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모든 신은 하나다/우리는 오직, 사랑하는 일만 남았다"

제일 마지막 시로 시작을 삼는다. '오늘부터'가 제목이지만 제목과 시를 함께 읽어야 할 것 같다. 이걸 읽고 누군가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면 할 일은 다한 것이리라.

합천 황매산 기슭에서 농사를 짓는 서정홍 시인의 새 시집 <쉬엄쉬엄 가도 괜찮아요>(단비, 2019년 3월). 청소년을 위해 엮은 시들이나 사실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되겠다.

시인은 배부르고 편안한 날보다 고달프고 쓸쓸한 날에 시가 찾아온다고 했다. 그러니 그에게 시는 어쩌면 반성의 언어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향한 위로이거나 다짐이겠다.

"천천히 생각해요/ 길이 잘 보일 수 있게 // 천천히 말해요/ 실수를 줄일 수 있게// 천천히 결정해요/ 후회하지 않게// 천천히 걸어요/ 함께 갈 수 있게" ('천천히' 전문)

"들꽃도 함께 피어야 아름답고/ 새들도 함께 날아야 멀리 날 수 있지/ 사람도 함께해야 모든 일이 잘 풀려/ 혼자 끙끙 앓고 있으면 앞이 보이지 않아/ 어떤 일을 하다 앞이 보이지 않으면/ 여럿이 둥글게 앉아 보는 거야/ 둥글게 앉아 서로 생각을 나누다 보면/ 큰 고민거리도 작아질 테니까/ 세상 보는 눈이 깊어질 테니까/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누구나 기죽지 않고 살 수 있을 테니까" ('여럿이 함께' 전문)

▲ 〈쉬엄쉬엄 가도 괜찮아요〉서정홍 지음.
▲ 〈쉬엄쉬엄 가도 괜찮아요〉서정홍 지음.

시인 위로를 '밥'이라고 표현했다.

"시는 곧 밥입니다. 제가 차린 밥상 위에는 빛깔 좋은 오곡밥도 있고, 구수한 현미밥도 있고, 하얀 쌀밥도 있습니다. 가끔 고두밥이 나오더라도 제 부족함이라 여기시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드시면 고맙겠습니다." ('시인의 말' 중에서)

밥은 지저귀는 새들이, 지나가는 바람이, 촉촉이 젖어드는 봄비가 가져다준다. 때로 번뜩이는 섬광처럼 다가오는 것도 있다. 밥은 때로 주변 사람들의 어깨를 토닥이는 손길이기도 하다.

"어느 날, 여기저기/ 부러지고 찢어진 상처가 덧나/ 한평생 무리한 운동은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서야 꿈을 포기했다는 선우 (중략) 지리산 할아버지 농장에 가서/ 야구보다 '내'가 더 소중하다는 걸 깨닫고/ 삶을 가꾸듯이 약초를 심고 가꾼다는 선우" ('새털처럼 가벼운 - 고2 김선우' 중에서)

그리하여 시인의 밥은, 그것을 먹은 사람들의 든든한 희망이나 용기로 소화된다.

"형, 택배로 보내 주신 김치/ 잘 받았습니다/ 잘 먹을게요/ 김치만 있으면 든든하지요/ 먹는 일보다 거룩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고맙습니다/ 형, 저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가끔 몸이 아프고 어려운 일이 생겨야/ 생각과 삶도 깊어지겠지요/ 어서 빨리 일어나서/ 밥상에 꼭 필요한 김치처럼 살게요." ('저녁 무렵- 허리를 다쳐 몇 달째 누워 있는 상록이 아우가 보낸 문자' 전문)

마지막 시를 읽고 탁, 하고 시집을 덮는다. 아, 한 끼 잘 먹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