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가 몰라보게 자랐다 동생 머리를 감겨주더니 누군가 좋다고 표현한다
커피 열매 맛이 다양하듯 감정 느낄 기회는 열려있다 서우를 응원하는 까닭이다
서우가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생긴 모양이다. 이름이 서준이라고 했던가. 그 친구 이야기를 하며 배시시 웃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했다. 왜 결혼하고 싶냐고 물어보니, 서준이가 계속 자기 옆에 앉으려고 하고, 무엇보다 단짝 친구가 좋아해서 좋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랑에 관여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서준이가 결혼해서 아이패드만 보면 어쩌냐고 물어봐도, 그것을 못 가지고 오게 하면 된다고 한다. 그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친구의 친구를 사랑하다니.
참 많이 컸다. 친구와 놀게 되면, 헤어지는 것이 너무 어렵다. 결국 나의 참을성은 금방 바닥이 난다. 그녀의 의지는 나를 쉽게 제압한다. 아빠가 밉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잔소리를 해야지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친구가 인생에서 제법 중요해진 첫째는 내년에 벌써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목욕
그녀가 성장하게 되어서 수월해진 점도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목욕 시간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안아서 머리를 감겨줘야 했다. 조심하지 않으면 눈이 따갑다고 잔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서서 머리를 감겨 줄 수도 있다. 어제는 그녀가 처음으로 동생의 머리에 샴푸질을 하고, 헹궈줬다. 투덕거림이 있었지만, 결국 둘은 어느 정도 해냈다. 기특해서 칭찬을 여러 번 했다.
내가 욕실에 있는 동안 아내는 마른빨래를 정리한다. 내일, 온이의 어린이집에 보내야 할 것을 챙기고, 두 딸의 원복을 준비한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딸 둘을 씻긴다. 한 명씩 밖으로 내보내면, 아내는 정성껏 말리고 잠옷으로 갈아입힌다.
다들 비슷하게 살아가겠지만, 퇴근 후의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간다. 말끔하게 다 씻겨도 두 딸은 간식을 요구하는 날이 많으므로, 정신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추가된다. 내일 출근을 해야 하니까, 가끔은 조급증이 생기기도 한다. 그래도 아내는 딸들에게 책을 읽혀주고, 나도 글을 몇 줄 읽는다. 그렇게 다음날을 맞이한다.
◇블랜딩
그렇게 맞이한 어느 날, 준규가 카페에 왔다. 몇 년 만에 본 녀석은 능글맞게 인사를 하더니, 대뜸 내가 살이 많이 빠졌다고 말했다. 나는 어색한 말투로,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뭐라고 부연하고 싶었지만, 말문이 막혔다.
그를 보내고 생각해 보니, 그렇게 고된 삶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았다. 내 삶에서 몸매가 중요한 우위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말로 풀어내기가 어려웠다. 그것이 애씀의 증거인 것 같기도 하고. 하여튼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다 보니, 외형보다 중요한 것들이 너무 많이 늘었다.
결혼을 하게 되면 많은 변수가 생긴다. 아내의 아빠, 엄마, 언니가 나의 인생에 중요한 등장인물이 되었다. 종종 만나서 식사를 하고, 처형의 식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장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시시때때로 그들의 서사와 나의 서사가 만난다. 살아온 물길이 다르다 보니, 품고 있는 이야기도 다르다. 해서, 합류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하천과 하천이 만나는 곳에 하중도가 생기는 것과 같다. 몇 가지 원두가 블랜딩되어 전혀 새로운 맛이 나는 것과 같다. 나는 어느덧 조금씩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간다.
그러고 보면, 나도 한때는 남성 중심의 문화에 물들었던 사람이다. 군대 조직을 경험해서 그런 것 같다. 남자는 듬직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꾸준히 운동하고 외형적인 남자다움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결국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사회가 인정하는 신랑감이 되고 싶었다. 정년이 보장된 직장을 잡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다. 그러나, 아내를 만나고 두 딸을 키우면서 그것이 단지 하나의 물길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존재에 대한 예의
세상에는 양분할 수 없는 수많은 존재와 길들이 있기 때문이다. 커피만 하더라도, 고소한 맛이 중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커피 체리는 붉은색이다. 과육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그들은 오렌지처럼 상큼한 맛도 있고, 꿀처럼 달콤한 맛도 있다. 그것의 층위도 미각과 후각과 보디감을 통해서 수십 가지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맛의 가능성은 깊고 넓다. 그런 생두의 서사를 무시하고 강하게 볶기만 하는 것은 존재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결혼이 요즘처럼 어려운 세상은 없었던 것 같다. 오로지 사랑하는 여자와 남자의 힘으로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키우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니다. 보장되지 않은 노후와 높은 교육비, 주거비를 제외하더라도, 미디어가 재생산하는 배우자의 이미지는 현실 수준을 훌쩍 넘는 것들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역설적으로 부모 세대의 노고 덕이다. 든든한 방파제가 있어서 주제넘게 많은 것을 보고 배워버렸다. 그래서 그럴까, 오지 않은 미래가 생생하게 느껴진다. 조금씩 다른 크기의 두려움이 모두의 마음속에 돋아나고 말았다. 포기해야 할 것들을 오기 전에 결정해버리는 경우가 많다. 세상을 알아갈수록, 이성이 예리해질수록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나 정도의 인간이 자식을 낳아 그들에게 어떤 가능성을 제공할 수 있을까에 대한 걱정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막상 낳고 보니 살게 된다. 걱정도 팔자라는 옛말이 틀리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는 그저 분주하게 대출을 갚는다. 비유가 아니라 직설적으로 그렇다. 하루의 숙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데, 서우는 그럴듯한 이야기를 지어서 나에게 희망을 들려준다. 온이는 어디서 이상한 노래를 배워서 웃음을 준다. 올챙이 같았던 녀석들이 어느새 팔짝팔짝 뛰어오른다. 아내와 내가 만든 작은 연못가에서 기꺼이 놀고, 심지어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규정한 울타리가 진리가 아닌 것처럼, 세상이 선호하는 것도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날것에 가까운 딸에게서 내가 생각해보지 못했던 길이 문득 보인다. 그래서 두 딸과 함께하는 시간이 기껍고, 때때로 피곤함에 지쳐 그저 흘려버리면 뒤늦게 후회한다.
◇초콜릿
두 딸에게 별로 해주는 것이 없는데, 서우와 온이는 나와 더 오래 놀지 못한다고 아쉬워한다. 서둘러 잠을 청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매일 설명을 해준다. 잠을 자야 아빠가 힘을 내서 돈을 벌고, 돈을 벌어야 초콜릿을 사주지, 라고 말한다. 그때, 서우의 답이 귀엽다. 아빠, 나는 초콜릿 빨아먹으면 되니까, 하나만 사주면 되는데라고 말한다. 그리고 말똥말똥 쳐다본다.
나는 함께해 준 아내에게 증거되는 삶을 살고 싶지만, 그것이 꿈같은 일임을 안다. 또, 두 딸의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돈을 벌어야 할 것 같지만, 그것 역시 꿈같은 일이다. 그래도 꿈이라는 게 생겨버렸으니, 몸은 더욱 바빠지게 마련이다. 내 몸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저, 함께할 순간을 포기하지 않도록 지혜라는 것에 가까이 가고 싶다.
딸은 가족의 시간 안에서 부지런히 자란다. 그만큼 작은 여유도 조금씩 생겨난다. 그것이 보이는지, 집안 어르신들이 아들 한 명 더 낳으라고 쿡쿡 찌른다. 그러면 나는 진지하게 눈을 바라보며, 딸을 키우다 보니 여아를 선호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서우야, 그래도 친구의 친구는 안된다고 말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저 내가 차가운 물과 뜨거운 물을 섞어 적당한 수온을 맞춰줄 수 있을 때 적절한 경험을 했으면 한다. 그리고 여럿 가운데 특별한 것을 좋아했으면 한다. 특별한 것이면 충분하다. 나중에, 누군가가 무엇을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나는 무엇을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으면 한다. 그것으로 족하다. 단, 나쁜 것을 피했으면. 하지만, 그것도 과욕이겠지. 도리어 딸이 사랑하는 것들을 온전히 선호하려 애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