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한 장마에 축축한 음악 들으며 침잠했다가
불쑥 찾은 햇살에 감정 추슬러 힘을 내어본다

비가 며칠씩 끝도 없이 내린다. 어제와 오늘의 차이는 비가 조금 적게 오거나 조금 많이 오거나 하는 것일 뿐이다. 희뿌연 안개가 산도 나무도 빌딩도 다 잡아 삼켰다. 갑자기 하늘이 찢어졌는지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다가 또 금세 잦아들고 분무기에서 뿜어지는 물처럼 안개비가 계속된다. 그 사이사이 잠깐 흐릿하게 비추는 해는 습습한 공기를 증발시켜 불쾌감을 더한다. 옷도 젖고 신발도 젖고 벽지도 장판도 모든 게 축축하게 젖는다. 장마. 길 '장(長)'에 악마 할 때 '마(魔)'인가? 길쭉한 마귀라는 뜻인가. 비가 오는 날은 저기압이라는데 공기 압력이 낮으면 더 몸이 가벼워야 할 것 같은데 동작 하나하나가 왜 이리 더디고 무겁지. 아, 중력이랑 다른 건가. 혼자 멍청한 질문만 계속 던지다가 보면 그만 화가 나서 비 오는 하늘에다 대고 욕을 한다. 현대인은 이 세상 대부분을 그들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라며 의기양양하지만 1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날씨나 자연재해 앞에서는 동굴에 숨어 벌벌 떠는 신석기인이나 다름이 없이 속수무책일 뿐이다. 나에게 장마철은 재해나 다름이 없을 정도로 힘든 시기이다.

▲ 작년 비구름에 잠긴 창원 진동 앞바다. /김태춘
▲ 작년 비구름에 잠긴 창원 진동 앞바다. /김태춘

◇고립

계절이 바뀜에 따라 생기는 이 오묘한 감정은 대체 무엇일까? 길을 가다가 한 무리의 중학생들에게 둘러싸여 돈과 기타마저 뺏긴 것도 아닌데, SNS에서 내 음악에 대한 험한 댓글을 본 것도 아닌데, 이제는 인연을 끊자며 아버지가 호적에서 나를 파버린 것도 아닌데, 가족, 친구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나에게 등을 돌려버린 듯한 고립감. 이 알 수 없는 무력감과 쓸쓸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익숙한 외로움

채워질 수 있을까

이 공허한 내 마음

 

사람들을 만나면

잠시 잊은 듯하지

바쁜 하룰 보내면

괜찮아진 듯하지

 

하지만 밤이 오고

혼자 남게 되면

조용히 나를 기다려 온

외로움이란 녀석이…

 

씨알태규 '외로움'

 

그렇다고 미친놈처럼 비를 맞으며 바닷가를 뛰어다닌다거나 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저 껌껌한 방안에 쪼그리고 앉아 휴대용 시디 플레이어에 시디를 꽂는다. 희한하게도 이럴 때는 즐겁고 경쾌한 음악보다는 우울한 음악이 더 듣고 싶어진다. 블루투스 스피커에서 우울한 노래가 축축한 공기를 뚫고 내 귀까지 낑낑거리며 힘겹게 걸어온다. 눈물에 반쯤 잠긴 듯한 먹먹한 블루스 기타 소리와 퍼런 강물 속에서 발버둥 치며 헐떡이는 듯한 노랫소리가 내 쪼그라든 폐를 콕콕 찌른다. 자학에서 오는 쾌감일까, 스트레스받을 때 눈물이 쏙 빠지고 위가 타는 듯이 매운 불족발을 먹을 때 오는 쾌감처럼 우울한 음악에 콕콕 찔리면서도 그 늪에 사로잡혀 헤어 나오지를 못한다. 델타 블루스(Delta Blues·미국 미시시피주의 델타 지방을 기원으로 하는 초기 블루스 음악) 가수들이 허구헌날 처지고 우울한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 델타 지방은 아마 일 년 내내 축축하고 비가 내리는 흙탕물 속인가 보다.

◇우울의 이유

말은 이렇게 해도 생각해보면 그 우울함이라는 게 어디 날씨 탓이랴. 잘살아 보겠다고 열심히 일해도 얻는 것은 빚뿐일 때,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 싸우고 노력해도 변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될 때, 세상에 뒤처지고 홀로 남게 될까 봐 두려운 나머지 세상이 들이미는 불합리한 잣대를 견디고만 살아야 할 때 우리는 무력감을 느끼고 심지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의심하게 된다. 니 노래가 구리니까 인기가 없지, 니가 열심히 안하니까 돈을 못벌지, 니가 주제도 모르고 나대니까 직장에서 잘리는 건데 왜 세상 탓을 하고 남탓만 하느냐는 비난을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외부세계로 열려있던 문은 닫히게 되고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려 자신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그래 내가 못나서 그렇지, 내가 열심히 안 해서 그렇지, 내가 제대로 못 하니까 그렇지, 난 왜 이렇게 못났을까. 그와 동시에 자신의 우울감을 주변 사람들에게 악담을 퍼붓거나 이유가 불분명한 폭력의 형태로 전가해 결국에는 주위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더욱 고립시킨다. 물론 모든 것을 세상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못난 짓일 뿐더러 합리적인 자세도 아니다. 적어도 내가 잘못한 것과 세상이 잘못한 것을 구별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훨씬 마음이 편해질지도 모른다. 세상 모든 일에 이유가 있듯이 우울에도 이유가 있을 것이며 우울의 늪에서 나와 '행복'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이성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버트런드 러셀 할아버지, 말이 쉽지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된답디까. 다시 우울한 노래를 들으며 밤을 맞는다. 그래 차라리 울자. 참으면 병이 된다. 울다가 잠들자. 축축한 이불 속에서 아련한 컨트리 노래를 들으며 뒤척인다.

 

저 외로운 쏙독새 소리를 들어봐

날기에는 너무 우울한가 봐

심야 열차는 낮게 기적을 울리고

난 너무 외로워 울 것 같아

 

난 이렇게 긴 밤을 본 적이 없지

시간이 기어갈 때

달은 숨어 울려고

구름 뒤로 가버렸네

 

떨어지는 별의 고요함이

보랏빛 하늘을 밝히네

너는 대체 어디에 있는지

너무 외로워 울 것 같아

 

Hank Williams 'I'm So Lonesome I Could Cry'

▲ 작년 장마철 모처럼 해가 떠서 묵은 빨래를 널었다. /김태춘
▲ 작년 장마철 모처럼 해가 떠서 묵은 빨래를 널었다. /김태춘

◇힘의 원천

음. 오늘 아침은 왠지 몸이 가벼운데 싶어서 분홍색 커튼을 젖히고 낡은 창문을 열어보니 해가 벌써 높이 떠있다. 덥기는 하지만 기분 좋은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온다. 한참을 세탁기에 쌓여있던 묵은 빨래를 옥상에 널고 산을 오른다. 하늘은 약간 우윳빛이 도는 캔디바처럼 은은한 색을 띠고 멀리 보이는 바다는 그보다 약간 짙은 옥색으로 실렁인다. 봄꽃들은 거의 다 졌지만, 나무들은 맹렬히 잎을 펼쳐 산등성이에 푸른빛을 더하고 산길에 잡초들마저 키가 무섭게 커버렸다. 산꼭대기에 올라서 뜨거운 땀을 닦으며 지난 며칠간 쏟아지던 비를 머금고 훌쩍 자랐을 촌의 곡식들, 논과 밭을 떠올린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는 기형도의 시는 '희망의 내용이 질투'뿐이었던 자신의 청춘을 돌이켜 반성하는 내용이다. 작가의 의도에서 조금 벗어나 이 시를 들여다보면 질투를 포함한 사람의 갖가지 감정은 좋은 방향이든 좋지 않은 방향이든 어쨌든 '힘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마음이 요동칠 때는 일기를 쓰거나 홀로 산에 오르며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 그 힘을 써보자. 노래를 불러도 좋고 나무를 잘라 못질하며 책꽂이나 탁자를 만들어 봐도 좋을 것이다. 시원한 냉면 한 그릇으로 뜨거운 머리를 식혀 볼 수도 있다. 이 뜨거운 비가 우리를 쑥쑥 자라게 하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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