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임금 집무실을 3년간 빈전으로 사용
별도공간 필요성 대두 … 경복궁 중건 때 건립
왕의 장례, 새 왕 정통성·능력 검증하는 중대사

경복궁의 북(北)쪽.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이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근대사의 비극을 품은 역사의 현장이다. 조선전기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은 논외로 하더라도 임진왜란 때 완전히 불타버렸다. 이후 275년이 지난 후 흥선대원군에 의해 복원되었다. 복원 전이나 후나 경복궁의 중심은 당연히 광화문에서 침전인 강녕전을 잇는 공간이다. 수렴청정에서는 벗어났지만 아직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 고종은 이 중심을 버리고 그 북쪽에 자신의 영역을 만들었다.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건청궁이다. 하지만 세상은 만만하지 않아서 건청궁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비극(명성황후시해사건, 아관파천 등)의 현장으로 변했고 고종은 경복궁을 버리고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후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패배는 한자로 敗北이다. 패북이 아니다. 北은 북향을 의미할 때는 북이라고 읽지만 달아날 배라고도 읽는다. 글자 모양을 보면 사람 두 명이 등진 모습이다. 배반하다, 달아나다의 의미였다. 그래서 패배는 그냥 진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진 다음 도망쳐버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방향은 북쪽이라는 말이다. 공교롭게도 고종은 자신이 있어야 할 공간을 버리고 북쪽으로 옮겨갔다. 결과는 참담한 패배였다.

▲ 태원은 하늘을 뜻한다. 태원전은 하늘 같은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라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전면과 출입문을 잇는 회랑이 설치돼 있다. 이 회랑은 빈전의 특징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경복궁 내 태원전 권역 건물 배치도와 태원전 모습들.  /문화재청
▲ 태원은 하늘을 뜻한다. 태원전은 하늘 같은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라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전면과 출입문을 잇는 회랑이 설치돼 있다. 이 회랑은 빈전의 특징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경복궁 내 태원전 권역 건물 배치도와 태원전 모습들. /문화재청

◇죽은 왕의 집 : 빈전(殯殿) = 이 경복궁 북쪽 한구석에 조용한 건물군이 복원되어 있다. 태원전(泰元殿)이다. 태원전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처음 만들었다. 용도는 빈전(殯殿)이었다. 빈(賓)은 손님이고 대접한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 죽을 사(死)변이 붙어 시신을 잘 모시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래서 빈소(殯所)는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까지 모셔놓는 장소가 된다.

왕의 경우는 가장 높은 위계를 가진 건물, 즉 빈전이 된다. 빈전은 분명히 일상적인 공간이 아니다. 비록 넓은 경복궁의 한쪽 구석이지만 장례만을 위한 공간을 별도로 만든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잠시 조선왕조의 장례절차를 살펴보자.

왕이 죽었다. 왕의 장례는 국장(國葬)이다. 그래서 왕이 죽으면 장례를 총괄하는 국장도감, 시신을 관리하는 빈전도감, 무덤을 만드는 산릉도감이 동시에 설치된다. 그리고 5일을 기다린 후 입관을 한다. 조선 왕은 입관 후 능에 모실 때까지 보통 5개월이 걸렸다. 이 기간 산릉도감은 묘지를 만들고 빈전도감은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다. 능에 모시고 나면 궁에 돌아와 혼전(魂殿)을 설치한다. 혼전은 신주를 모시고 3년상을 치르는 공간이다. 3년이 지나면 신주를 땅에 묻고 새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것으로 모든 장례절차가 끝난다. 그러니 빈전, 혼전은 반드시 필요한 공간이었다. 조선 전기에는 왕의 집무공간인 편전을 빈전, 혼전으로 이용했다. 5개월 정도야 어떻게 해보겠지만 3년 동안 집무실을 이용하지 못하는 일은 좀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경복궁을 새로 만들면서 관련 시설들을 별도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종 4년(1867)년 처음 만들어진 태원전은 조선왕조가 멸망할 때까지 약 40년 동안 딱 두 번 빈전으로 사용되고 말았다.

▲ 태원은 하늘을 뜻한다. 태원전은 하늘 같은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라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전면과 출입문을 잇는 회랑이 설치돼 있다. 이 회랑은 빈전의 특징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경복궁 내 태원전 모습.  /문화재청
▲ 태원은 하늘을 뜻한다. 태원전은 하늘 같은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라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전면과 출입문을 잇는 회랑이 설치돼 있다. 이 회랑은 빈전의 특징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경복궁 내 태원전 모습. /문화재청
▲ 태원은 하늘을 뜻한다. 태원전은 하늘 같은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라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전면과 출입문을 잇는 회랑이 설치돼 있다. 이 회랑은 빈전의 특징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경복궁 내 태원전 모습.  /문화재청
▲ 태원은 하늘을 뜻한다. 태원전은 하늘 같은 왕의 시신을 안치하는 곳이라 붙인 이름이다. 건물의 전면과 출입문을 잇는 회랑이 설치돼 있다. 이 회랑은 빈전의 특징으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경복궁 내 태원전 모습. /문화재청

◇새 시대의 시작 : 왕의 죽음 = 패배해서 도망가는 방향이기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경복궁 북쪽을 이야기하면 우울한 이야기들이 가득하다. 건천궁의 비극이 있었고, 죽음의 공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지만 죽음은 하나의 종말을 뜻하지만 종말은 또 다른 세상의 시작을 의미한다. 왕가도 마찬가지다. 왕이 죽었다는 말은 동시에 새 왕에 의한 통치가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다시 왕이 승하한 시기로 가보자. 당시 사람들이 생각한 죽음은 혼이 몸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죽음이 확인되면 내시는 국왕이 평소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 세 번 "상위복(上位復)"이라고 외친다. 왕이시어(上位) 돌아오소서(復)란 의미이다. 이 과정을 떠난 혼을 부르는 초혼(招魂)이라 한다. 이 방향은 역시 북쪽이다. 죽고 난 뒤 혼은 북쪽으로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5일을 기다린 다음 입관하는데 입관 후 왕의 즉위식이 이루어진다. 이제 돌아가신 분은 다시 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닷새 동안 옥새는 왕실의 가장 어른, 통상적으로 대비에게 전달된다. 다행히 적장자가 있으면 자연스레 그에게 왕위가 이어지지만 후사가 없는 경우는 대비의 결정에 따라 다음 왕이 정해진다. 그래서 대원군이 신정왕후 조대비와 새 판을 짤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5일 안에 일어나야만 한다. 그 후에 비로소 새 왕의 시간이 시작된다.

유교적 장례절차에서 새 왕은 선왕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인이다. 죄인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중요한 국정을 비울 수 없으니 자신의 능력을 보이기 위해서는 최고의 예를 갖춰 왕위를 이어받아야만 한다. 그래서 왕의 즉위식은 궁궐의 중심인 정전에서 하지 않는다. 아직 왕도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이다. 즉위식은 궁궐의 중심인 정전의 문 앞에서 한다. 경복궁에서는 근정전으로 들어가는 근정문 앞에서 열게 된다. 문 앞에서 옥새를 받아 왕이 된 다음에 정전으로 이동해서 왕이 되었음을 선포한다. 그리고 왕으로서 처음 해야 하는 국가 대사가 선왕에 대한 장례가 된다. 이 절차를 어긋남이 없이 잘 마무리하는 것이 효의 시작이고 왕의 정통성과 능력을 검증하는 과정이다. 장례는 새로 등극한 왕과 신하들의 시험대이기도 했다.

▲ 태원전 회랑(천랑). 경안문에서 태원전까지 이어지는 지붕이 있는 복도로서 혼백이 지나다니는 길.  /문화재청
▲ 태원전 회랑(천랑). 경안문에서 태원전까지 이어지는 지붕이 있는 복도로서 혼백이 지나다니는 길. /문화재청

◇구질서와 신질서의 충돌 : 조선의 예송논쟁 = 하지만 이렇게 세상이 바뀌는 과정에는 수많은 일이 벌어진다. 구질서에서 신질서로 넘어가는 과정에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도 있고 반드시 상황을 바꿔야 할 세력도 있을 것이다. 매사에 처음 한 수가 중요하듯이 이들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새 왕에게 자신의 입장을 강요한다. 이런 상황은 장례의 절차, 왕이 묻힐 곳을 고르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상복만 해도 다섯 가지가 있다. 그리고 각각 입는 기간도 3년, 1년, 5개월, 3개월의 네 가지가 있었다. 상주가 입을 옷을 고르는 데도 20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각종 절차는 말할 나위도 없었다. 예송논쟁의 시작이다. 가장 치열하고 유명했던 효종대 논쟁을 보자. 효종의 모친상에 아들인 효종이 3년 동안 상복을 입을지 1년만 입어야 하는지 논란이 있었다. 한쪽은 효종이 인조의 둘째이므로 장자만 입을 수 있는 3년복이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른 한쪽은 비록 둘째이긴 하지만 정상적으로 왕위를 계승한 왕이고, 적법한 계승자는 장자와 다름이 없어서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왕이 특별한 존재인지 아니면 그냥 사대부 중 하나인지에 대한 논쟁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이어져 내려온 왕과 신하의 권력다툼이 후기로 오면서 예송논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 다툼은 신하들이 승리해갔다.

왕릉을 봐도 신하들의 권력이 강화되어 가는 모습을 알 수 있다. 서오릉, 동구릉 등을 보자. 한양의 서쪽에 능이 다섯 개, 동쪽에는 아홉 개의 능이 모여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물론 그곳이 천하의 명당이라 어쩔 수 없이 왕릉들이 모여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일단 왕릉으로 지정되면 최소 주변 10리 정도는 다 비워야 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조선왕조 500년이 진행되는 동안 왕은 27명이었지만 사대부는 몇 명이었겠는가? 왕릉으로 쓸 만한 곳이면 이미 신하들이 자신들 집안의 무덤, 혹은 전답 등이 들어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의 땅 인근에 왕릉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한 가장 편한 방법은 이미 능으로 사용하고 있는 공간에 모시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풍수라는 말로 현혹시켰지만 결국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노력인 경우가 많았다. 나라야 어떻게 되던지 자신의 이익만 지키면 되는 기생충 같은 세력들이 점점 힘이 세져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날이 갈수록 변화에 대한 탄력성을 잊어만 갔다. 옛 질서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새 질서가 생겨야 하지만 그러지 못한 사회는 같이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 기획은 LH 한국토지주택공사와 함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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