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점 전부터 비정상적 예속
해방 후 경제적 자립 추진
미, 일본 재건 배려해 제한

일본이 경제보복을 뻔뻔하고도 자신있게 벌일 수 있는 것은 한국 경제의 일본 의존도가 높기 때문이다. 양국 경제의 상호 연계성이 높은 상태에서 한국의 예속성이 심하다 보니, 강제징용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하기보다는 원자재 수출을 규제하는 엉뚱한 조치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 경제가 대일 의존적이 되는 과정은, 한·일 간에 현대적 무역관계가 시작된 1876년 강화도조약(정식 명칭은 조일수호조규) 이후 143년간의 역사 속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두 나라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했다. 이 기사는 한국 경제에 불리하게 작용해온 그 두 나라의 영향력에 관한 것이다.

◇1876년부터 무역불균형 시작

1876년 이후 일본은 '함포 외교'로 상징되는 군사·외교력의 우위를 앞세워, 영국제 면직물 등을 중계무역 하는 방식으로 조선 시장을 잠식했다. 이후 지속적인 대일 무역적자 속에서 조선이 일본에 점차 의존하게 되는 상황이 청나라와 일본의 무역통계에서도 확인된다.

1859~1948년의 청나라 및 중화민국 수출입 통계를 기록한 <중국 구(舊)해관 사료>의 '조선 부록'에 따르면, 조선 무역통계가 남아 있는 1885~1893년에 조선의 전체 순무역액(순수 무역액, 재수출액 공제) 4670만 5213멕시코달러 중에서 74.4%인 3475만 9055멕시코달러가 일본과의 무역에서 발생했다. 무역통계가 멕시코달러로 집계된 것은, '조선 부록'을 작성한 청나라의 통계가 멕시코달러로 작성됐기 때문이다.

조선 대외무역의 74.4%가 일본에 의존한 데 비해, 일본 대외무역이 조선에 의존한 비율은 매우 낮았다. 대장성이 발간한 <대일본 외국무역 연표>에 따르면, 1885~1893년 일본의 전체 무역액 11억 1681만 엔 중에서 대(對)조선 무역액은 2.4%인 2641만 엔에 불과했다.

조선의 대일 의존율은 74.4%인 데 반해, 일본의 대조선 의존율은 2.4%에 불과했다. 일본의 군사·외교적 우위 속에서 조선이 일방적으로 적자를 감수하는 가운데, 조선의 대일 의존도가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것이다.

조선의 무역적자가 얼마나 심했는가는 조선의 금이 일본으로 대량 유출된 데서도 드러난다. 무역대금을 결제할 현금이 적다 보니 그 대용으로 금이 대거 반출됐던 것이다.

<중국 구해관사료>에 따르면, 위 9년간의 총 무역적자 1699만 1573멕시코달러의 48.4%인 822만 6594멕시코달러어치의 금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흘러갔다.

<1892년도 조선의 대외무역에 관한 보고서>에서 조선 총세무사 모건(F.A. Morgan)은 "이 나라의 금 유출은 외국 수입의 수요에 부응하기 위해 해외로 유출된 이 나라의 상품으로 정확히 취급될 수 있다"고 말했다. 외국 상품을 수입하는 대가로 해외로 나간 상품이 바로 금이라는 이야기다. 금이 결제수단으로 활용됐다는 것이다. 이렇게 국부가 대거 유출될 정도로 조선의 대일 무역 의존 및 무역역조는 심각했다.

그 같은 의존도가 한층 더 견고해진 계기는 일본에 의한 국권침탈이었다. 의존성이 한층 더 강해지는 일은 1910년 국권침탈로부터 정확히 10년 뒤에 나타났다.

1910년 이전에 조선 정부 혹은 대한제국 정부는 서양 국가들에 무역상의 '최혜국 대우'를 약속했다. 해당 국가가 제3국들에 비해 차별받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수교조약이나 통상조약에 넣었던 것이다.

대한제국을 강점한 직후, 일본은 그런 최혜국대우 조항을 파기하지 않았다. 향후 10년에 한해 서양열강이 식민지 조선과의 무역에서 최혜국 대우를 계속 향유할 수 있도록 했다. 서양열강이 조선에 대해 갖고 있던 무역상의 혜택을 10년에 한해 연기해준 것이다. 김옥근 경상대 교수(2000년 작고)의 <한국 경제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일제는 1910년 한국을 강제 합병한 후 종래에 최혜국대우를 받기로 되어 있던 미국·청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러시아 등에 대하여 한일합병이 성립된 사실을 통고하고, 종전에 한국 정부와 체결한 제(諸)조약을 무효로 하되 관세에 관해서는 10년 동안 종전대로 시행할 것을 선언하였다."

서양열강이 조선에 대해 갖고 있던 권리를 식민지 조선을 상대로 10년 더 행사할 수 있도록 한 것은, 일본이 그들에게 진 빚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 1894년 청일전쟁을 벌일 때 영국·러시아·독일·프랑스·이탈리아·미국이 일본의 도발을 묵인해주고, 그 뒤 조선 강점을 추진할 때 영국과의 영일동맹과 미국과의 가쓰라-태프트 밀약 등이 도움이 됐던 데 대한 보답이었다.

◇1945년 기회가 무산된 이유

이처럼 1910년 이전에는 일본의 함포외교에 의해, 1910년 이후에는 일본의 식민지배에 의해 한국 경제의 대일 의존도가 나날이 높아져 갔다. 그런데 이 관계는 1945년 8월 15일 중대 위기를 맞았다. 한국이 만성적 의존에서 벗어나 새롭게 도약할 수 있는 기회가 그해 그날 주어졌다.

<민족경제론>의 저자인 박현채 조선대 교수(1995년 작고)는 '이 땅은 아직도 일본의 식민지인가'라는 기고문에서 "1945년 8·15 이후 한일관계는 새로운 차원에서 대등한 민족관계를 바탕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지난날의 불평등했던 수탈과 피수탈 관계에 대한 보상과 함께 호혜적인 관계에서 새롭게 시작되었어야 했다"(<중등우리교육> 1992년 8월호)고 안타까워했다.

8·15 당시 21세 청년이었던 이 경제학자는, 일제가 패망한 뒤에도 대일 의존도가 개선되지 않는 부조리한 상황을 계속 지켜봐야 했다. 패망하고 쫓겨간 일본에 의해 한국 경제가 여전히 지배당하는 기현상이 종식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의 힘 때문만은 아니었다. '두 나라의 힘' 때문이었다. 1876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이 한국 경제를 지배한 것은 주로 일본의 힘 때문이지만, 1945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그렇게 흘러온 것은 '두 나라의 힘'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한 나라는 도널드 트럼프의 나라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로 한일관계가 정상화되기 전부터, 미국은 한국 경제의 대일 종속에 신경을 썼다. 한국 경제가 종전대로 일본에 예속된 상태로 남도록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이 벌인 일 중 하나가, 한국에 제공한 원조자금을 일본 상품 수입에 쓰도록 압력을 가하는 것이었다.

차철욱 부산대 연구교수의 논문 '1950년대 한일무역 중단의 정치적 성격'에 이런 설명들이 있다.

"한국전쟁 휴전 후 시작된 미국의 부흥원조를 둘러싼 한·미·일의 갈등은 한·일 무역 갈등을 더욱 심각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갈등은 1953년 8월 4일부터 9일까지 미 국무장관 덜레스의 한국 방문으로 부각되었다. 덜레스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서명을 목적으로 방문했지만, 부흥원조의 대일 구매를 요구할 목적도 갖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자립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공업화를 위해 원조(자금)의 사용권과 원조 조달 지역, 구입 품목을 한국이 원하는 대로 하고자 구매권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일본으로부터 소비재를 도입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무역업자에 대한 민수물자 공매제도를 한국이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구매권을 넘겨줬다."(효원사학회가 2006년 발행한 <역사와 세계> 제30권)

미국이 대한(對韓) 원조를 제공하면서, 그것을 일본 소비재 상품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도록 압력을 넣었으며 1953년에는 국무장관까지 보내서 압박을 직접 행사했다는 이야기다. 대한 원조가 한국이 아닌 일본의 경제부흥에 쓰이도록 배려한 것이다. 대한 원조에 관한 당시 포스터에는 '한국을 재건하자'고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을 재건하자'는 목표로 대한 원조를 실시했던 것이다. 위의 박현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대일 종속관계는 한·미·일 삼각관계를 기초로 계속 확대·심화되면서 막대한 경제 잉여의 대일 누출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것이 그동안의 사정이다."

오늘날 일본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인간적인 호소를 외면하고 도리어 경제보복을 할 수 있는 것은, 현재까지도 한국 경제가 미국의 영향력 하에 대일 의존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지배의 청산을 요구하는 한국을 상대로 '너희가 먹고사는 경제구조를 상기해보라'며 아베 신조가 뒷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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