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구 성과물 잊고 새것만 좇아선 발전 없어
틈틈이 과정·현황 남겨야

몇 주 전, 창원 모 기업 역사에 관한 글을 사업주로부터 의뢰받아 쓰고 있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은 단기성 사업으로 기업 역사를 정리하기보다는 지속적으로 기업 기록을 관리하고, 관리된 기록으로 해당 기업의 역사를 계속 재정의하고 싶어하셨다. 때문에 공개적으로 기록관련 글을 쓰고 있는 나를 소개받아 찾아오신 것이다.

그분은 내게 기록관리의 필요성 등을 물으셨고 나는 그분을 만나기 전 읽은 잡지에서 본 '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빵을 만드는 사람이 빵에 들어가는 재료, 연구방법, 제조 중의 시행착오과정 등에 대한 기록이 없으면, 오늘 내가 만든 새로운 제품의 빵을 10년 후에도 새로운 제품이라 소개하며 소비자들에게 팔 가능성이 높다. 10년 후, 더 나은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오늘 나의 하루를 기록해 놓아야 한다. 그래야 어제보다 더 나은 빵이 개발될 수 있고, 그 빵으로 또 다른 새로운 빵이 만들어질 수 있다."

◇공유 없는, 축적되지 못한 연구

뜬금없이 빵 이야기를 그분께 한 이유는 모 연구원에서 열린 학술세미나에 참석하면서 느낀 생각 때문이다.

그동안 만들지 않았던 경남을 연구하는 센터를 출범시키고 관련 내용을 지속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는 내용의 세미나였다. 세미나에서는 여러 전문가들이 나와 그동안 경남학 관련 연구성과들과 문제점, 과제 등을 발표했고 향후 해당 센터가 나아가야 하는 방향에 대해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전문가분들의 발표를 들으면서도 내내 떠나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그 수많은 시간 연구한 성과물은 어디 갔을까?" 그동안 우리 경남이 경남관련 센터는 만들지 않았지만 전문가들 각자의 환경에서 관련 연구를 했을 것이고 성과물도 있을 것인데, 그것들은 어디로 가고 또 새로운 것을 논의하자는 것인가? 나의 짧은 생각일 수도 있겠으나 내게서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물론 세미나 전반에 걸친 내용들은 제3자인 내가 알 수는 없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시도해왔던 축적의 시간들에 대한 현황분석이 필수다. 단순 몇 건, 몇 번 했다는 식의 수치논리가 아닌 내용과 결과물의 활용현황 등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각자 연구한 결과물이 몇 년이 흘러 다시 재탕, 삼탕 되지 않으려면 혹은 각각의 연구가 소통과정 없이 중복되지 않으려면 연구 결과물은 축적되어야 하고 공유되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의 연구가 나올 수 있을 것이라 감히 생각해보는 것이다.

◇새로운 내용,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는 다양한 곳에서 들을 수 있다. '여성 독립운동' 관련 내용도 그러한 것들 중의 하나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국적으로 기념행사가 많이 열렸다. 나 역시 그러한 내용에 편승(?)하고자 '여성의 독립운동과 기록'이라는 주제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려 했었다. 때문에 관련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고 만났는데, 그중, 한 학자분이 이야기하기를 "여성 독립운동 관련 내용은 이미 오랜 시간에 걸쳐 많은 내용들이 발표되었다. 기록과 관련된 것들은 논외에 부치더라도 여성독립운동은 많은 곳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같은 내용들이 반복되고 있다. 물론 우리 기관에서 해당 내용의 행사를 한다면 발표할 수 있지만 지난 내용의 반복, 이상은 아닐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물론 꼭 이것뿐만의 이유는 아니겠지만 여러 사정상 해당 심포지엄은 '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나는 이때도 그러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많은 성과물은 어디에 가고 우리는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를 새롭다고 하고 있는가?"

◇축적 없는 혁신, 반복되는 혁신

우리는 늘 '혁신'을 이야기한다.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기도 한다. 그러한 환경 속에 '새로운' 것은 늘 우대받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새로운 것들을 시도한 경험, 시행착오에 따른 축적의 시간은 기록되지 않고,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공유되지 않았다. 때문에 새로운 어떤 것들은 발표되지만, 몇 년이 지나 동일한 내용이 또 '새로운' 것으로 발표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지금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는 무기력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혁신과 아이디어가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무용론을 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새로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되지 않았는지에 대한 의문의 발현이며 기록을 관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현장에서 느낀 '축적(기록)의 부재'에 대한 안타까움일 것이다.

공공의 영역에서도 이러한 사례는 있다. 공공기록법에 의하면 기록물이란 '공공기관이 업무와 관련하여 생산하거나 접수한 문서·도서·대장·카드·도면·시청각물·전자문서 등 모든 형태의 기록정보자료와 행정박물'을 말한다. 공공기록물의 정의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이 있지만(결재를 받은 것이 기록인가? 결재를 받지 않은 것은 기록이 아닌가?), 그 논의는 뒤로하고 공공기관에서 생산되는 수많은 문서 중에 관행적으로 보존되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단적으로 '업무보고' 형식으로 진행되는, 결재받지 않고 개인 컴퓨터에 보존되어 관리되지 않는 것들이 그동안 축적되어 관리되었더라면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 나 개인을 비추어 보면 그동안 결재받은 내용만큼 현재도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이고, 결재 중에 논의되지 못한 많은 내용들을 참작해 볼 수 있는 깊이 있는 자료가 되었을지 모른다.

축적의 시간과 그 시간 동안 산출되었던 수많은 기록, 기록되지 못했다면 단편의 기억으로 사라져버릴 안타까운 시간들, 지금 많은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지 모른다.

▲ 지난 1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전국경제투어로 대전을 찾아 명물 성심당 빵집에서 튀김 소보로를 고르고 있다. 왼쪽은 임영진 성심당 대표. /연합뉴스
▲ 지난 1월 24일 문재인 대통령이 전국경제투어로 대전을 찾아 명물 성심당 빵집에서 튀김 소보로를 고르고 있다. 왼쪽은 임영진 성심당 대표. /연합뉴스

◇성공하는 기업, 기록과 축적의 비법

서두에 이야기했던 기업기록 역사책을 출간하시는 분과 빵 이야기를 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이분은 전국적으로 유명한 대전 빵가게인 '성심당'의 책을 출간하신 분이었다. 빵의 역사에 대해 깊이 연구한 분 앞에서 빵 이야기를 했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분과 헤어진 후 궁금증에 성심당 관련 내용을 검색해보니, 성심당은 오래전부터 가게의 역사와 성심당에서 만들고 있는 제품의 레시피를 공개하고 출판해왔었다. 제품의 '비법'은 공개하지 않는 법인데, 성심당 경영이념(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하도록 하십시오)에 따라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책을 만들었다는 소개가 있었다.

오래도록 성공하는 회사는 이유가 있다고 하는데, 성심당의 성공경영은 축적된 시간의 기록과 공유가 그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짐작해본다.

또한 내가 서두에서 이야기한 '잡지에서 읽은 빵가게'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 있는 '고려당'이라는 곳이다. 가 본 적은 없지만 유서 깊은 가게이며 사장님의 인터뷰도 개인적으로 뜻깊었다.

나는 가게에 대해 잡지 등으로 피상적으로 알게 된 우리 지역의 빵가게, 고려당이 지역의 명물을 넘어 전국적으로 인정받기를 원한다. 이와 더불어 고려당의 역사가 정리되고 현재의 일상도 지속적으로 축적, 기록되어 그 성공경험이 지역에서 공유되고 확산되길 바라본다.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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