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미술가 발자취 담아내

고백으로 시작하자면 마감을 앞두고 이 기사의 첫 문장을 쓰기까지 참으로 부산하게 움직이고 생각했다. 단 한 가지, 기사 쓰기와 관련된 것만 빼고.

<미루기의 천재들>이라는 제목은 어떤 기대를 하게 한다.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히면서도 절대 그만둘 수 없었던 미루기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 혹은 게으름 또는 회피 등의 범주로 해석되는 미루기의 긍정적 방어 기제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 말이다.

▲ <미루기의 천재들> 앤드루 산텔라 지음.
                             ▲ <미루기의 천재들> 앤드루 산텔라 지음.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지금 이 순간에도 무언가 중요한 일을 미루고 있을 가능성이 큰 <미루기의 천재들>의 저자 앤드루 산텔라.

그는 "내 목적은 이 습관을 끝내는 게 아니라 정당화하고 변명하는 것이었다. 역사나 이런저런 학문을 충분히 검토하면 내 미루는 습관에 대한 명분이나 근거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라며 미루는 '우리'를 위한 유쾌한 변론 속으로 초대한다.

저자는 자신의 오랜 습성을 심도 있게 들여다보고자 '미루기를 위한 여행길'에 오른다. 자료 조사야말로 글쓰기에서 가장 선호하는 미루기의 기술이라는 설명과 함께.

'미루기 심리학'의 권위자를 맞으러 뉴욕 공항으로, 미루는 사람들의 수호성인을 찾아 뉴올리언스로 떠난다.

독일 미루기 거장의 후예들을 찾아 괴팅겐 거리로, '마감 효과'의 기념비적 건축물을 찾아 펜실베이니아로, 20년간 산책과 따개비에 열중했던 다윈의 행적을 따라 영국 다운 하우스로 날아간다. 이 여정에서 그는 미루기를 문학, 심리학, 경제학, 철학, 과학, 종교 등 다면적으로 바라본다.

"모든 종은 변화한다." 1838년 찰스 다윈은 이 세 어절로 된, 단순하지만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운 문장을 써놓고 무려 20년 동안 진화론 발표를 미뤘다. 그 사이 그가 게을렀다고 할 수 없다. 따개비와 지렁이 탐구 등은 물론 허리가 아플 정도로 바쁘게 글을 썼다.

다윈뿐만 아니다. 의뢰받은 지 25년 뒤에야 그림을 납품하며 세기의 명작 <암굴의 성모>를 남긴 레오나르도 다빈치, 초고를 내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느냐는 질문에 "다른 사람이 제 연필을 쓰고 있었거든요"라고 답한 도로시 파커, 8개월 동안 소포 보내기를 미루다가 인간의 비합리적인 행동을 다루는 행동경제학 대가가 된 조지 애컬로프, 9개월간 의뢰받은 저택의 설계를 미루다가 고객의 방문 직전 두 시간 만에 '폴링 워터' 설계도를 완성한 프랭카 로이드 라이트 등 거장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미루기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이를 통해 저자는 미루기를 우리의 선천적 양가감정과 불안에 뿌리를 둔 인간의 기본 충동, 혹은 의무로 가득 찬 일상 세계에서 돌파구 혹은 길을 찾는 방법으로 이해했다. 또 다양한 분야 속 거장들의 삶을 돌아보며 미루기가 수동적인 회피의 결과가 아니라 적극적 선택의 결과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된다.

"일을 미루려면 몇 가지 모순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미루는 행위를 사랑하고 또 싫어한다. 일을 미루며 죄책감을 느끼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미루기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은 없다."(34쪽)

지금 이 순간, 해야 할 어떤 일을 미루고 평소 웬만하면 눈길을 주지 않던 신문을 뒤적이며 한 자 한 자 열심히 읽는 그대에게 이 책을 권한다.

김하현 옮김. 어크로스. 239쪽. 1만 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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