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상고 출신 이호헌 등
지역 연고제 도입 밑그림
OB베어스 첫 전지훈련 마산행
삼미슈퍼스타즈도 진해 찾아
9월 26일 마산야구장 첫 경기
수용인원 2배인 3만여 명 몰려

-프로야구 역사적 출범-

오늘날 우리나라 최고 인기스포츠로 자리매김한 프로야구는 1970년대 중·후반 출범 싹을 틔웠다.

1960년대 후반 전국적으로 고교야구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자연스럽게 프로화 논의가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 1975년 재미교포 홍윤희 씨가 힘을 보태면서 프로야구 출범은 상당히 구체적인 단계까지 진행됐다. 하지만 유신 정권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추진력을 잃기 시작한 야구 프로화는 홍윤희 씨마저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좌초됐다.

그럼에도 프로야구 출범 논의는 야구장 안팎에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논의에 기름을 부은 건 신군부정권이다. 이들은 제5공화국 출범 직후인 1981년 5월, 국민을 정치에서 멀어지게 하려는 의도로 프로스포츠 출범을 수면으로 올렸다. 이즈음 문화방송(MBC)이 창사 20주년 기념사업으로 프로야구 창설 계획을 마련하고, 별도 창단 작업을 진행하던 이용일과 이호헌(마산상고 출신) 등이 출범 준비에 가세하면서 프로화는 급물살을 탔다.

그해 8월 이용일·이호헌이 '프로야구창립계획서'를 청와대에 제출하면서 출범 작업은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계획서 핵심은 △향토애 자극 △프랜차이즈(연고지)제 도입 △6개 팀 확정 △고교출신별 선수 선발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정부 지원금이 없어도 된다'는 내용이 군부정권 구미를 당기게 했다. 정부 보조를 필요로 하지 않은 이유는 대기업 참여를 바탕에 둔 덕분이었다. 대기업 참여에 군부정권이 적극적인 지지를 표하면서 프로야구 출범 작업은 구단 선정 절차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약 5개월 뒤 참여 기업·연고지 선정을 마친 야구계는 12월 11일 롯데호텔에서 창립총회를 열고 한국프로야구 출범을 공표한다. 창립총회에 참가한 구단은 MBC청룡, 롯데자이언츠, OB베어스, 삼성라이온즈, 삼미슈퍼스타즈, 해태타이거즈로 6개 팀이었다. 이들 기업은 각각 서울(MBC), 부산·경남(롯데), 대전·충청(OB), 대구·경북(삼성), 인천·경기·강원(삼미), 광주·전라(해태)를 연고지로 하고 프로야구 시대 개막을 알렸다.

▲ 1982년 3월 '프로야구 시대'를 알리는 6개 구단 심벌마크가 서울운동장 외벽에 걸려 있다.  /연합뉴스
▲ 1982년 3월 '프로야구 시대'를 알리는 6개 구단 심벌마크가 서울운동장 외벽에 걸려 있다. /연합뉴스

물론 그 사이 있었던 연고지 선정 작업이 마냥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표적인 사건이 롯데의 반발이다. 애초 롯데가 연고지로 원한 도시는 서울이었다. 당시 롯데는 과자업계 라이벌 해태가 참여하는 데 반발하며 '동종업계 참가를 묵인할 터이니 서울을 연고지로 달라'고 요구했다. 롯데의 강한 요구에 이호헌 프로야구 출범 추진위원은 '롯데와의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럭키금성을 끌어들인다'는 복안을 세워놓고 일을 지속했다. 오히려 '롯데가 아니더라도 맡을 기업은 있다'며 역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이는 제대로 통했다. 최종 결정권자인 신격호 롯데 회장이 한발 물러서 '연고지야 어떻든 프로야구를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내비친 것. 프로야구 시장성을 놓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롯데 항복에 더해 '프로야구 출범 3년 뒤 OB의 서울 입성을 보장한다'는 계약도 어렵사리 마무리되면서 오늘날 익숙한 각 구단 연고지 뿌리가 내려졌다.

-마산은 롯데 제2 연고지로-

지역안배, 특히 시장성을 중심으로 각 구단 연고지가 정해지면서 마산은 프로야구 출범의 직접적인 수혜자는 되지 못했다. 단독적인 지역 연고팀 없이 부산과 함께 롯데 연고지로 묶인 것인데, 다소 아쉬운 상황 속에서도 마산은 '특유의 존재감'을 뽐냈다.

시즌 개막 전 전지훈련 장소로 각광받은 게 한 예다. 1982년 초 '마산행'에는 OB베어스가 앞장섰다. 6개 팀 중 가장 먼저 코치진·선수 계약을 끝낸 OB는 1982년 2월 1일 마산에 스프링 캠프를 차렸다. 당시 OB의 마산 전지훈련 분위기를 <경향신문>은 이렇게 전했다.

'봄의 고향 마산은 프로야구 열기 속에 새봄을 기다리는 설렘으로 들떠있다. 가고파 시인 노산 이은상 씨를 낳은 문학의 고장이자 항도인 마산에 프로야구 OB베어스 팀이 스프링 캠프를 차리면서 시민 관심은 온통 프로야구에 쏠려 있다. 한 폭의 그림 같은 평화스런 남쪽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무학산 기슭의 마산고 교정은 시골잔칫집처럼 부산하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곰들(베어스)을 조련시키는 훈련 광경은 실업팀에서 볼 수 없는 조직적이고 강도 짙은 것이어서 호기심 어린 구경꾼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따뜻한 남쪽행에는 삼미슈퍼스타즈도 동참했다. 1982년 2월 5일 인천상공회의소에서 창단식을 연 삼미는 이틀 뒤인 7일 진해를 찾아 전지훈련에 돌입했다. 7명의 투수 등 모두 23명의 선수단이 땀방울을 흘린 곳은 진해공설운동장. <경향신문>이 기록한 당시 삼미 훈련 분위기는 다음과 같다.

'삼미는 다른 팀보다 템포를 빨리하여 실기훈련을 서두르고 있다. 캐치볼, 토스 배팅, 아메리칸 노크 타격 연습 등 시즌 오픈에 대비한 실전연습에 열을 올리고 있다.'

전지훈련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던 이들 지역 프로야구 열기는 그해 9월 마산야구장이 준공되면서 더욱 치솟는다. 준공을 기념하고자 프로야구 첫 경기가 열린 데 이어 시즌 종료 후에는 비공식 시범경기까지 개최하게 된 것.

1982년 11월 12~14일 마산야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시범경기에는 MBC청룡, OB베어스, 롯데자이언츠, 삼성라이온즈가 참여했다. 이 시범경기는 '경남에서도 프로야구 붐을 조성하겠다'는 전략을 안고 열렸는데 결과적으로 대성공이었다. 마산 사람들의 그칠 줄 모르는 야구 사랑은 프로야구에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고, 이는 훗날 '마산아재'로 대표되는 이 지역 야구의 변신·도약 기틀이 됐다.

▲ OB베어스는 1982년 2월 마산에 전지훈련 캠프를 꾸렸다. 마산고 운동장에서 훈련 중인 OB 선수들. /연합뉴스
▲ OB베어스는 1982년 2월 마산에 전지훈련 캠프를 꾸렸다. 마산고 운동장에서 훈련 중인 OB 선수들. /연합뉴스

-마산야구장 첫 경기-

마산에서 열린 첫 프로야구 경기는 1982년 9월 26일 롯데자이언츠-삼미슈퍼스타즈전이다. 경기는 마산야구장 준공을 기념해 열렸는데, 마산을 비롯한 경남 사람 관심이 대단했다.

입장권 예매분 1500매가 삽시간에 매진된 건 시작에 불과했다. 경기 개시 전부터 밀려들기 시작한 관중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용인원의 2배를 넘어섰다. 당시 마산야구장 수용 인원이 1만 5000명이었는데, 무려 3만여 명이 몰린 것이다. 질서를 잃은 몇 관중은 유리창과 셔터를 부수고 진입을 시도하기도 했고, 시구를 하기로 한 도지사조차 입장하지 못한 채 경기가 시작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경기 결과도 흥미로웠다. 1982년 프로야구는 전·후기리그로 나눠 치렀다. 후기리그에서 삼미는 이날 경기 전까지 4승 31패 승률 0.114, 리그 최하위에 머물고 있었다. 후기리그 3~4위권을 유지하던 롯데 입장에서는 자연히 승리가 기대됐던 셈. 하지만 경기에서 롯데는 8·9회 대거 8실점 하며 9-11로 패배했다.

마산에서 열린 첫 프로야구 경기를 승리로 장식하진 못했지만 위안거리도 있었다. 이 경기에서 마산상고 출신 롯데 정학수가 5타수 2안타를 기록했고, 같은 팀 박용성은 8회 마산야구장 첫 홈런을 쐈다. 삼미 원년 멤버이자 마산고 출신 감사용이 고향 팬에게 인사를 건넨 점도 추억이 될 만했다.

마산 사람이 내비친 야구 열기에 놀랐을까. 그해 말 롯데는 마산시에 2억 원을 기부하며 '마산야구장 야간 조명 설치'에 힘을 보탠다. 이듬해 조명 설치 작업이 마무리되고 롯데가 마산야구장 방문 경기를 늘리면서 이 지역 프로야구 시대도 활짝 열렸다.

<참고 문헌>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한국 야구사 연표>, 홍순일 편저, KBO·대한야구협회, 2013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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