더 다니게까지 했다.

고교 진학을 결정해야 할 시기였다. 담임 선생님이 학교 10곳을 추천해 줬다. 부산 4곳, 대구 4곳, 그리고 마산고·마산상고였다. 그는 3살 위 형과 의논해 마산고 진학을 결정했다. 아버지에게는 ‘명문 고등학교’임을 강조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다른 이유가 자리하고 있었다. 야구였다. 특히 마산고는 야구부를 재창단하는 시기였다. 이곳에 진학하면 1학년 때부터 바로 주전으로 뛸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는 1971년 마산고에 진학했다. 집에는 숨긴 채 야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마산고 야구부는 김원열 감독 지도로 팀을 재정비했다. 

강정일은 키 176cm, 몸무게 66㎏으로 우투·우타였다. 1학년 때까지 어쩔 수 없이 포수를 맡아야 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투수를 하고 싶다. 언젠가는 마운드에 오르겠다’는 독기를 품었다. 밤마다 남몰래 투구 연습을 했다. 

전화위복이었던 걸까? 포수를 하면서 하체가 단단해지고, 어깨도 강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마산상고와의 경기였다. 마산고 투수 김종일·노재홍이 잇따라 무너졌다. 김원열 마산고 감독은 홧김에 포수 강정일을 마운드에 올렸다. 그는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며 속으로 흥분했다.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공을 뿌렸다. 마산상고 타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김원열 감독 머릿속에 ‘투수 강정일’이 각인됐다. 그는 그렇게 2학년 때부터 마운드를 책임지게 됐다.

현재 부산에 살고 있는 강정일(65) 씨가 1971년 마산고 선수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당시 1학년으로 투수 아닌 포수로 뛰고 있었다 /남석형 기자
현재 부산에 살고 있는 강정일(65) 씨가 1971년 마산고 선수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당시 1학년으로 투수 아닌 포수로 뛰고 있었다 /남석형 기자

운명의 그 날 ‘두 가지 장면’

마산고 야구부는 당시 번번이 마산상고 벽에 부딪혀 전국대회 출전권을 얻지 못했다. 

지역 예선 없는 대회가 하나 있었다. ‘봉황기쟁탈 전국고교대회’다. ‘제2회 봉황기쟁탈 대회’가 1972년 8월 9일 서울운동장에서 개막했다. 마산고·마산상고를 비롯한 전국 41개 팀이 참가했다.

8월 10일, 마산고는 1회전에서 광주숭의종고를 만났다. 2학년(기록상으로는 1학년) 강정일이 선발로 나섰다. 

그는 혼자 책으로 익히 ‘슬라이더’를 승부구로 삼으며 상대 타선을 요리했다. 경기는 팽팽한 ‘0의 행진’이었다. 강정일이 6회 초를 삼자 범퇴로 끝내고 더그아웃에 들어왔다. 당시 야구부 정신적 지주였던 고상근(17회 졸업생) 씨가 “지금까지 퍼펙트 경기”라고 했다. 주자를 한 명도 내보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강정일은 7회 볼넷을 내줬다. 그래도 노히트노런은 유효했다. 

그리고 운명의 8회 초. 강정일은 볼넷·도루를 허용하며 1사 1·3루 위기에 처했다. 상대 1번 타자 심영석이 스퀴즈를 시도했다. 공이 3루 쪽으로 힘없이 굴러갔다. 투수 강정일이 공을 잡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짧은 순간 ‘홈으로 던질까’, ‘뛰어가서 태그를 할까’라는 생각이 교차했다. 강정일은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태그아웃을 시도했다. 공을 잡은 오른손이 3루 주자 양재섭 머리·어깨를 스쳤다. 주자가 홈을 밟기 전이었다. 강정일은 그렇게 8회 위기를 모면했다. 

마산고는 이어진 8회 말 공격에서 천금 같은 득점을 뽑으며 1-0으로 앞서갔다. 

9회 말, 또 한 번 운명 같은 장면이 연출된다. 강정일은 투아웃에 투 스트라이크까지 잡았다. 공 하나면 대망의 노히트노런이었다. 그는 슬라이더를 힘차게 던졌다. 상대 타자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공은 1루수 머리 위를 살짝 지나쳤다. 관중석에서 ‘아~’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안타였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전진 수비를 하던 우익수 김종일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원바운드로 공을 잡아서는 1루로 송구했다. 1루 심판 오른손이 위로 올라갔다. ‘아웃’이었다. 

강정일은 그렇게 볼넷 3개만 내주며 무안타·무득점으로 노히트노런을 달성했다. 노히트노런이 당시 실업에서는 제법 있었지만, 고교에서는 대기록 중의 대기록이었다. 

마산고 투수 강정일이 노히트노런을 달성하자 각 신문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기사 속 사진은 이날 경기 하이라트 장면이었다. 0-0으로 팽팽히 맞서던 8회초, 상대 숭의종고 3루 주자(왼쪽)가 스퀴즈 때 홈으로 파고 들자 마산고 투수 강정일(오른쪽 위)이 태그 아웃 시키고 있다 /강정일 소장 신문 자료 촬영본
마산고 투수 강정일이 노히트노런을 달성하자 각 신문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기사 속 사진은 이날 경기 하이라트 장면이었다. 0-0으로 팽팽히 맞서던 8회초, 상대 숭의종고 3루 주자(왼쪽)가 스퀴즈 때 홈으로 파고 들자 마산고 투수 강정일(오른쪽 위)이 태그 아웃 시키고 있다 /강정일 소장 신문 자료 촬영본

딱 거기까지, 야구를 접다

그로부터 47년이 흘렀다. 이제 ‘원로 야구인’이 된 강정일 씨. 그는 감았던 눈을 지긋이 떴다. 그는 노히트노런 당시 9회 마지막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정말 만화 같은 일이 벌어진 거예요. 특히 우익수 김종일은 원래 팀 에이스였습니다. 그날 제가 선발 투수로 나갔으니 심정이 어땠겠어요. 그런데 다른 선수 아닌 김종일이 제 노히트노런을 기적처럼 만들어 준거죠. 우리 팀은 2회전에서 전년도 준우승팀 대건고에 패해 짐을 쌌습니다. 그날 김종일 어머니가 와서는 ‘고향 인천에 다녀오겠다’며 그를 데리고 갔어요. 김종일과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나중에 소식 듣기로는, 그 친구는 인천고를 나와 농협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강정일의 노히트노런은 당시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마산으로 돌아오자 학교도 떠들썩했다. 그는 같은 학생들에게 사인해주기 바빴다. 

하지만 ‘야구 선수 강정일’에게는 굵고 짧은 영광의 시간이었다.

그가 3학년 때, 마운드 에이스 자리는 한해 후배 감사용 몫이었다. 강정일은 진로 고민을 이어갔다. 감독은 한전행을 권유했다. 그는 야구부 있는 대학 진학을 원했다. 여전히 운동을 반대하던 아버지에게 ‘대학만은 반드시 가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성균관대 진학으로 정리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이후 흐지부지되는 분위기였다. 그는 답답한 마음에 동아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찾아 진학을 부탁했다. 하지만 동아대 감독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는 부산서 마산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야구를 접기로 했다. 하숙집에 와서는 유니폼·장비를 모두 태워버렸다. 한동안 자포자기 상태에서 방탕한 나날을 보냈다. 다행히 그는 가장 의지하던 친형 위로에 마음을 다잡았다. 짧은 시간 학력고사를 준비했다. 그리고 부산대 사범대 체육학과에 합격, 새로운 인생을 준비했다. 

마산고 투수 강정일이 1972년 '제2회 봉황기대회'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경기 기념공. 현재 창원NC파크 야구전시관에 보관돼 있다 /김구연 기자
마산고 투수 강정일이 1972년 '제2회 봉황기대회'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경기 기념공. 현재 창원NC파크 야구전시관에 보관돼 있다 /김구연 기자

“아쉬움 있지만 행복한 야구인”

그는 1981년 발령을 받으며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래도 문득문득 밀려오는 허전함은 어쩔 수 없었다.

“야구 미련이 왜 없었겠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느낀 게 많아 평생 끈을 못 놓았죠. 20대 때 심판 강습을 받고 활동했습니다. 그때 야구 규칙을 달달 외웠습니다. 심판으로 못다 한 야구 인생을 펼쳐볼까 했죠. 하지만 현실적으로 여의치 않아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30대 초반에는 마산고 감독 제의도 있었습니다. 아내랑 의논해서 그렇게 하기로 결심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다니고 있던 학교 교장 선생님이 놓아주지 않아서, 이 역시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는 경남여중, 부산대 사범대 부속고, 동래고, 부산여고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지난 2017년 2월 부산체고 교장을 끝으로 정년퇴임을 했다.

그는 프로야구 NC다이노스 창단 이후 홈경기 때 시구자로 나서기도 했다. 요즘도 가끔 창원을 찾아 지역 야구인들과 옛이야기 꽃을 피운다. 

“저희 때 마산고 야구부는 재창단 직후라 재학생·동문 관심을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특히 마산상고와 경기를 하면 말도 아니었어요. 시합 끝나고 두 학교 학생들끼리 우격다짐도 종종 했죠. 경찰이 출동해 단체로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습니다. 또 한 번은 우리가 마산상고로 찾아가 닫힌 교문을 부수고 들어가, 신경전을 펼치기도 했고요. 그러다 보니 선생님들이 경기 때 ‘단체응원을 보낼지 말지’를 두고 마라톤 회의까지 했습니다. 학교에서 안 보내주면, 학생들이 몰래 도망쳐 경기장으로 달려가곤 했습니다.”

정식 선수로는 고교 시절 딱 3년이었다. 그 짧은 시간 강렬한 기록 하나를 남겼다.

“노히트노런이라는 타이틀이 평생 따라다니더군요. 잊을 만하면 매스컴에 언급되거든요. 부담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평생 몸과 마음가짐을 더 제대로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쨌든 저에게 야구는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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