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지·종교적 신념 무장한 두 청년 올림픽 도전 실화
'미제레레'등 수록곡 아마추어 정신 되새겨

흔히들 스포츠를 두고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표현을 쓴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들에게는 고마운 일이다. 그저 있었던 사실들을 묘사하고 약간의 각색만 이루어진다면 멋진 영화 한 편의 각본이 탄생하니 말이다.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재료를 잘 못 고른 듯하다. 드라마틱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드라마틱하여 어떠한 영상과 각색으로도 그때의 감동을 다 담아낼 수 없기에 그렇다. 2004년 거리에서 홀린 듯 발이 묶여 경기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다 결국 뜨거워진 눈가를 훔치며 발길을 옮겼던 기억이 생생하다. 다음날 동료의 말에 나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남자 축구대표팀 반성해야 해!' 인기 스포츠에 밀려 초라한 관심만을 등에 지고 경기장에 오른 그녀들의 투혼은 감동을 선사하기에 충분했다.

주제곡 '버터플라이(Butterfly)'가 힘찼던 영화 <국가대표> 역시 소외된 이들이 스키점프라는 낯선 종목을 통해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너무도 멋지게 보여준 수작이다. 이처럼 한계와 벽을 뛰어넘는 순간의 환희는 우리 모두의 주먹을 불끈 쥐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최고와 최선

영국의 한 해변, 모래사장을 힘차게 내달리는 건장한 남성들이 있다. 그 무리엔 에이브라함과 리델이 있고 그들의 표정은 희망에 찬 듯 밝다. 에이브라함은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조상과 같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유대인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 싹튼 강한 민족주의의 영향인 듯 평생 차별과 편견을 업고 살아 온다. 이에 진정한 영국인으로 대접받길 원하던 그는 노력 끝에 최고의 명문 옥스퍼드에 입학하게 되고 모든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특히 달리기에 재능이 있던 그는 누군가가 앞서 뛰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완벽주의자이다.

'에릭 리델', 그는 미식축구 선수였던 과거를 뒤로하고 현재 여동생과 함께 선교활동에 집중하고 있지만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빠른 남자임에 틀림없다. 이에 동생의 반대에도 불구 달리기에 열중하고 그때의 그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하다. 에이브라함과 리델, 단 한 번 치러진 이 두 건각의 대결은 리델의 승리로 끝이 나고 에이브라함은 충격에 빠진다. 언제나 승리에 목마른 에이브라함, 신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사명감의 리델, 이제 이 둘은 1924년 파리 올림픽의 육상국가대표로 함께 100m 달리기에 출전하게 되어 또 한번의 대결이 성사되지만 독실한 신자 리델은 안식일인 일요일에 경기가 있음을 알고 출전포기를 선언한다. 과거 축구를 하던 소년에게 안식일을 지킬 것을 얘기했던 기억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당황스러운 영국 대표단, 그 속엔 장차 영국의 왕이 될 왕자도 포함되어 있다. 리델에게 국가를 위하여 희생할 것을 요구해 보지만 국가보다 신이 먼저라는 그의 신념에는 변함이 없고 이때 장애물 경기에서 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400m 경기를 양보함으로써 극적인 경기참가가 결정된다. 이제 100m 스프린터 앞에 선 에이브라함, 프로의 지도를 받을 수 없다는 교칙마저 무시하며 최고가 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온 그는 미국의 강력한 우승후보 둘을 뒤에 두고 먼저 결승테이프를 끊는다. 그리고 400m에 출전하는 리델, 빠른 발을 주신 신을 위해 달리는 그는 과연 단거리 선수라는 약점을 넘어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을까? 사랑하는 동생과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힘차게 출발선을 박차고 나간 그의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의 것이다.

▲ 제8회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육상선수 해럴드 에이브라함과 에릭 리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불의 전차> 한 장면. /스틸컷
▲ 제8회 파리 올림픽에 출전한 육상선수 해럴드 에이브라함과 에릭 리델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 <불의 전차> 한 장면. /스틸컷

◇미제레레와 불의 전차 테마곡

전쟁으로 희생된 선배들을 추모하는 교장의 연설로 시작된 옥스퍼드 학생으로서의 생활, 다양한 서클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곳에서 함께 노래하기는 기본인 듯하다. 친구들 몇은 합창단 활동에 참여하고 에이브라함의 관심은 오직 달리기.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가 되겠다는 포부를 룸메이트에게 말하는 장면, 학교성당인 듯한 그곳엔 어린이합창단의 연습이 한창이며 지상의 것이 아닌 선율인 듯 경이롭다. 바로 이탈리아의 작곡가 '그레고리오 알레그리(Allegri)'의 '미제레레(Miserere): 불쌍히 여기소서'. 다소 생소한 작곡가라 여겨질 알레그리는 1582년생으로 1685년생인 바흐보다 100년 이상 앞서 태어나 1629년 이후 교황청 합창단에 뽑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곳에서 다수의 종교곡과 작품을 남긴 작곡가다. 하지만 그의 대표 곡은 바로 영화에 사용된 '미제레레', '영혼을 맑게 해주는 음악', '사람의 입으로 내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 '신비로움의 극치'라는 말들로 극찬을 받는 작품이다.

이 곡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음악 자체로도 환상적이지만 더욱 유명해진 이유는 교황청이 이 곡의 유출을 봉인했다는 것이다. 곡이 너무나 성스럽고 아름다워 당시 권위적이던 교황청은 이 음악의 악보가 외부에 공개되거나 교황이 거주하는 시스티나 성당 외 다른 곳에서의 연주를 엄격히 금지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강력한 봉인이 한 천재에 의해 풀리고 만다. 그 음악의 천재는 바로 우리가 잘 아는 '모차르트'. 1770년 14세의 나이로 시스티나 성당을 찾은 그는 10분이 넘어가는 이 곡을 처음으로 듣는다. 단번에 곡에 매료된 모차르트는 숙소로 돌아와 단지 기억에만 의존해 9성부에 이르는 이 곡을 악보에 구현해 놓는 것이다. 100년을 훨씬 넘도록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던 곡이 어린 신동으로 인해 이렇게 빛을 보게 되니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에피소드라 하겠다. 하지만 '미제레레'는 곡 자체만으로 이런 일화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도록 신비롭다. 하니 시간여행을 떠나 수세기 전의 한 고요한 성당에 앉은 듯한 신비로운 체험을 하고 싶다면 한번 들어보시길 권한다.

그리고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음악이 이 영화에 있다. 바로 영화 음악 작곡가 '반젤리스'가 만들어낸 고양감 최고의 주제곡. 영화가 시작되고 해변을 달리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조용히 울리는 이 곡은 아직도 올림픽의 명 장면이나 인간승리의 순간과 함께 하는 음악으로 자주 사용된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웅장한 팡파르가 아닌 조용한 피아노 선율만으로 환희의 순간을 이토록 멋지게 담아내니 놀랍다. 이런 심장 두근거리는 선율을 창조하는데 있어 반젤리스의 능력은 탁월하며 그의 작품 중 영화 <1492 콜럼버스>와 <블레이드 러너>의 주제곡도 유명하다.

◇아마추어와 프로

1988년 올림픽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로 달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참가만으로도 의의가 있다'였던 것 같다. 투기 종목 외에 이렇다 기대할 만한 종목이 없던 시기 개최국으로서 전 종목 출전의 기회를 얻었으니 아마도 참가에 의의를 둬야 했던 많은 선수들이 있었을 것이다. 프로의 참가는 엄격히 금지되었던 올림픽. 이제 그 올림픽도 프로의 진입이 허용되었고 세상의 모든 스포츠는 비즈니스로 변한 듯하다. 순수한 아마추어의 제전은 이제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

국내 아마추어 합창대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아마추어 대회니 즐겨보자는 생각으로 후배들을 모아 미숙한 노래로 그들과 함께하려 했다. 축제인줄 알았다. 하지만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어려운 곡일수록 수상의 확률이 높기에 아마추어가 도전하기엔 버거운 곡들이 난무했고 무엇보다도 참여 합창단의 수가 적으며 거의 이들에 의해 국내 모든 아마추어 대회들이 치러진단다. 순수한 아마추어들이 설 무대가 사라진 것인가? 문득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중 한 구절이 떠오른다. 순수함을 잃은 친구에 대한 안타까운 충고다."너 어쩌다 프로 따위가 돼버렸냐?"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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