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해중 진학해 처음 공 잡고
은퇴 후 리틀야구단 이끌어
"지역 야구부 안 남아 씁쓸"

감사용(62). '연식'이 좀 된 야구팬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선수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는 삼미슈퍼스타즈(OB 베어스에서 은퇴) 투수 출신으로, 1982년부터 1986년까지 프로 무대에서 활약했다. 5시즌 동안 통산 61경기에 나와 1승 15패 1세이브, 평균자책점 6.20이라는 다소 초라한 성적을 거뒀지만, 그의 '통산 1승' 과정을 영화화한 <슈퍼스타 감사용>이 지난 2004년 나오면서 유명해졌다.

그는 진해중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했고, 삼미 진해 전지훈련 때 스카우트되는 등 '진해'와 각별한 인연을 두고 있다. 현재도 진해리틀야구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진해 야구'에 마지막 열정을 쏟고 있다.

그는 김해 진영에서 태어났지만, 진해가 운명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 감사용(가운데) 씨는 현재도 진해리틀야구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남석형 기자
▲ 감사용(가운데) 씨는 현재도 진해리틀야구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남석형 기자

"진영대흥초등학교 시절 어깨가 좋아 '공 멀리 던지기' 대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6학년 어느날, 친척집에 간다고 진해를 찾았어요. 진해역에서 내려 시가지를 바라보니까 김해 시골길하고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길이 깨끗하게 닦여있고, 이국적인 분위기랄까요, 그런 게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침 공설운동장에서 진해대야초 야구부가 경기하는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그때 야구를 너무 하고 싶은 겁니다. 아버지한테 진해대야초로 전학 보내 달라고 했고, 뜻대로 됐습니다."

그는 야구를 하기 위해 나름의 전략을 짰다. 그 과정에서 시간이 조금 지연되기도 했다.

"진해대야초 바로 옆에 진해중이 있었는데, 이 학교 역시 야구부를 두고 있었습니다. 저는 진해중에 진학해서 야구를 시작하겠다는 마음이었죠. 성적이 안돼 1년 유급 끝에 진해중에 입학했습니다. 야구부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선배들이 창고에서 후배들에게 기합 주는 걸 봤습니다. 장난 아니었습니다. 그때는 좀 그랬어요(웃음). 그래서 조금 늦춰 2학년 때부터 야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공부랑 개인 훈련을 병행했어요. 밤에는 진해 탑산에 올라가 뛰고, 또 공도 던지며 준비했죠. 마침내 2학년 때 체육 선생님 권유 형식으로 야구공을 본격적으로 잡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 진해중은 마산중·마산동중 에 실력 면에서 크게 뒤졌다고 했다. 전국대회에 나가고자 예선전을 치를 때마다 마산지역 양대 중학교에 번번이 가로막혔다고. 그럴 만도 한 게 당시 마산동중만 하더라도 1984년 KBO 한국시리즈 MVP에 빛나는 유두열(2016년 9월 별세)이 활약하는 등 선수층이 두꺼웠다. 이 때문에 진해중은 전국대회에 나갈 기회가 그리지 많지 않았다.

감 씨는 그럼에도 당시 '진해 야구 저변'은 어느 정도 깔렸었다고 기억했다. 그 중심엔 해군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만 해도 진해 초·중학교에 야구부가 있었고, 특히 해군에서 야구를 많이 했어요. 사회인 야구팀이 있을 정도였죠. 진해공설운동장은 항상 야구하는 사람으로 붐볐습니다. 우리 진해중 야구부도 여기서 훈련을 많이 했어요. 당시엔 해군이 중학교 야구부를 많이 밀어줬습니다. 한번은 중2 때 울산서 열린 도민체전에 진해 중학부 대표로 참가했는데, 돌아오는 차편이 없어서 성인 대표로 출전했던 해군 트럭을 얻어타기도 했습니다. 아, 그리고 제가 군대 갈 무렵에는 진해남중에 야구부가 창단했는데, 그때 공필성(현 롯데 자이언츠 수석코치)이 창립 선수로 뛰던 모습도 기억이 나네요."

▲ 감사용 씨는 진해중에서 처음 야구를 시작했고, 삼미 진해 전지훈련 때 스카우트되는 등 '진해'와 각별한 인연을 두고 있다. 사진은 감 씨의 삼미 시절 사진과 유니폼. /경남도민일보 DB
▲ 감사용 씨는 진해중에서 처음 야구를 시작했고, 삼미 진해 전지훈련 때 스카우트되는 등 '진해'와 각별한 인연을 두고 있다. 사진은 감 씨의 삼미 시절 사진과 유니폼. /경남도민일보 DB

감 씨는 마산고 졸업 후 군 복무를 마치고 마산동중 감독직을 제안받았지만, "너무 이른 나이에 감독을 할 수 없다"며 고사했다. 그러다 야구에 대한 미련을 어느 정도 접고 창원 삼미특수강에 입사했다.

"삼미특수강에 들어와 보니 여기 직원들도 야구를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입사 이후 창원공단 이사장기 대회에 자주 나갔습니다. 제가 명색이 그래도 야구선수 출신 아닙니까. 직장인들 상대는 '식은 죽 먹기'였죠. 당시만 해도 창원공단에만 사회인 야구팀이 20여 개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삼미슈퍼스타즈가 진해로 전지훈련을 왔어요. 제가 진해 사정을 잘 아니까 길 안내도 하고, 같이 합숙하면서 하루에 연습구를 많이 던져줬어요. 하루 공 1000개씩 던져주고 그랬습니다. 당시 코치진이 왼쪽투수가 필요하다고 해서 삼미슈퍼스타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뭐 일종의 파견근무였죠."

감 씨는 은퇴 이후에도 양덕초 감독, 김해내동중학교 창단에도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지난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진해를 연고로 한 국제디지털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으며 '고군분투'했다. 이후 진해리틀야구단 감독을 10년 넘게 맡고 있다. 그는 현재 진해에 야구부 하나 남아 있지 않은 현실에 무척 씁쓸해했다.

"당시 진해시가 국제디지털대 야구부 숙소 지원 등을 약속했는데, 팀이 꾸려질 무렵 관심을 거두는 바람에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진해 야구 부활' 노력을 거둘 수는 없습니다. 제가 진해리틀야구단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진해는 야구로 맺어진 고향같은 곳이니까요."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