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상고 출신 선수 많아 프로시절 고향 자부심 커
1983년 입단해 1992년 은퇴
"1984년 우승 순간 눈에 선해
마산야구장 시합 땐 부담도"

한문연(58)은 1983년 프로 입단 후 1992년 은퇴 때까지 10년간 '롯데 안방마님'으로 활약했다. 롯데가 지금까지 한국시리즈 우승을 딱 2번(1984·1992년) 차지했는데, 한문연은 그 영광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마산에서 태어나 성호초등학교 때 친구 추천으로 야구부에 들어갔다. 포수도 초등학교 때부터 맡았다. 그는 마산동중을 거쳐 마산상고(현 용마고)에 진학했다. 박용성·임정면·박영태·박동수·엄태섭이 같이 뛰던 시절이다.

그는 1983년 계약금·연봉 각각 1500만 원을 받고 롯데에 입단했다. 당시 대기업 월급이 20만 원가량 되던 때였으니,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롯데는 전년도 주전 포수였던 차동열을 MBC로 이적시키고, 1982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멤버인 한문연·심재원을 영입했다. 한문연은 입단 첫해 심재원과 주전 경쟁 속에서 정규리그 전체 경기의 절반가량 소화했다. 하지만 최동원이 출전하는 경기에서는 함께 호흡을 맞췄다.

▲ 한문연은
 ">
▲ 한문연은 "마산상고 출신이 롯데 주전으로 8~9명 뛸 때도 있었다. 자부심이 클 수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그는 현재 고향 팀 NC에서 D팀 코치를 맡고 있다. /경남도민일보 DB

"제가 최동원 전담포수였죠. 연배가 심재원·최동원, 그리고 저거든요. 최동원 입장에서는 선배보다는 후배인 저와 배터리를 이루는 게 좀 더 편했던 것 같습니다. 최동원은 공을 위에서 내리꽂는 스타일이에요. 당시 타자들이 '몇 층 되는 빌딩 위에서 던지는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죠."

그는 역시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삼성과의 7차전. 롯데가 6-4로 앞선 가운데 9회 아웃 카운트 1개만 남겨놓고 있었다. 상대 타자는 장태수였다.

"포수는 투수한테 사인을 자신감 있게 줘야 하거든요. 그때 장태수를 상대로 '에라 모르겠다, 행님 직구로 갑시다'라는 느낌으로 마지막 사인을 냈어요. 최동원 공이 매우 높았는데 장태수 방망이가 나오는 게 보였어요. 순간 '됐구나' 싶었죠. 그런데 장태수가 나가던 방망이를 멈추며 볼넷이라고 1루로 뛰어가는 겁니다. 하지만 이미 롯데 선수들이 더그아웃에서 경기장으로 뛰쳐나오는 상황이었어요. 그런 분위기니 심판도 스윙 아웃을 선언했죠. 실제 방망이가 돈 것도 맞고요. 35년 전 일인데, 그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한문연은 이후 전성기를 보내다 1986년 말 어깨를 다치면서 주춤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경기에 출전했고, 1992년 플레잉코치로 활동하면서 또 한 번 우승을 경험했다.

"사실 그때는 큰 희열까지는 아니었어요. 우리 투수진이 염종석·윤학길·윤형배·박동희까지 쟁쟁했거든요. 한국시리즈에서도 빙그레를 상대로 4승 1패로 비교적 쉽게 이겼어요. 1984년에는 모두가 삼성 우승을 예상했는데, 우리가 그걸 극복했기에 더 큰 감격을 느꼈던 거죠."

그는 프로시절 '마산 출신 야구인'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고 한다.

"롯데 경기에서 어떨 때는 마산상고 출신이 8~9명씩 뛰고 그랬습니다. '롯데가 마산상고 없으면 안 된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마산야구장에서 시합을 하면 부담도 컸어요. 워낙 관중 열기가 높아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이었죠. 그래도 마산상고 출신들은 고향 사람들 정서를 아니, 동시에 힘이 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