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갈등에 개입하는 어른들
괜찮으니 지켜보는 게 어떨까요

쿵쿵 뛰어도 되고, 마음대로 소리를 질러도 눈치 보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자 아이들의 성지, 놀이터. 양육자 처지에서는 온종일 TV 시청을 주장하는 아이들과의 실랑이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장점까지 있으니 즐겨 찾게 된다.

벤치에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서 어린이들이 신나게 노는 모습을 지켜보면 더운 날씨지만 바깥놀이를 나오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동안 함께 온 어른들은 주변을 서성인다. 우리는 굳이 서로 말을 섞지 않아도 공통의 바람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평화롭게 놀기를 원한다는 것. 어느 아이 하나 섭섭하지 않게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모이면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고, 놀이터도 예외는 아니다. 평화는 종종 깨진다. 한정적인 시설을 두고 벌어지는 실랑이가 대표적이다. 차례를 지켜 모두가 고루 타면 좋겠지만 고집이 센 아이가 있고, 늘 양보하는 아이가 있다. 갈등은 여기저기서 터진다. 그래서 놀이터에선 웃음소리만큼 울음소리도 자주 들린다.

아이들끼리 충돌은 아이들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종종 어른의 문제로 번진다. 대개의 양육자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크게 다칠 위험을 방지한다는 차원으로 나설 때도 있지만, 아주 작은 마찰에도 침묵하지 않는다.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고, 규칙을 정해준다. 삐죽 튀어나왔던 갈등은 어른들의 손에서 금방 사라진다. 실랑이가 생기자마자 등장한 어른 앞에서 갈등을 일으킨 아이들은 당사자가 되지 못한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상대의 견해를 듣는 대신 '어른' 돌봄자의 뜻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다. 아예 갈등을 방지하는 것. 그것이 대부분 요즘 양육자들이 아이들을 돌보는 방식이다.

이슥한 밤까지 신나게 '진놀이'를 했던 유년기를 생각하면 사는 게 바빴던 어른들에게 고마울 때가 있다. 어떤 통제나 간섭 없이 실컷 놀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담을 넘고 발목을 삐면서 위험성을 인지하고, 놀이의 즐거움을 온전히 느꼈다. 놀다가 생긴 문제는 느리긴 해도 우리의 답을 찾으면서. 놀 때만큼이라도 아이의 자율성을 존중하고 싶다. 작은 다툼이나 갈등 정도는 적어도 그들끼리 해결하도록 지켜보는 과정을 밟고 싶다. 하지만 그것은 생각에 그칠 때가 많다. 서로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불편해지지 않기 위해서 하는 노력에다가 "괜찮으니 그냥 지켜보는 게 어떨까요?"라고 편하게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도 아이들은 온몸으로 사는 법을 배워가는 모양이다. 놀이터에서 얼마나 철봉에 오래 매달릴 수 있는지 체력의 한계를 시험하고, 전혀 몰랐던 친구를 사귀면서 사회성을 키워간다. 공공장소에서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아이들은 몸으로 깨쳐가지만, 그것은 어른들의 끝없는 간섭과 감시 속에서 가능하다.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는 말은 완전히 옛말이 되었다. 싸우면 큰일 난다. 과연 우리가 전 세대보다 폭력에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게 된 것일까. 아니면 '맘충'과 '노키즈존'사태로 남에게 조금의 피해도 줘선 안 된다는 양육자들의 자기 검열이 심해진 걸까. 나는 후자 편에 선다. 개인으로 파편화된 사회에서 안전해지는 법은 타인과 거리를 유지하고 스스로 방어막을 세우는 것이다.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기', '폐를 끼치지 않는 아이로 키우기'는 요즘 양육자들의 지침이 되어간다. 사회에서 허락한 '아이들의 소란'이 어느 정도인지, 서로가 허용한 '갈등'이 얼마나 작은지 대낮의 놀이터에서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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