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스무 가지 토종 콩 심어
소중한 씨앗 지켜 후대에 전해야

나는 한 해 농사 가운데 콩 농사가 가장 재미있고 신바람이 난다. 동글동글 모여 있는 콩들을 보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콩을 겨우내 가려서 통에 담아 놓으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모양과 크기와 빛깔 어느 것 하나, 같은 것이 없지만 한데 모인 콩들은 서로 참 잘 어울린다. 좋은 콩을 가려 씨앗 봉투에 담아 선반에 올려놓으면 그 뿌듯함은 무어라 말할 수가 없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부터 콩으로 만든 건 무엇이든 잘 먹었다. '두부, 청국장, 된장, 콩전, 콩국' 지금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이다. 어릴 때는 내가 콩 농사를 짓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지만 어쩌면 콩은 나와 깊은 사이가 될 내 운명이었나 보다.

토종 콩을 심는다고 하면 몇 가지 종류를 심느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해마다 콩 종류가 한두 가지씩 늘다 보니 헷갈릴 때가 많다. 얼마 전에 또 묻는 사람이 있어 콩을 쭉 펼쳐 놓고 다시 세어 보았다. '쥐눈이콩, 퍼렁찰콩, 오가피콩, 아가콩, 선비자비, 콩나물콩, 오리알태, 아주까리콩, 아주까리밤콩, 갈색얼룩콩, 붉은팥, 검은팥, 애경팥, 녹두 그리고 얼룩 울타리콩, 흰동부, 갓끈동부, 어금니 동부, 대추콩, 제비콩' 모두 스무 가지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농사를 짓기 전에는 "콩이 콩이지. 콩국수 할 땐 하얀 콩, 콩자반 할 땐 까만 콩 아니야?" 하는 정도만 알았다. 조금 더 알아보아야 강낭콩과 완두콩 정도였다. 하지만 콩이라고 다 그냥 콩이 아니다. 밥이 잘 지어지는 콩, 두부를 만들면 좋은 콩, 콩나물을 키워 먹는 콩, 장을 담그는 콩. 콩 생김과 성격에 따라서 쓰임도 다양하다. 또 자기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양쪽으로 까만 얼룩이 있는 콩은 선비가 먹이 묻은 손으로 잡은 콩이라고 해서 '선비자비'라고 한다. 검은 콩 가운데 가장 작은 콩은 쥐 눈처럼 작다고 해서 '쥐눈이콩'이다. 이름을 얼마나 잘 지었는지 콩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다 보면 발음부터 입모양과 느낌까지 참 좋다. 풍성한 우리말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오늘은 감자를 캔 밭을 다듬어 콩 모종을 옮겨 심었다. 콩을 심을 때마다 거름이 없어도, 두둑이 높지 않아도 잘 자라 주는 콩에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거기다 땅까지 기름지게 해 주니 마음에 쏙 드는 친구다. 콩을 다 심었으니 이제 고라니가 콩밭에 못 들어오도록 하는 일만 남았다. 지난해에 밭가로 울타리를 쳤지만 이리 막고, 저리 막아도 늘 고라니가 한 수 위였다. 결국 씨앗을 받지 못한 콩도 있어서 이웃 마을에서 토종 콩 농사를 짓는 이모에게 다시 나누어 받아야 했다. 올해는 콩 옆으로 동물들이 싫어한다는 깨를 둘러 심었다. 고라니가 이 콩이 꼭 지켜야 하는 토종 씨앗이라는 걸 알아주면 좋을 텐데…. 고라니는 자기 때문에 내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지 싶다.

콩을 종류별로 나누어 심고, 털고, 가르고, 씨앗을 모아 두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손이 아주 많이 가는 일이다. 하지만 청년 농민 누군가 이 씨앗들을 이어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몇 천 년 전부터 이어진 씨앗들을 우리 세대에서 잃어버린다면 참 무책임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미 많이 빼앗기고 사라져 버렸지만 지금 남아 있는 씨앗이라도 귀하게 지켜가고 싶다. 오랜 세월 다양한 빛깔과 쓰임으로 우리 곁을 지켜준 콩을 잃고 싶지 않다. 제맛과 빛깔을 잃지 않은 콩들이 한데 모여 아름답게 어우러지듯이, 나도 이 세상과 그렇게 어울려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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