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가 통제되는 상황에서 많은 국민들은 편협한 내셔널리즘에 열광했고, 미국과 싸워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었다.”

“만일 도조가 냉철한 현실주의자였다면 히틀러가 그랬던 것처럼 눈앞에 다가온 전쟁을 자기의 위신을 걸고 도전할 대상으로 보았을 것이다. 또 7000만 국민의 운명을 쥐고 있다는 책임감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어디에서 전쟁의 불길을 꺼야할지 열심히 주위에 설명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런 투시력을 가졌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다.”

G20에서 악수를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 /청와대 페이스북
G20에서 악수를 나누는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 /청와대 페이스북

2019년 7월은 ‘한일전이 본격화한’ 달로 기록될 듯싶다. 아베 일본 총리가 한국을 대상으로 ‘자본주의 국제분업 질서’를 정면으로 위배하는 무역보복 조치를 강행하고, 이에 반발하는 한국 내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무역 보복 조치는 처음 일제징용 배상판결에 대한 일본 정부의 단순한 불만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유시민은 아베가 참의원 선거 승리, 한반도 평화무드 방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보복조치를 단행한 것 같다고 분석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일본에 우호적인 친일정권을 한국에 수립하려는 의도를 가진 게 아니냐고 의심한다.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지금 일본이 걷는 길은 일제가 한반도를 침탈했던 근대사를 새롭게 변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래서 태평양 전쟁을 앞두고 일본을 뒤덮었던 이상 열기를 전하는 첫 인용문은 우리가 섬뜩하게 느껴야 할 글이다. 

아베가 강공으로 나선 이후 대다수 일본매체는 일본정부를 옹호하면서 한국을 비하하고 있다. 여기다 TV프로에는 이런저런 연예인이 등장, 수다스럽게 반한 정서를 부추기고 있다. 징용 배상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국민들이 편협한 내셔널리즘에 휘둘리고, 한국에 대한 도발을 정당화하는 상황은 기시감을 갖게 한다. 

두 번째 인용문은 전쟁을 감행한 책임자인 도조 히데키 수상에 대한 후인들의 평가다. 도조가 지녔던 군인관은 민족과 미래에 대한 별다른 고려 없이 오로지 ‘군사정치 체제’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외교도, 이웃국가에 대한 배려도 없이 일본을 ‘전쟁할 수 있는 국가’로 만들려는 아베와 많이 닮았다. 

왜 일본은 초글로벌 시대로 일컬어지는 21세기 초입에 이런 짓을 하는 걸까? “2차 대전 패전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근대에 수립한 국가 및 국민 정체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는 말에 그 답이 들어 있을 성싶다.

많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 열강의 식민지로 떨어지기 시작한 19세기,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였다. 이 경험이 가져다준 ‘명(明)과 암(暗)’은 지금도 일본을 뒤덮고 있으며, 특히 그 암(暗)은 종종 파괴적인 방식으로 표출되고 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근대화를 달성한 뒤 세 차례 대외전쟁에서 승리하지만 국제적 컨센서스는 아랑곳하지 않는 채 자국이익에만 몰두한다. 또 군인들이 정치를 장악하면서 국민의식 전체가 ‘온리 재팬’을 외치는 기형이 된다.

역사학자 도널드 킨의 책 '메이지라는 시대'
역사학자 도널드 킨의 책 '메이지라는 시대'

“청일전쟁에서의 육해전 승리는 일본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일본군이 뤼순을 점령한 후 러시아 영국 미국이 거중조정의 뜻을 전했으나 청국의 완전한 항복을 꿈꾸며 전승분위기에 도취된 일본은 강화에 부정적이었다. 군부는 대본영(전쟁지휘부)을 뤼순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정치권도 확전을 지지했다. 개진당은 차제에 베이징을 영구 점령하여 일왕의 주권아래 두면서 이를 발판으로 유럽 국가들에 대항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전개했다. 하지만 이토는 달랐다. 그는 군사력에만 의존하는 전쟁은 국가를 위기에 빠트릴 수 있고, 군사력과 함께 외교관계를 신중히 처리할 때 비로소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열강의 이해관계가 깊이 얽혀 있는 청국 영토로 일본군이 깊숙이 진입하는 것을 반대했다. 야마가타와 군부가 주장하는 베이징 공략론에도 반대했다. 청국 정부가 완전히 무너져 협상대상자가 없어질 경우 열강들은 자신의 상권과 인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반드시 합동으로 간섭할 것으로 내다보았다. 이토는 리훙장과 가진 시모노세키 협상에서 11개조로 이뤄진 전리품을 거둬들였다. 조선의 완전한 자주독립국화, 랴오둥 반도 타이완 섬 펑후 열도 등의 주권확보, 배상금 2억만 냥, 사스 충칭 쑤저우 항저우 개항 등등. 청일전쟁을 결산한 시모노세키 조약은 일본의 완벽한 승리였고 전쟁과 조약을 총 지휘 감독한 이토 히로부미는 생애의 절정을 맞았다.”

 

첫 대외전쟁이었던 청일전쟁 과정을 설명한 글이다. 노련한 정치가인 이토 히로부미가 전후 처리에 성공했다는 게 요지지만 사실 이 글은 첫 국제전 승리가 일본인들에게 어떻게 각인됐는지를 잘 시사하고 있다.

먼저 육해전에서 일본군이 승승장구하자 여론은 청나라로부터 완전한 항복을 받아야 한다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거기다 히로시마에 설치한 대본영을 뤼순으로 옮기자는 ‘파격적인’ 이야기까지 나온다. 러시아 영국 미국 등 3국이 화해를 주선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으나 처음엔 이 또한 깡그리 무시당한다. 급기야 베이징을 완전 점령해 중국을 속국으로 두자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승전에 들뜨는 건 다른 나라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열강 콤플렉스’에 시달렸던 일본은 유독 그 정도가 심했다. 

메이지 유신에서 2차 대전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치를 설명하는 열쇳말 중에 ‘통수권 독립’이라는 게 있다. 군대를 민간정부에 예속시키지 않고 일왕을 정점으로 하는 독자적인 시스템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일본 육군의 설계자인 야마가타는 ‘군이 정치에 오염돼서는 안 된다’는 해괴한 논리로 통수권 독립이란 괴물을 완성했다.

그런 데다 일본인들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군대가 달성한 성과에 비해 배상금을 비롯한 전리품이 적다고 생각했다. 청일전쟁 후 삼국간섭으로 랴오뚱 반도를 뺏겼다고 생각한 것은 그 대표적인 사례다. 장군들이 이긴 전쟁을 민간 정치인들이 망쳤다고 보는 이런 사고는 군부의 위상을 높이고, 전승(戰勝)을 정치적 목표 달성이 아닌 군사적 관점에서 평가하게 만들었다.

이는 통수권 독립과 맞물려 군부를 제어 불가능한 폭주족으로 만들었다. 육군은 제 멋대로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나아가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란 소모전에 빠져든다. 민간정부는 육군이 저지른 행위를 추인하고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1928년 육군 내부 공부모임인 목요회에서 이시와라 간지는 이런 말을 남겼다. 

 

“장래 일본과 미국은 반드시 큰 전쟁을 한다. 아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은 동양의 대표, 미국은 서양의 대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전쟁은 세계 최종 전쟁이 된다. 결과 여하에 따라 세계의 운명이 결정된다. 일본은 어떻게 해서든 이겨야 한다. 그런데 현 단계의 일본은 ‘갖지 못한 나라’이며 미국은 ‘가진 나라’다.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미국과의 현격한 차이를 가능한 한 빨리 메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국 전체를 이용해야 한다. 전체 중국을 일본의 산업기지로 삼으면 일본은 가진 나라로 바뀔 수 있다. 앞으로는 전체 중국을 획득하기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일본의 국방방침이다.”

 

이시와라는 관동군 참모로 재직할 때 만주사변을 일으킨 인물이다. 아무리 육군 엘리트가 중시되는 분위기였다고는 하나, 일개 영관급 장교가 대놓고 이런 도발을 할 지경이었으니 군부 폭주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리고 여론은 이런 광기어린 군국주의자들을 조건 없이 추종했다.

패전 후 일본 지식계에서는 통수권 독립을 비롯한 기형적 시스템과 정부에 무비판적인 시류를 통렬하게 반성하는 움직임이 일었으나 70년대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이같은 ‘반성’은 다시 물밑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아베가 추진하는 우경화 전략은 국민들을 왜곡된 방향으로 몰고 가던 ‘역사적 디렉션’을 연상시킨다.

해전으로 시작된 청일전쟁에서 일본과 청나라가 처음 충돌한 건 아산 앞바다였다. 최초의 충돌 때 청나라 군사 1천여 명을 태우고 아산으로 향하던 영국수송선이 침몰됐다. 일본 함대 함장인 도고 헤이하치로가 닻을 올리고 따라 오라고 명령했으나, 영국수송선이 이를 무시하자 격침한 것이다. 이 병력은 사실 동학군과 싸우기 위해 조선으로 가던 청나라 병사였다.

역사적인 이 사건에서 일본군이 행한 조치는 일본의 대(對) 아시아 사고를 짐작케 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두고두고 회자된다. 일본군은 영국인 선장 이하 세 명을 구조했으나, 청나라 승무원과 1천여 명의 군사는 익사하게 놓아두었다. 독일인 목격자에 따르면 일본군은 청나라 병사를 구조하기는커녕 사살까지 했다고 한다. 교전국이라고는 하나 1천 명이 넘는 인명을 죽음으로 내몰면서도 영국인 선장은 살뜰하게 챙긴 일본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당시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는 <건건록(蹇蹇錄)>이란 회고록을 남겼는데, 이 책에는 대미굴종과 아시아 비하가 넘쳐난다. 

 

“무쓰는 구미에 대해서는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주의 깊고 신중하게, 거의 비굴하다고 할 만한 태도로 서술하지만, 조선과 청나라를 대할 때는 오만불손을 넘어 마치 주먹을 치켜드는 듯한 자세를 취한다. 이런 이중성은 매우 선명한 대비 구도로 기록돼 있다. 메이지 정부의 대외정책은 구미에 대해서는 철저히 공손하고, 조선과 청나라에 대해서는 매우 강압적이었다.”

 

일본은 근대화를 시작하면서 그 목표를 ‘탈아입구(脫亞入歐)’로 잡았다. 미개한 아시아를 벗어나 유럽 열강처럼 되자는 것이었다. 일찍부터 일본의 먹이가 되었기에 이 과정에서 조선은 독립국을 유지 못 할 존재로 비하되었으며, 청일전쟁을 계기로 속살을 드러낸 중국은 ‘나태하고 무능한 국가’란 이미지를 덮어쓰게 된다. 

청일전쟁 당시 육전에서는 일본군의 잔학함을 여실히 드러낸 뤼순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오늘 뤼순에서 돌아온 기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일본군이 전승 후에 계속해서 난폭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생포한 사람을 묶어놓은 채 살해하기도 하고 때로는 평민, 특히 아녀자까지 죽인 일이 실제로 있었던 모양이다. 구미 각 신문이 목격했을 뿐 아니라 각국 함대의 사관들도 실제로 보았다고 한다.”

 

무쓰가 현장을 기사화했던 영국 기자를 히로시마에서 만난 후 동경에 있는 외무성에 보낸 전문(電文) 중 일부다. 실제 참상은 전문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다. 문명국(?)이란 이미지에 먹칠을 할지도 모를 비상사태를 맞아 일본 정부는 어떻게 반응했을까?

일본 정부는 먼저 외국 보도기관을 통해 사실을 왜곡하려 했다. 로이터 통신은 뇌물을 받고 일본을 편드는 기사를 타전했다. 워싱턴 포스트 같은 몇몇 신문도 금방 매수되어 일본에 유리한 기사를 게재했다. 이 무렵 많은 외국인 기자가 일본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고 있었다. 열강 기자들을 관리하는 수법에도 ‘서구 굴종’이란 냄새가 난다.

도쿄에 로쿠메이칸(鹿鳴館)이라는 향락시설이 세워지자 일본 정부는 이를 기념하는 성대한 무도회를 열었다. 일본인들은 이 무도회를 통해 일본 사람도 유럽인들처럼 행동할 수 있다는 걸 과시하고 싶었다. 

 

“프랑스 화가 조르주 비고의 풍자만화 중에 거울 앞에 선 한 쌍의 남녀를 그린 것이 있다. 여자 머리는 거대한 투구처럼 높고 빳빳하게 풀이 먹여져 있고, 타조 깃털이 꽃혀 있다. 스커트를 받쳐주는 페티코트와 양산을 보면 최신 유행하는 파리 패션이다. 상대방 남자 콧수염은 밀랍으로 고정되었고, 손에는 비단으로 만든 중절모가 들려 있다. 하지만 우아하게 맞춰진 윗도리 밑으로 뻗은 다리는 성냥개비 같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영락없이 한 쌍의 원숭이다. 도쿄 한복판에서 개최된 최초의 유럽식 무도회는 그야말로 원숭이 흉내 내기 같은 것이었다.” 

 

역사가 도널드 킨이 던지는 냉정한 지적이다. 이토와 이노우에 가오루가 주도한 로쿠메이칸 파티로 일본이 유럽 열강과 대등해졌다고 믿는 외국인은 아무도 없었다. 대신 그들은 ‘일본인은 독자적인 문화 대신 중국이나 서양 문화를 빌리고 모방하는 민족일 뿐’이라고 평했다. 

문화학자 우치다 타츠루는 서구 굴종 문화를 21세기 버전으로 이렇게 풀이한다.

 

“미국이 일본의 국익에 손해가 나는 요구를 할 때조차 ‘죽으나 사나 미일동맹밖에 없어’라고 생각하는 외교통의 확신이 뒤흔들린 적은 없다. 이런 맹목적인 판단은 왜 성립되는 것일까? 그것은 일본인들이 기묘한 신뢰를 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미국이 때로 일본의 국익을 해치는 요구를 하는 것은 그만큼 미국이 일본에 친밀한 감정을 품었기 때문이야. 우리 편이기 때문에 그런 불합리한 요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거야’라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을 수출 백색국가에서 제외하고 반도체 소재의 수출을 규제하겠다는 일본 경제산업성 보도자료 /일본 경제산업성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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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보복이란 카드를 꺼낸 아베는 어디로 가려 하는가? 그를 정점으로 하는 일본 우익들은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아니 도대체 일본이란 어떤 나라인가?

탈아입구를 지상목표로 삼았던 허약한 내면과 어찌 됐든 근대화에 성공했다는 경험은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힘센 놈을 숭상하고 약자를 철저하게 멸시하는 문화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일본이 자부하는(?) 이 뒤틀린 의식은, 왜곡된 근대사를 21세기에 재현하려는 아베 류의 리더들에게 휘둘려 또다시 아시아를 짓밟는 폭주기관차가 될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참고자료

♣ 호사카 마사야스 지음/양병찬 옮김,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페이퍼로드

♣ 도널드 킨 지음/김유동 옮김, <메이지라는 시대>, 서커스

♣ 가타야마 모리히데 지음/김석근 옮김, <미완의 파시즘>, 가람기획

♣ 한상일 지음,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까치

♣ 하라 아키라 지음/김연옥 옮김, <청일 러일전쟁 어떻게 볼 것인가>,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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