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현 이론가로도 큰 발자국
김차열 실업야구 진기록들 작성
이호헌 투박한 해설로 명성
이효헌·임정면 전국대회 두각

한국 야구계 두 거장

마산야구 역사는 곧 사람의 역사이기도 하다.

안확 선생이 극일 수단으로 야구를 들여왔고 김성두·이경구·박상권 등이 그 맥을 이어왔듯 말이다. 그 사이사이 수많은 선수가 제자리에서, 타석에서, 마운드에서 마산야구를 빛냈다.

1970년에도 마산야구의 '사람 맥'은 계속됐다. 프로야구 출범을 앞둔 시대, 실업·고교야구를 누빈 이들은 꿋꿋이 마산야구 줄기를 지켰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계현(마산상고 16회·현 마산용마고)이다. 1940년대 마산군 선수(유격수)이자 마산중(현 마산고) 야구부 초대 감독으로, 1950년대 '제1회 아시아선수권대회' 한국대표이자 금융조합·남선전기 선수로 활약했던 김계현은 1962년 한국전력 창단 감독을 맡아 본격적인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김계현 감독은 1970년·1971년 '백호기쟁탈 전국 군·실업야구 쟁패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등 한국전력에서만 18년간 감독 생활을 하며 수많은 우승을 거뒀다.

김 감독 지도력은 국가대표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는 제10회·11회 '아시아선수권대회' 때 대표팀 감독을 맡았는데, 1973년 10회 대회 때는 준우승을, 1975년 11회 대회 때는 한국을 사상 세 번째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 성과로 김 감독은 체육훈장 거상장(3급)을 받기도 했다.

김 감독은 지도자뿐 아니라 야구 이론가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일본·미국 야구이론 서적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는가 하면 국내야구 체계를 다듬기도 했다. 1974년 장태영·허종만·이호헌 등과 가칭 한국직업야구 추진위원회를 만들기도 했다. 끝내 그 뜻은 이루지 못했지만 이때의 성과는 훗날 프로야구 출범 밑바탕이 됐다.

김 감독은 1979년 55세 나이로 타계했다. 위암으로 1년간 투병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등진 것인데, 일본식 야구용어를 한국식으로 고친 책 발간을 준비 중이었다고 하니, 마지막 순간까지 야구 발전에 몸을 바친 그였다.

이호헌(마산상고 24회)도 빼놓을 수 없다. 1949년 부산에서 열린 '제1회 쌍룡기 쟁탈 고교야구대회'에서 선수 대표로 선서를 하기도 했던 이호헌은 1970년대 고교-프로야구 시대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한국식 기록법' 창시자이기도 한 이호헌은 이 시기 경상도 말씨에 해박한 야구 지식을 더한 야구 중계로 시청자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호헌 해설은 '직설적'인 것으로 유명했다. 한 예로 '이 상황에서는 반드시 번트를 대야 한다'는 등 절대적인 말로 감독들을 긴장하게 했다.

1981년 프로야구 창립 계획안을 작성해 뼈대를 설계하기도 했던 이호헌은 1982년부터 KBO 사무차장으로 4년간 재직하는 등 일평생 야구 행정가 길을 걸어오다 지난 2012년 81세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1973년 제일은행 소속 김차열 활약상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 1973년 제일은행 소속 김차열 활약상을 다룬 <동아일보> 기사.

경기장 안 스타

김계현·이호헌이 지도력과 해박한 야구 지식으로 마산야구 명예를 드높였다면, 경기장 안에서는 김차열·김용일·이효헌·임정면 등이 빛났다.

1964년 마산상고 전국체육대회 우승을 이끌기도 했던 김차열은 1970년대 제일은행 소속으로 실업야구 중흥기를 이끌었다. 1971년 '제5회 청룡야구상'에서 우익수 부문 최우수선수에 뽑히고, 금융·실업야구 베스트9에도 이름을 올린 건 시작에 불과하다. 김차열은 1973년·1975년 '김계현호'에 승선해 아시아선수권대회 준우승·우승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소속 팀에서도 활약은 이어졌다. 김차열은 1973년 23회 '백호기쟁탈 군·실업쟁패전'에서 제일은행 우승을 이끌며 최우수선수상, 타점·홈런·타격상을 휩쓸었고, 1974년에는 24게임 연속 안타, 1이닝 3도루를 선보이며 '호타준족' 면모를 뽐냈다.

김차열은 1977년 같은 팀 이종도·김우열·김태석과 힘을 합쳐 실업야구 '4타자 연속 홈런' '게임당 최다 홈런' '한 이닝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하기도 했다. '야구 천재, 타격 천재'라는 별명처럼 1970년대 실업야구를 풍미하며 17년간 코치 겸 선수로 현역 생활을 해온 김차열은 1981년 은퇴를 선언한다. 1965년부터 1981년 7월까지 김차열이 소화한 경기는 약 610경기. 은퇴 후 곧장 미국으로 떠났던 김차열은 2년 뒤 동아대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며 야구와 인연을 이어간다.

김차열이 실업야구를 주름잡던 그때 마산 고교야구에서도 좋은 선수가 연이어 나온다. 시작은 김덕렬. 김차열 동생이기도 한 김덕렬은 1970년대 초 마산상고 투수로 뛰며 마산 고교야구 위상 재정립을 이끌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김덕렬을 일컬어 '국내 어느 투수도 따라갈 수 없는 강한 어깨를 가지고 위력적인 속구를 퍼붓는 투수'라고 평가하기도. 1972년 마산상고 황금사자기 4강을 이끌기도 했던 김덕렬은 1973년 졸업 후 곧바로 제일은행에 들어가 실업야구 부흥에 힘을 실었다.

1972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김덕렬보다 빛난 선수도 있었다. 그해 대회에서 우익수 김용일이 미기상(훌륭한 플레이를 한 선수에게 주는 상)을 수상한 것인데,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기도 했던 김용일은 윤군필·김지곤과 클린업트리오를 형성하며 상대를 떨게 했다.

1970년대 중·후반에는 마산상고 이효헌·임정면이 두각을 나타냈다.

1973년 후보로 전국대회 무대를 밟은 이효헌은 1975년 만개한다. 그해 이효헌은 팀을 청룡기대회 4강으로 이끄는 등 전국 규모 3개 대회에서 33타수 11안타 타율 0.333를 기록했다. 이 성적으로 이효헌은 연말 '제18회 이영민 타격상(고교 야구에서 타격 종합 1위를 차지한 선수에게 매해 주는 상)'을 받으며 마산야구를 빛냈다. 이후 이효헌은 경희대로 진학해 야구를 이어갔다.

이영민 타격상 영광은 이듬해 임정면이 이어받는다. 1976년 '황금사자기 대회'에서 팀을 4강에 올리며 타격상(14타수 9안타)·미기상을 동시에 안았던 임정면은 그해 제19회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로도 선정된다. 1979년 임정면이 뽐낸 최종 기록은 29타수 13안타 타율 0.448. 임정면은 고교 졸업 후 건국대-농협을 거쳐 프로야구 해태에 입단했고, 1986년 말 빙그레로 팀을 옮겼다가 1988년 은퇴한다.

▲ 집에서도 야구 삼매경에 빠진다는 야구해설가 이호헌 씨를 조명한 1977년 <경향신문> 기사.
▲ 집에서도 야구 삼매경에 빠진다는 야구해설가 이호헌 씨를 조명한 1977년 <경향신문> 기사.

프로야구를 향해

프로야구에 굵은 발자취를 남긴 이들도 1970년대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야신' 김성근 감독도 그중 하나다. 실업리그 명투수 출신인 김성근 감독은 1969년 마산상고에서 지도자 첫발을 내딛는다. 물론 마산상고와의 인연은 1년여밖에 지속하지 않았지만, 혹독한 훈련으로 이름난 김 감독 지도 철학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69년 10월 황금사자기 대회를 앞두고 나온 <동아일보> 기사다.

'15년에 이르는 화려한 전통을 이어가고자, 낙후된 경남야구를 중흥시키고자 분연히 일어선 마산상고. 여기에 자진해 감독을 맡은 지난날 명투수 김성근 씨의 야심이 플러스 되어 그 결실이 이번 대회에서 거두어지지 않을까 예측되고 있다. 김성근 감독의 지나치리만큼 혹독한 훈련으로 선수들이 그라운드에 쓰러지기 수십 번, 그 결과가 자못 궁금하다. 주영철·허만정 피칭스탭의 위력적인 모습, 맹훈련으로 다져진 내야수비는 일품이다. 게다가 주영철을 중심으로 한 클린업 트리오의 쾌타가 있어 더욱 믿음직하다고 김 감독은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듬해 김 감독이 기업은행 투수 코치직을 제안받고 떠나면서 마산상고 야구는 고초를 겪는다. 그나마 성적이 좋았던 1970년 전국체전 역시 마산상고는 준결승에서 대전고에 4-5로 패하며 눈물을 삼킨다.

1970년 시즌이 끝나자마자 기업은행 투수 코치에서 감독으로 승격한 김성근 감독은 이후 충암고, 신일고,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고양 원더스, 한화 이글스 등을 거치며 한국야구를 대표하는 명지도자 반열에 오른다.

이 밖에 롯데 레전드 고 유두열과 1978년 '제7회 한·일 고교대회'에서 한국 우승에 기여한 한문연 NC다이노스 D팀 코치, 박영태 전 한화이글스 코치 등도 1970년대 얼굴을 알린다. 고교야구를 거쳐 각각 실업·대학야구에서 활약을 이어간 이들은 프로야구 출범 이후 나란히 롯데에 입단하며 마산야구 위상을 높였다.

특히 유두열은 김계현 감독과 함께 실업야구 한국전력 우승을 이끌기도. 이들과 관련한 자세한 이야기를 1980년대 야구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 1971년 군·실업쟁패전에 앞서 각오를 밝히는 김계현 감독과 이를 다룬 1971년 <경향신문> 기사.
▲ 1971년 군·실업쟁패전에 앞서 각오를 밝히는 김계현 감독과 이를 다룬 1971년 <경향신문> 기사.

<참고 문헌> △<한국 야구사 연표>, 홍순일 편저, KBO·대한야구협회, 2013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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