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상고 청룡기 깜짝 준우승
마산고 야구부 1980년 또 부활
1981년 마산양덕초 야구부 결성
이듬해 말 경남대도 정식 창단

-마산상고 '강팀에 강했다'-

마산상고(현 마산용마고)는 1980년 전국대회 준우승·4강 성적을 거두며 '명문 부활'을 알렸다. 이 당시 마산상고는 사이드암 박동수(58, 전 마산용마고 감독)가 마운드를 든든히 지켰다. 또한 이창원·박덕춘은 타선을 이끌었다.

1980년 4월, 마산상고는 그해 첫 전국대회인 '제14회 대통령배쟁탈 전국고등학교 야구대회'에 출전, 1회전서 서울명지고와 맞붙었다. 마산상고는 선발 박동수가 1회부터 흔들리며 2점을 내주는 등 결국 1-6으로 무릎을 꿇었다. 5회 이창원이 대회 1호 홈런을 날린 것에 만족해야 했다.

마산상고는 6월 열린 '제35회 청룡기쟁탈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명문 부활 신호탄'을 쐈다.

마산상고는 1회전서 청주세광고와 맞붙었다. 역시 박동수가 선발로 나섰는데, 이번에는 상대 타선을 2안타로 꽁꽁 묶으며 1실점, 4-1 승리를 이끌었다.

마산상고는 8강에서 우승 후보 서울충암고와 맞붙었다. 6월 20일 경기에서 7회까지 0-3으로 끌려가다, 8·9회 잇따라 득점을 뽑으며 3-3 동점을 만들었다. 이날 경기는 연장 12회까지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마산상고는 다음날 오전 9시 30분 경기가 속개되자마자 승부를 결정지었다. 13회 초 2사 만루 찬스에서 6번 타자 박덕춘이 내야 땅볼을 쳤다. 그런데 충암고 2루수가 유격수로부터 송구받은 볼을 놓치는 실수를 범했다. 마산상고는 행운 속에서 4-3으로 충암고를 눌렀다. 당시 <경향신문>은 관련 기사 제목을 '청룡기 중고야구 마상 돌풍…거함 충암 격침'으로 뽑았다.

마산상고는 4강에서 서울중앙고를 7-3으로 꺾고 대망의 결승에 진출했다.

우승컵을 놓고 다툴 상대는 당시 '야구 천재'로 불리던 박노준(57, 현 우석대 레저스포츠학과 교수)을 비롯해 김건우 등이 있는 서울선린상고(서울인터넷고)였다. 마산상고는 에이스 박동수가 마운드에 올랐는데, 2회 1점, 3회 2점을 내줬다. 마산상고는 5회 1사 만루 황금 찬스를 맞았지만, 대타로 나선 조영천이 병살타를 치며 기회를 날렸다. 마산상고는 상대 박노준 구위에 꽁꽁 묶인 채, 7회에 2점을 추가 실점하며 결국 0-5로 완패했다. 마산상고는 준우승과 투수 이영윤이 감투상을 받은 것에 만족해야 했다.

마산상고는 이후 7월 '제10회 봉황기쟁탈 전국 고교야구'에도 출전해 2회전까지 올랐다.

마산상고는 8월 '제32회 화랑기쟁탈 전국 고교야구대회'에서 서울경기고를 3-1, 목포상고를 10-3으로 격파하고 또 한 번 4강에 진출했다. 재미있는 것은 8강전부터 콜드게임 룰이 적용되지 않는데도, 심판이 이를 몰라 10-3 상황에서 마산상고 콜드게임 승을 선언했다. 목포상고도 이를 파악하지 못했는지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아, 경기는 마무리됐다.

마산상고는 천안북일고와의 4강에서 '0의 행진'을 이어가다 연장 10회 무너지며 0-3 패배로 분루를 삼켰다.

마산상고는 10월 '제34회 황금사자기쟁탈 전국지구별 초청 고교야구 쟁패전' 8강에서 선동열이 선발로 나선 광주일고에 0-7로 완패했다. 당시 광주일고는 마산상고 투수 박동수에 대비하기 위해, 경기 전날 실업 롯데 사이드암 투수 박노삼을 데려와 타격 연습을 했다. 광주일고는 실제 경기에서 박동수를 상대로 타격 불을 뿜었으니, 특훈이 주효했던 셈이다.

마산상고는 1981년 들어서는 7월 '제33회 화랑기쟁탈 전국 고교야구' 2회전 진출, 8월 '제11회 봉황기쟁탈 전국 고교야구대회' 2회전 진출, 9월 '제35회 황금사자기쟁탈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야구쟁패전' 1회전 탈락 등을 남겼다.

1981년 11월에는 고교 졸업생들끼리 맞붙는 '제3회 야구대제전'이 열렸다. 마산상고는 박영태(60, NC 창단 초기 수비코치) 등의 활약으로 8강까지 진출했다.

요컨대 1980년대 초 마산상고는 '강자에 강한 팀'으로 명성을 날렸지만, 동시에 '기복이 심한 팀'이라는 달갑지 않은 꼬리표도 달았다.

▲ 마산상고는 1980년 6월 '제35회 청룡기쟁탈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 8강에서 우승 후보 충암고를 4-3으로 눌렀다. 당시 <경향신문>이 관련 내용을 '마상 돌풍…거함 충암 격침'이라는 제목으로 다룬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 마산상고는 1980년 6월 '제35회 청룡기쟁탈 전국 고교야구선수권대회' 8강에서 우승 후보 충암고를 4-3으로 눌렀다. 당시 <경향신문>이 관련 내용을 '마상 돌풍…거함 충암 격침'이라는 제목으로 다룬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캡처

-마산고 6년 만에 재창단-

마산고 야구부는 1974년 선수 부족 등으로 두 번째 해체 아픔을 겪었다. 그러다 1980년 또 한 번 부활해 6년 만에 전국 대회에 얼굴을 내밀었다. 마산고는 그해 7월 '제10회 봉황기쟁탈 전국 고교야구대회'에 출전했는데, 1회전서 성남고에 3-9로 패했다.

마산고는 1981년 5월 '제15회 대통령배쟁탈 전국 고교야구대회'에서 2회전 진출 성과를 거뒀다. 6월 '제36회 청룡기쟁탈 전국 중고야구선수권대회'에도 경남 대표로 출전, 1회전서 성남고를 상대로 8-0 콜드게임승을 거뒀다. 하지만 2회전서 경북고 성준의 투타 활약에 밀려 2-5로 패했다. 마산고는 7월 '제3회 대붕기쟁탈 전국 고교야구대회', 8월 '제11회 봉황기쟁탈 전국 고교야구대회'에 잇따라 참가했지만 1회전서 탈락했다.

중학 팀은 마산동중이 1980년 6월 '제35회 전국 중학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지만 1회전 탈락 등 주목받을 만한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초등학교도 마산성호초가 전국대회에 얼굴을 알리는 정도였다. 마산성호초는 1980년 6월 '제10회 회장기쟁탈 전국 국민학교야구대회' 2회전에 진출했지만, 삼척진주초에 4-9로 패하며 더 높은 성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8월에는 '제2회 전국 국민학교야구선수권대회'에서 1회전 탈락했다. 마산성호초는 1981년에도 5월 '제11회 회장기쟁탈 전국 국민학교 야구대회'에 출전해 1회전서 탈락했다. 9월 '제3회 전국 국민학교 야구선수권대회'서는 2회전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

이런 가운데 1981년 마산양덕초등학교가 야구부를 창단했다.

또한 경남대가 1981년부터 준비에 들어가 이듬해 말 야구부를 정식 창단했다. 마산지역 초·중·고·대 연계가 비로소 완성된 것이다.

한편 '마산 야구인' 김차열은 1981년 7월 실업 후기 1차 리그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1964년 마산상고 전국체전 우승을 이끌었고, 제일은행 소속으로 1970년대 실업리그 타자로 맹활약했다. 그는 제23회 백호기대회 타격·홈런·타점 3관왕, 1974년 실업리그 24게임 연속 안타 기록 등을 세웠고, 국가대표로도 이름 날렸다. 김차열은 36세 나이로 은퇴한 후 미국에 이민을 갔다.

1981년 9월에는 일본과 맞붙을 고교대표팀이 꾸려졌는데, 마산고 외야수 임경택이 포함됐다. 당시 고교 대표팀 멤버는 △투수 김건우(서울선린상고)·김정수(광주진흥고)·차동철(광주일고)·조계현(군산상고) △포수 김상국(천안북일고)·장채근(광주상고) △내야수 류중일(경북고)·강기웅(대구고) 등이었다.

 

<참고 문헌>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경남대학교 70년사>, 경남대학교 70년사 편찬위원회, 경남대학교, 2016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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