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삶 변수 생겼을 때 정체하는 인간 군상 묘사

삶이란 몇 가지 확실한 것을 뺀 나머지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는 요즘이다. 삶의 주체로서 대부분을 스스로 계획하고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한발 떨어져서 보면 나 자신이 오롯이 선택한 대로 살아가는 일이란 얼마나 힘든 일인가.

시간은 공평하다고 하지만 주중과 주말의 시간 질량은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 나는 습관처럼 일요일 밤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시점이면 다가올 주말의 계획을 세운다. 공을 들이고 세심하게 주말의 시간을 나누며 온전한 나의 하루를 그려본다. 내 시간이라 할지라도 선택지가 제한된 주중의 요일들은 주말을 위한 준비 스트레칭처럼 살고 주말은 온전히 나로서, 내 시간의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이다. 지난주 역시, 여느 날과 마찬가지의 주중 시간을 보냈다. 온전한 나의 주말을 기다리며.

◇교통사고

그러다 금요일 정오 무렵 교통사고가 났다. 그렇게 꼭 내가 삶의 주인이라고 착각할 때마다 불확실성은 불쑥 나타나, 내가 계획할 수 없는 시간들에게 나를 강제 연행한다.

병문안을 온 친구가 오늘 날씨 너무 좋지 않냐며 그날의 날씨만큼 화창한 표정으로 웃었다. 순간 친구가 오기 전 오늘의 날씨가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며칠 사이에 날씨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때에 맞춰 정확한 시간에 식사를 하고 약을 먹고, 치료를 받는 일은 규칙적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일상을 무의미하게 느끼게 만든다. 병실 문을 열고 건물 밖으로 나서고 나서야 오늘의 기온이 어떤지, 하늘의 구름은 어떤 모양인지 분별이 가능하다. 병원의 창문으로도 날씨 정도는 확인할 수 있지만 딱 그 창문 크기만큼의 하루, 그만큼의 인지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을 의도하지 않게 얻게 되는 것일까. 잃은 것이 있다면 반드시 얻는 것도 있다고 하던데, 때로는 얻은 것은 오랜 시간 보이지 않는다. 정말 존재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그때에는 발견하지 못하고 뒤늦게 깨닫는 경우도 있다.

일상이 일상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떤 시공간에 멈추어버린 듯한, 혹은 갇혀버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그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떠오르는 책이 한 권 있다. 바로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이다.

◇나와 세상의 간극

제3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와 제8회 젊은 작가상 수상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포함한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있는 이 책은, 삶이란 불확실성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상실을 겪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보통 단편을 묶어 한 권의 단행본으로 발행하는 경우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단편의 이름을 단행본의 이름으로 그대로 차용한다. 그러나 첫 시작을 알리는 단편 '입동'을 비롯해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는 바깥과 관련된 어휘나 여름이라는 계절적인 이미지조차 짐작하게 하는 제목이 없다.

<바깥은 여름>이라는 책의 제목은 작가가 7편의 작품을 관통하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 작품들에게 마치 부제처럼 선물한 것이다.

김애란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제목에 나오는 바깥이란 말 그대로 자신의 외부 - 나와 타인, 나와 세상의 간극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였다고 말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의 세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느끼는 온도 차와 시차 때문에 생기는 이야기들을 담은 책이 바로 <바깥은 여름>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소설의 주인공들은 모두 어떤 의미로의 상실과 결핍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들은 그 상실의 순간, 혹은 상실의 자리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 할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몰라 한다.

◇세밀한 문장

첫 번째 소설 '입동'에서는 50개월을 막 넘긴 아들 영우를 잃은 젊은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내 경우, 책을 읽어주는 팟캐스트를 통해 아나운서의 목소리로 이 소설을 처음 접했다. 문자가 아니라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문장이었지만 김애란 작가 특유의 그림을 그려놓은 듯 세밀한 문장력은 눈을 감고도 아이의 싱그러운 모습을 데려다 놓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큰 대출금으로 마련한 집, 그렇게 부유하는 인생에서 벗어나 어딘가에 정착을 한 것만 같은 작은 안도감과 행복감에 젖을 무렵, 아이는 후진하는 어린이집 자동차에 치여 그 자리에서 숨진다. 그렇게 아이를 잃은 슬픔만으로도 버거운 날들임에도 바깥에서는 또 다른 결의 고통이 존재한다. 이웃이라고 믿었던 이들, 세상의 눈은 그들을 향해 반쯤은 동정 어리고 반쯤은 궁금증에 찬 시선을 보내다 계절이 바뀌고 시간이 흐르자 그 눈은 이젠 그만하면 되었다는,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이라도 될 것처럼 피하고 수군거리는 시선으로 꽃매를 때린다.

 

여기 이사 오고 참 좋았는데, 당신도 그랬어?

어.

우리가 살아본 데 중에 제일 좋았잖아. 그렇지?

그랬다.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다. 어딘가 가까스로 도착한 느낌. 중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바깥으로 튕겨진 것도 아니라는 거대한 안도가 밀려왔었다. 우리 분수에 이 정도면 멀리 온 거라고, 욕심 부리지 말고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영우가 떠난 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진 이집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절벽처럼 가파른 이 벽 아래였나 하는. 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 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입동' 중에서)

 

◇불확실성

7편의 단편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떤 사건, 혹은 경험으로 인해 일상을 일상으로서 살아내지 못한다. 무엇인가를 상실해 버린 뒤에 남겨진 일상은 그 존재만으로도 아픔이 되기 때문이다. '입동'의 젊은 부부 역시 아들 영우가 사라진 자리에서 마치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어딘가에 갇혀 멈춰버린 것이다.

두 번째 소설인 '노찬성과 에반' 역시 병에 걸린 강아지, 유일한 친구이며 가족의 역할을 해주었던 강아지를 잃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이 경우에는 본인이 느끼는 감정이 어떤 종류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무엇으로 이름 불러야 할지조차 몰라 하염없이 걷는 것밖에 할 수 없다.

'노찬성과 에반',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입동'과 같이 물리적으로 존재하던 것들의 상실을 비롯해 '건너편' 혹은 '풍경의 쓸모', '침묵의 미래', '가리는 손'에서는 관계, 믿음, 생각의 상실을 다루고 있다. "'이해'는 품이 드는 일이라, 자리에 누울 땐 벗는 모자처럼 피곤하면 제일 먼저 집어던지게 되어 있다"는 작가의 말처럼 계절을 지나 보내지 못하는 누군가와 온도를 맞추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가 쉽게 벗어던진 이해는 누군가에겐 상처로, 누군가에겐 영원한 상실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그렇게 조금은 무심하고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로 인해 누군가는 계절이 가는 줄도 모르고, 가을에서 겨울로, 다시 겨울에서 겨울로 부유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바깥은 화창하고 녹음이 짙어지는 열기가 가득한 여름이지만 여전히 그 상실의 문을 열지 못하고 갇혀버린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 소설들을 읽다 보면 떠올리고 싶지 않지만 잊지 말아야 하는 어떤 사건들을 떠올리게 된다. 작가는 그저 조용히 우리를 데려와 그들과 마주 서게 한다. 우리 곁에 있었으나 어느 순간 다른 공간, 바깥에서 눈보라를 맞는 누군가를. 그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우리 역시 언제든 바깥으로 나가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 살아간다는 것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언제든 우리에게도 일상이 비일상이 될 수 있고 확실한 것은 우리에게 확실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새삼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소설 속 주인공들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서있는 것만 같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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