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직선 배치로 위세 강조
건물 이동 편의성 떨어져
안정감 이유로 창덕궁 선호

◇입식문화와 좌식문화

미국에 1년 있을 기회가 있었다. 낯선 문화권으로 짧은 여행이 아니라 장기간 생활을 하려 하니 많은 일이 걱정과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인간 삶의 기본을 '의식주'라고 하는데 필자야 타고난 초딩 입맛이라 고기만 있으면 어떤 경우에도 끼니를 때우는 데 문제가 없었고, 옷도 익히 알려졌듯이 한국이 세상에서 가장 잘 입고 다니는 나라여서 크게 우려하지 않았다. 문제는 집이었다. 이리저리 알아보면서 살 집을 정한 다음 미국으로 향했다. 두 아이는 여정에 지쳐 아무 정신이 없었지만 나는 집이 다가오면서 사소한 고민에 빠졌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나 그냥 들어가야 하나의 문제였다. 답은 없고 그동안 본 드라마나 영화에서 미국인들이 신발 벗고 집에 들어가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 그냥 그렇게 하면 되겠거니 싶었다. 밤늦게 공항에 도착해 먼저 가 있던 동료의 도움으로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었는데 너무 바닥이 깨끗했다. 순간 망설였다. 그래도 사전에 미리 생각해 놓은 게 있으니 신발을 신고 들어갈 생각으로 상체는 앞으로 나가는데 다리가 나를 붙잡았고 머릿속에는 작지만 강한 외침이 들렸다. "이렇게 깨끗한 곳에 정말 신발을 신고 들어갈 거야?" 아주 잠깐이었지만 고민했다. 신발을 벗어야 한다고. 하지만 워낙 운동신경이 둔한 나는 상체의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신발을 신은 발을 방안에 내디뎠다. 그리고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가족들이 뒤에 있는데, 이런 사소한 일에 혼란스러워하는 가장의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마치 아폴로 11호에서 달에 첫발을 딛는 닐 암스트롱처럼 의연하게 걸어가며 생각했다. 드디어 미국 생활의 첫발을 이렇게 내디뎠구나. 하지만 등 뒤로 같이 있던 직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발 벗고 들어가셔도 돼요." 뻘쭘했다. "아, 그래?" 바로 현관으로 돌아 나와 신발을 벗고 들어가 짐을 풀었다. 뻘쭘하긴 했지만 뭔가 마음이 푸근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작은 일이었지만 내가 사는 공간에 신발을 신고 들어가는 것에 대한 강한 심리적 저항감을 겪은 순간이었다.

 

이렇게 생활공간에서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 방식을 입식생활이라고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의자, 소파, 침대 등이 필수적이다. 지금이야 우리나라도 서구식 생활방식을 많이 따라가서 이런 문화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도입되어 있지만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의자는 책상에 부속된 가구였다. 낮에 할아버지께서는 늘 양반다리를 하고 낮은 책상을 앞에 놓고 계셨고, 밤에 잠을 자기 위해서는 이부자리를 펴야 하는 게 일상이었다. 이런 생활방식을 좌식생활이라고 한다. 좌식문화에서는 들어갈 때 신발을 무조건 벗어야 한다. 신발을 벗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누가 밖에서 신발을 옮기지 않는 한 다시 들어간 곳으로 나와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 차이가 우리나라 건축의 발전 방향을 바꾸게 된 큰 요소 중 하나이다.(조재모, 2012)

 

▲ 경복궁 전경.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강령전, 교태전으로 이어지는 강한 중축선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문화재청
▲ 경복궁 전경. 광화문, 흥례문, 근정문, 근정전, 사정전, 강령전, 교태전으로 이어지는 강한 중축선이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문화재청

◇경복궁의 배치 - 강한 중축선

경복궁을 보자. 경복궁은 광화문에서 왕의 침전까지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다. 지금은 전각의 내부로 들어갈 수 없지만 옛날처럼 경복궁의 전각들을 들어가 볼 수 있고, 이 전각들을 한 바퀴 둘러보려 한다면 귀찮고 지루한 일을 반복해야만 할 것이다. 3개의 문은 그냥 지나가면 되지만 근정전이 나오면서 고난이 시작된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다시 앞문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다음 건물로 가려면 다시 건물의 뒤편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걸 사정전에서도 반복하고, 강녕전, 교태전에서도 반복해야만 한다. 여기까지 와도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난다. 중심축이 워낙 뚜렷하니 그걸 따라 이동했는데 유명한 경회루도, 세자의 권역인 동궁도 보지 못했다. 동궁은 근정전의 동쪽, 경회루는 서쪽에 있다. 이곳을 마저 보려면 걸음을 다시 돌려서 동서를 왔다 갔다 하는 수고를 해야만 한다. 눈치 빠른 분들은 아시겠지만 이렇게 한다고 해서 경복궁을 다 둘러본 것도 아니다. 건청궁도 못 봤고, 선원전도 못 봤다. 상황이 이런데 자금성을 지은 중국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궁궐에서 살 수 있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그들은 이렇게 살지 않았다. 신발을 벗을 필요가 없었다. 들어가는 문과 나오는 문이 같아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건물을 가로지르면 된다. 그러니 건물들을 일직선으로 배치해도 생활에 크게 불편한 점이 없었다.

하지만 왜 경복궁은 이런 배치를 하게 되었을까? 조선왕조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교적 가르침을 전면에 내세워서 만든 나라이다. 삼국시대, 고려시대 모두 불교를 기반으로 국가가 운영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유교를 내세운 조선왕조의 시작은 거의 1000년의 질서를 바꾸는 일이었다. 이 일을 하기 위해서 바뀐 세상의 모습을 빨리 백성의 눈앞에 보여줘야 했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궁궐은 이전과는 분명히 달라야 했고 그 결과가 지금 경복궁이다. 장대한 북악의 봉우리를 뒤로하고 광화문에서부터 근정전까지 이어지는 강한 중축선은 세상이 바뀌었음을 분명히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장치였다.

 

▲ 창덕궁 전경. 정면 가운데 돈화문을 지나 진선문, 인정문, 인정전이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너머로 편전과 침전 등이 능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문화재청
▲ 창덕궁 전경. 정면 가운데 돈화문을 지나 진선문, 인정문, 인정전이 사선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너머로 편전과 침전 등이 능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문화재청

◇또 다른 궁궐, 창덕궁

조선왕조의 수도 한양에는 다섯 개의 궁궐이 있다. 유교적 기반에서도 궁이 두 개 있어야 한다는 법칙은 없었다. 중국이나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기도 쉽지 않다.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조선왕조만 가진 모습이었다. 문제의 시작은 창덕궁이었다.

조선왕조는 한양이 아니라 개성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경복궁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왕자의 난이 일어나 태종이 이복형제와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을 죽인다. 이에 태조는 양위하고 태종의 양보(?)로 형인 정종이 즉위하고 서울을 벗어난다. 다시 개성으로 천도했다. 그런다고 이 시기가 가지고 있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개성 시가지에서 2차 왕자의 난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같은 형제들끼리의 싸움이었다. 여기서도 태종이 승리한다. 정종은 왕위를 태종에게 물려준다. 이미 1차 왕자의 난 이후 실권은 태종이 장악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태종은 태조의 지지를 받고 싶었고 그를 위한 조치 중 하나가 다시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이었다. 그런데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종묘 인근에 새롭게 궁을 만들었다. 이게 창덕궁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런 모습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아서 당시에도 비판이 뒤따랐다. 이에 태종은 경복궁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경복궁은 음양의 형세에 맞지 않고, 부끄러운 왕자의 난이 있었던 곳이라 거처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래도 중요한 일은 경복궁에서 처리하겠다고 답하고 있다. 태종은 자신의 손으로 이복동생들을 죽인 경복궁에 있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 태종만 창덕궁을 선호한 것은 아니었다. 태종 이후로 많은 임금도 창덕궁에서 기거하는 시간이 많았고 임란 이후 한양도성 내의 모든 궁궐이 불타버린 후에 가장 먼저 복원한 곳도 창덕궁이었으며 조선왕조의 마지막까지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면서 지금까지 왔다. 이런 모습은 누가 강요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수백 년 동안, 20명이 넘는 왕들이 한결같이 이곳을 선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학자는 그 이유를 자연경관에 어울리는 한국적인 건물 구성에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거칠 것 없이 일직선으로 3문 3조를 나열한 경복궁과는 달리 창덕궁은 응봉을 따라 중심전각들을 다닥다닥 배치했다. 중축선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나지막한 응봉을 등 뒤에 두고 건물들을 배치하니 각 건물에 있는 사람들도 안정적인 생활이 가능했다. 풍수적으로 말하면 배산의 형세가 자연스레 만들어진 것이다. 또 건물들 사이를 다니기도 편하다. 인정전을 보고 뒤로 다시 돌아갈 필요 없이 그냥 오른쪽으로 가면 또 다른 건물이 있고, 또 오른쪽으로 가면 또 다른 건물들이 있다. 이렇게 돌아도 창덕궁의 모든 곳을 둘러볼 수 있다.

이런 배치는 산사에서도 볼 수 있다. 범어사를 보자. 멋진 일주문(조계문)을 지나 보제루 너머 이 절의 중심인 대웅전이 나온다. 여기까지는 하나의 중심선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웅전만큼 중요한 관음전, 지장전, 팔상전 등은 모두 능선을 뒤로하고 옆으로 늘어서 있다. 이런 배열은 신발을 벗고 들어가 다시 정문으로 나와야 하는 생활방식에서 각 건물 사이를 다니기 가장 편한 구조이다. 이미 경복궁을 만들어 있어야 할 집을 만든 상황이니 새롭게 만들 곳은 내가 살고 싶은 방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게 창덕궁이고 이 궁궐이 아직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알게 모르게 우리 몸에 박혀 있는 좌식생활에 좀 더 맞는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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