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길 옹은 1926년생으로 올해 만 93세다. 생존한 마산 야구인 가운데 가장 원로다. 그는 1940년대부터 1958년까지 마산군 팀에서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가늠할 수 없는 세월 속에서도, 옛 기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있다. 60~70년 전 뛰던 시절, 팀 주전 선수를 포지션별로 줄줄 읊는다. 그를 경남야구협회에서 두 차례 만났다. 하지만 옛이야기를 다 듣기엔 부족한 시간일 수밖에 없었다. 

김성길(93) 옹은 생존한 마산 야구인 가운데 가장 원로다. 지난 2018년 10월 7일 창원 마산야구장 마지막 홈경기에 시타자로 나선 김성길 옹의 모습. /NC다이노스
김성길(93) 옹은 생존한 마산 야구인 가운데 가장 원로다. 지난 2018년 10월 7일 창원 마산야구장 마지막 홈경기에 시타자로 나선 김성길 옹의 모습. /NC다이노스

야구광 선생과의 인연

김성길 옹은 마산 자산동에서 태어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에 입학했다. 그가 2학년일 때, 자산동을 비롯한 지금의 신마산 학생들은 새로 개교한 완월초등학교로 전출됐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는데, 특히 야구에 흥미를 느꼈다. 동네 아이들과 모여 직접 하기도 했다. 주먹으로 고무공을 치는 ‘손 야구’였다. 

“9살 때 야구라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1930년대 중반, 지금의 신마산 함흥집 근처 자리에 나카무라 광산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거기 사람들하고 철도역(마산역) 근무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야구 시합을 했어요. 장소는 ‘중앙운동장(지금의 마산 중앙동 장군천 인근)’이었어요. 경기 열린다는 얘길 들으면, 자산동에 살던 저는 걸어서 땀 뻘뻘 흘려가며 보러 가는 거죠.” 

그는 완월초 1회 졸업 후 마산상업학교(현 마산용마고로 당시 중·고 5년 과정)에 진학했다. 여기서 지금과 같은 방망이 야구를 접했다.

“오쿠다라는 부기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이분이 엄청난 야구광이었던 거죠. 이 선생님이 갑조·을조 2개 반에서 운동 좀 하는 애들을 뽑았습니다. 제가 갑조 주장 격이었습니다. 소화 16년(1941년) 당시 우리 학교가 옛 로얄호텔(마산합포구 불종거리) 자리에 있었습니다. 부기 선생님이 토요일마다 기숙사 운동장에서 야구를 시켰습니다. 그때 제 별명이 ‘오토바이’였습니다. 발이 빠르고 민첩해서 야구를 곧잘 했던 거죠.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운동을 더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마산상업학교는 지금 자리로 터전을 옮길 준비를 했다. 학생들은 신축 학교 공사에 직접 동원되었다고 한다. 공사는 학교(옛 로얄호텔 쪽) 건물 일부를 부수고, 거기서 나온 벽돌을 새 학교로 옮겨 짓는 식이었다. 학생들이 벽돌 나르는 역할을 했다. 제대로 공부할 여건이 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더군다나 태평양전쟁 때문에 예정보다 1년 이른 1945년 4월 졸업해야 했다.

마산군 팀은 1953년 9월 대구에서 열린 '제8회 전국도시대항대회' 결승에서 인천군에 2-6으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마산군 선수단이 대회 후 단체 촬영을 하고 있는 장면. 이 사진은 마산 야구인 김성길 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대한야구협회(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 기증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마산군 팀은 1953년 9월 대구에서 열린 '제8회 전국도시대항대회' 결승에서 인천군에 2-6으로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마산군 선수단이 대회 후 단체 촬영을 하고 있는 장면. 이 사진은 마산 야구인 김성길 씨가 소장하고 있다가 대한야구협회(현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에 기증했다.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1940~1950년대 마산군 주전 활약

그는 졸업 이후 세무 공무원 생활을 잠시 하다 동양주조(이후 유원산업) 경리과에서 일했다. 

당시 마산지역에는 직장별 야구팀이 꽃을 피웠다. 최강 ‘남전(南電·한전)’을 비롯해 제일은행·진일철공·어업조합·JS(자산동) 등 10여 개나 됐다. 이에 마산야구협회가 ‘전마산 직장별 연식야구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하지만 운영은 동네야구팀 수준이었다. 한 선수가 남전에서 조금 뛰다 제일은행 요청을 받으면 또 한 달 정도 뛰어주는 식이었다. 

그 역시 잠시 뒤로했던 운동을 다시 시작했다. 한 달은 이쪽 팀, 또 한 달은 다른 팀에서 뛰어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이들 팀 선수가 연합한, 즉 마산 대표 성격을 띤 것이 ‘마산군’이었다. 당시 ‘올(All·모든) 마산팀’이라 불렸다. 제대로 된 이 지역 야구팀 시초라 할 수 있다. 마산군은 1940년대 말 전국에서 위용을 떨쳤다. 특히 1948년 한 해 동안 거둔 성적이 34전 22승 1무 11패였다. 마산야구협회가 연말에 마산군 팀 성적을 지역민에게 보고하는 별도 자리까지 마련했다. 이 당시 마산야구협회장은 김종신(1904~1978)이었다. 그는 이후 동양주류(유원산업) 사장, 마산시장, 자유당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김성길 옹 역시 1946년 마산군 선수로 뽑혀 이후 10년 넘게 각종 전국 대회에 출전한다.

“내가 타격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어요. 타순이 6번 정도였습니다. 대신 100m를 12초대에 뛰어 도루를 잘했죠. 수비는 중견수를 맡았는데 어깨가 강했습니다. 공을 잡아서 홈으로 던지면 일직선으로 들어갔죠, 허허허….”

 

야구 대부 ‘박상권’을 보내다

그는 당시 주전 선수를 한 명씩 열거했다. 포지션별로 △투수 이성기 △포수 박재영 △1루수 김상대 △2루수 박상권 △3루수 이기역 △유격수 김계현 △좌익수 이종범·한경열 △중견수 김성길·배성수 △우익수 고창렬·김준호다.

그는 이들 개인 신상도 또렷이 기억한다. 

“고창렬은 키가 아주 컸어요. 아버지가 치과를 했고요. 여동생 두 명이 미군과 결혼한 기억이 나네요. 그도 나중에 미국으로 갔습니다. 그 이후 더는 못 봤죠. 투수이자 주장인 이성기는 나왔다 하면 무조건 완투였습니다. 6·25 터지고 나서 북으로 넘어가면서 더는 소식을 듣지 못했죠. 1루수를 봤던 김상대는 부산상고(현 개성고) 재학 당시 고교 선수 최초로 서울운동장에서 홈런을 날렸어요.”

당대 최고 스타는 박상권이었다. 일본에서 재학하며 전일본소년선발군에 뽑힐 정도로 기량을 뽐냈다. 대학 졸업 후 일본 실업팀 쇼쿠치구락부·만주다롄에서 활약했다. 그는 작은 키지만 빠른 발과 우수한 타격으로 일본 야구를 휘저었다. 박상권은 1945년 해방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마산군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1948년 하와이 원정 선수단인 올코리아(국가대표)에 마산상고 출신 김계현 등과 함께 발탁되기도 했다. 

김성길 옹은 박상권에 대해 이런 기억을 전했다.

“마산군 2루수였는데 수비를 기가 막히게 했습니다. 역모션으로 잡아서 1루로 송구하는 모습은 정말 멋졌습니다. 박상권 씨는 1947년 초대 마산상고 감독도 맡았습니다. 남성동에 집을 얻어 선수들을 먹이면서 가르쳤습니다. 마산상고 야구부가 이후 해체됐는데, 그가 1962년 흩어져 있던 선수들을 다시 모아 팀을 꾸렸습니다. 그렇게 마산야구를 위해 희생하다, 1964년 40대 때 폐병으로 저세상에 갔죠. 당시 마산군 선수들이 유니폼 입고 상여를 맸습니다. 남성동 집에서 출발해 창동·성호동을 거쳐 서원곡 근처 화장터까지 가며 그를 보냈죠.”

생존한 마산 야구인 가운데 가장 원로인 김성길(93) 옹이 1940~50년대 마산군 야구팀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내고 있다. /이창언 기자 un@idomin.com
생존한 마산 야구인 가운데 가장 원로인 김성길(93) 옹이 1940~1950년대 마산군 야구팀에 대한 기억을 끄집어 내고 있다. /이창언 기자 un@idomin.com

경남야구협회장으로 마지막 봉사

김성길 옹은 선수 은퇴 후 유원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며 당시 무학국민학교 감독을 맡았다. 보수도 없이 아침·저녁 시간 될 때 학교를 찾아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1960년대 중반까지 10년 가까이 했다.

그는 1970년대, 그리고 1980년대 초까지 한동안 야구계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야구에 흥미를 잃었던 시기라고 한다. 하지만 선배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계속된 주변 권유로 1984~1985년 경남야구협회장을 맡아 지역 야구에 마지막 봉사를 했다. 그리고 1986년 육순 잔치를 후배들 덕에 마산야구장에서 할 수 있었다. 

그는 NC다이노스 창단 이후 2013년 개막전 시타자, 2019년 개막전 시구자로 나서기도 했다. 

김성길 옹은 현재 아흔을 바라보는 아내, 그리고 딸과 함께 창원시 마산합포구에서 살고 있다. 그는 여전히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특히 마산라이온스클럽 일원으로 1년에 한 번 현지 교류차 일본에 간다. 일제강점기 시절 배웠던 일본어가 지금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이제 전국에서도 원로 중 원로

그는 선수 시절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전국 최초 삭발’을 꼽았다. 마산군은 1954년 10월 1~6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제9회 전국도시대항대회’에 참가했다. 마산군은 예선 라운드에서 승승장구했지만, 준결승에서 인천을 만나 1-9로 완패했다. 

“당시 인천 에이스가 서동준·유완식이었습니다. 우리 경기에 서동준이 선발로 나왔는데, 정말 커브를 잘 던졌습니다. 도저히 치기 어려웠죠. 그날 경기 후 이경구 감독이 선수들에게 머리(카락)를 깎으라고 해서 선수 모두 빡빡 밀었던 거죠. 그런 모습으로 마산에 돌아와서 시내를 다니니, 사람들이 ‘마산 바닥에 웬 스님들이 이렇게 많나’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허허허….”

그는 수많은 대회에 참가했기에 웃지 못할 일화도 많이 간직하고 있다. 

“당시 통행 금지가 있었지만, 야구 선수들은 예외로 해줬어요. 우리가 파출소에 가면 순경들이 파란 도장을 찍어줍니다. 그 표시가 있으면 밤 12시 이후에도 돌아다닐 수 있는 거죠.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부산에서 덕성여관이라는 곳에 숙소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옆방에 신혼부부가 들어온 거라. 짓궂은 친구들이 그 방 분위기를 살펴보러 창가 쪽으로 벽을 타고 갔나 봐요. 누가 그걸 보고 ‘도둑이야’라고 소리친 거예요. 여관 경비 서는 사람이 우리 방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우리 모두 자는 척하면서 그 상황을 모면했어요. 또 대구 어디 여관에서 머물 때는, 바로 옆 사이비 종교 단체가 밤새도록 울며 기도하는 거예요. 덕분에 선수들이 밤잠을 설쳤던 기억도 나네요.”

그 당시 야구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작전을 구사했다고 한다. 투수들도 직구·변화구 외 여러 구종을 구사했고, 지금처럼 포수와 사인도 주고받았다. 하지만 장비는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포수 같은 경우 마스크를 썼지만, 가슴·무릎 보호대를 착용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포수가 공에 맞아 뒹구는 경우도 흔했다고 한다.

그가 뛰던 마산군 시절 유니폼은 광목(표백되지 않은 면직물)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재질이 떨어져 슬라이딩만 하면 유니폼이 찢어지기 일쑤였다. 이에 하얀 해군복을 뜯어 만든 일명 ‘양달령’ 유니폼이 인기를 끌었다. 선수들은 그 외 공·방망이 등과 같은 용품을 주로 미국인들로부터 얻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시대 야구에서 가장 부러운 것이 장비라고 했다. 

“우리 때 야구공은 비 맞으면 가죽이 늘어나 ‘덜덜덜’ 소리를 냈습니다. 조금만 지나면 실밥이 터졌어요. 그러면 선수들이 집에 들고 가 바늘로 짚는 거죠. 공이 그만큼 귀했으니까요. 신마산 쪽에 미국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이들과 종종 시합했습니다. 공 몇 개 얻으려고 하는 거죠. 지금 야구공은 얼마나 깨끗하고 좋은지 몰라요. 그런데 공이 조금 긁혔다고 버리고 하는 걸 보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야구 원로들 가운데 전국에 내 위로 두 명뿐이에요. 부산에 장태연 씨, 그리고 서울에 또 한 명 있고요. 경남에서는 내가 1번으로 남아 있는 거죠. 마산 야구 원로로서 이런 얘길 전해줄 수 있다는 게 감사한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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