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포초·마산동중·상고 출신
1984년 롯데-삼성 KS 7차전
8회 역전홈런으로 우승 견인
롯데 사이드암 박동수도 유명
한문연, 최동원 전담포수 활약
정학수·박용성 등 팬들 뇌리에

-'역전 3점 홈런' 1984년 한국시리즈 MVP 유두열-

마산은 '구도(球都·야구 도시)'답게 1980년대 프로야구를 빛낸 스타를 수두룩하게 배출했다. '별 중의 별'은 누구일까? 단연 앞자리에는 유두열이 꼽힌다. 1984년 한국시리즈 '결정적 한방'이 너무나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롯데자이언츠와 삼성라이온즈가 맞붙은 1984년 한국시리즈 7차전으로 돌아가 보자. 롯데는 3-4로 끌려가던 8회 초 1사 후 김용희·김용철의 연속 안타로 1·3루 기회를 잡는다. 당시 삼성 투수는 좌완 에이스 김일융. 유두열은 당시 시리즈 내내 20타수 2안타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볼 1스트라이크에서 유두열은 배트를 힘차게 돌렸고, 잘 맞은 타구는 왼쪽 담장을 그대로 넘어갔다. 유두열의 이 홈런 '한방'으로 롯데는 6-4로 승리해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강병철 감독은 경기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유두열에게 강공을 시킨 것은 모험이었다. 스퀴즈번트(주자가 3루에 있을 때 득점을 하고자 번트를 대는 작전)를 할까 생각하다가 기회를 놓쳐 맘대로 해보라고 맡겼는데,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낳았다. 김일융을 상대로 자료를 검토해 좋은 타구를 날렸던 선수들을 중요 포스트에 박는 타순 변경을 시도했는데, 결과적으로 유두열을 5번에 놓은 것이 적중했다"고 말했다. 이 경기는 KBO리그 한국시리즈 최고 명승부로도 꼽힌다.

유두열은 이 홈런으로 당시 혼자 한국시리즈 4승을 거둔 '무쇠팔' 최동원을 제치고 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그는 이후 기회 있을 때마다 "MVP는 결승 홈런을 친 내가 받았지만, 최동원이 없었다면 롯데 첫 우승도 힘들었을 것"이라며 공을 돌렸다.

▲ 롯데 유두열은 1984년 한국시리즈 역전 스리런 홈런 등 '결정적 한방'으로 많은 야구 팬 뇌리에 남았다. 사진은 유두열(가운데)이 1987년 삼성과의 경기에서 홈런을 날린 후 허구연 코치와 홍문종 선수의 환호를 받으며 홈으로 들어오는 모습.  /연합뉴스
▲ 롯데 유두열은 1984년 한국시리즈 역전 스리런 홈런 등 '결정적 한방'으로 많은 야구 팬 뇌리에 남았다. 사진은 유두열(가운데)이 1987년 삼성과의 경기에서 홈런을 날린 후 허구연 코치와 홍문종 선수의 환호를 받으며 홈으로 들어오는 모습. /연합뉴스

유두열은 과연 '한방의 사나이'였다. 홈런 관련 기록을 제법 남겼다. 같은 해 10월 19일 부산구덕운동장에서 열린 한일 프로야구 1차전에서 6번 타자로 출전, 결승 홈런으로 일본 롯데오리온을 3-2로 누르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88년 8월 28일 부산에서 열린 OB와의 경기에서는 김용철과 합작으로 프로야구 최초 '한 경기 2개 만루 홈런'이라는 대기록도 작성했다. 김용철은 당시 롯데가 1-3으로 뒤져있던 4회 2사 주자 만루에서 OB 두 번째 투수 이상훈으로부터 만루 홈런을 뽑아내 5-3으로 전세를 뒤집었다. 이어 6·7회 연속 안타 등을 허용해 롯데가 6-7로 재역전 당한 상황에서, 유두열은 8회 말 계형철에게서 만루 홈런을 뺏었다. 이 홈런으로 롯데는 11-7로 역전승했다.

유두열은 월포초등학교 시절부터 야구를 했다. 마산동중·마산상고(현 용마고) 졸업 후 한국전력을 거쳐 1983년 롯데에 입단했다. 프로 첫해 타율 0.307에 홈런 9개, 36타점으로 활약했다. 1984년 정규시즌에서는 타율 0.229로 다소 부진했지만, 한국시리즈 7차전 홈런 하나로 한국 프로야구사에 이름을 남겼다.

유두열은 이후 1991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타율 3할을 기록하지는 못한다. 그의 프로야구 통산 성적은 734경기 타율 0.264(2224타수 588안타), 58홈런, 268타점, 298득점이다.

-박동수, 1985년 부상으로 신인왕 놓쳐-

유두열 외에도 1980년대 마산 출신 선수 활약은 이어졌다. 롯데 '사이드암 에이스' 박동수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마산성호초-마산동중-마산상고-부산동아대를 거쳐 1985년 롯데에 입단했다. 박동수는 고교시절인 1980년 마산상고를 제35회 청룡기쟁탈 전국고교야구대회 준우승에 올려놓았으며, 동아대 시절에도 에이스로 활약했다.

그는 프로 데비 첫 경기인 삼미슈퍼스타즈전에 선발로 등판해 8명을 삼진으로 돌려세우고 단 3안타만 허용, 3-0 완봉승을 거뒀다. 박동수는 이해 168이닝을 소화하며 9승 10패 방어율 2.73을 기록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당시 20경기가량을 남겨두고 어깨 통증으로 나머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이에 신인왕을 이순철(당시 해태)에게 넘겨줬다. 그는 2009년 <경남도민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부상만 아니었으면 12·13승은 가능했고 신인왕도 탈 수 있었는데 아쉽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동수는 이후에도 1986년 8승, 1987년 9승, 1988년 7승을 기록했지만, 1989년엔 1승에 머물렀다. 1993년을 끝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통산 41승 48패 방어율 3.79의 성적을 남겼다.

▲ 1984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 확정 순간 을 담은 <경향신문> 사진 속 한문연(오른쪽)과 최동원.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 1984년 롯데의 한국시리즈 우승 확정 순간 을 담은 <경향신문> 사진 속 한문연(오른쪽)과 최동원.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롯데가 창단 첫 우승을 했던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공을 받아 낸 포수는 한문연이었다. 당시 마지막 공을 던지고서 승리를 확인하며, 기뻐하는 최동원을 얼싸안은 사진 속 주인공이다.

한문연은 성호초-마산동중-마산상고-동아대를 거쳐 1983년 롯데에 입단했다. 앞서 동아대 4학년이던 1982년엔 서울서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선수로 발탈돼 우승 멤버로 이름을 올렸다.

그는 미트질(프레이밍)이 뛰어나 볼이 되는 변화구도 스트라이크처럼 잡아내 스트라이크 판정을 많이 받아 낸 선수로도 유명했다. 안 그래도 최동원 공을 치기도 어려운데 떨어지는 '볼'을 스트라이크로 잡아내는 한문연 때문에 다른 팀 선수들이 '속앓이'를 했다고 한다. 당시 팀에 뛰어난 포수였던 심재원이 있었지만, 최동원이 직접 자신의 전담포수로 한문연을 지목할 정도로 포수로서도 능력을 인정받았다.

정학수(진해중-마산상고-동아대)는 프로 원년서부터 롯데 2루수로 활약,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통산 355경기에 출전했다.

박용성(마산동중-마산상고-동아대)은 1982년 후기리그에만 홈런 11개를 쳐 야구팬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이듬해인 1983년에도 홈런 17개를 기록, 전체 5위에 오르기도 했다. 박용성은 1988년 시즌까지 전체 홈런 43개를 기록했다.

박영태(완월초-마산동중-마산상고-동아대)는 1983년 롯데 입단 이후 1992년까지 677경기에 출전했다.

이 밖에 투수 김덕열(마산상고)은 1982~83년 롯데, 1984년 삼미 소속으로 통산 1승을 거뒀다. 외야수 엄태섭(마산상고)은 1982년 롯데, 1983~1984년 삼미 소속으로 뛰었다. 이석규(마산상고-동아대)는 1984년 롯데, 1986년 빙그레 소속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창원(마산상고-건국대)도 1986년 롯데에 입단했지만 붙박이 주전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다. 투수 김청수(마산상고-동아대)는 1989년 롯데 입단 첫해 7승을 거두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마산상고 출신 임정면은 1982~1988년 해태·빙그레에서 뛰었지만, 아마 시절 명성과 비교하면 아쉬운 활약에 머물렀다. 진해 출신으로 프로 원년 삼미에 입단한 감사용은 1982~1986년 삼미·청보·OB에서 뛰며 통산 1승 15패 방어율 6.09를 기록했다.

<참고 문헌>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KBO 누리집 기록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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