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서빈(진주 공군항공과학고 3학년)

나는 '이응'이 들어가는 낱말을 좋아한다. '이응'을 발음할 때, 입 안에서 부드럽게 굴리면 굴린 모양 그대로 부드럽게 퍼져나가는 소리가 듣기 좋다. 특히 누군가의 이름에 '이응'이 들어가면 사람은 푸근하고 선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이름에는 '이응'이 들어가지 않는다. 예쁜 이름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정감 없이 각지게 떨어지는 이름은 너무 팍팍해 보인다. 성격이 유하면 덜 팍팍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성격마저 날카롭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그래서 나는 '이응'의 느낌을 가지고 싶다. '이응'을 가진 사람이 부럽다. 이름에 들어간 '이응'도 그렇지만 '이응'의 느낌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 가끔 내가 '이응'의 성격을 가졌으면 어땠을지 상상을 해보곤 한다. 누구나 편하게 다가올 수 있는 부드러운 사람, 혹은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는 붙임성을 가진 사람, 아니면 양 쪽 모두 행복한 상상이지만 뭐,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학교생활을 할수록 점점 더 날이 선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게 나무나 당연한 것이, 아무리 둥글게 살아가려 애써도 세상이 너무 각지기만 하다. 학교라는 작은(아니, 어쩌면 큰) 우리의 모서리는 뾰족하기만 해서 부딪히면 크게 다칠 수도 있다.

둥근 사람은 이가 나가고, 금이 간다. 둥글지 않던 사람은 깨지고, 더욱 더 뾰족해진다. 우리는 모두 사회라는 더 큰 세상 (이것도 우리일지 모른다)으로 나가기 위해 학교의 울타리에 나를 가져다 박는, 부딪히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언젠가 이 울타리가 허물어져 무너지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학교 밖으로 나가게 될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으로서 사회에 뛰어들 준비를 하는 중이다. 나보다 먼저 어른이 된 사람들은 먼저 겪은 사회에 대한 조언을 해주곤 한다. 그 이야기들은 대개 사회는 생각보다 호락호락하지 않고, 그곳에 발을 디디면 지금처럼 편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곤 한다.

당장 고등학생의 입장에서 사회에 뛰어들 생각을 하니, 무섭기만 하다. 더 뾰족한 사회의 귀퉁이에 베이어 피가 나는 것은 아닐지. 이렇게 다듬어지지 않은 모양을 하고 나갔다가는 분명히 부딪힐 것이다. 만약 아주 동그란 '이응'을 가진 사람이 사회라는 바다에 뛰어든다면 어떨까? 내 생각에는 그는 가라앉거나 귀퉁이에 부딪히지 않을 것 같다. 사회라는 바다의 한 가운데서 둥둥 떠다닐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응'이 구명조끼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나의 경우에는 고등학교 3년을 끝마치고 나면 하사로 임관하는데, 살아남으려면 하사의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 부사관 교관님들께서 공통적으로 하시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 입장에서 일 잘하는 하사는 필요 없어, 하사는 단지 성격 좋고 비위 잘 맞추면 되는 거지." 하사는 좋은 성격을 갖추어야 한다. 특히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는 좋은 성격, 좋은 성격도 여러 종류가 있다. 정의로운 성격, 똑 부러진 성격, 온화한 성격 등도 모두 좋은 성격인데 하필 내가 속하게 될 사회에서 바라는 좋은 성격은 비위를 잘 맞추는 좋은 성격이라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의 사전에서 이 성격은 '이응'이라고 정의된 항목인 것 같다. 누구에게나 붙임성 있게 다가갈 줄도 알고, 누구나 다가올 수 있도록 유한 분위기를 갖추는 것 말이다. 안타깝게 내가 가진 성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편이고.

나는 지금껏 한 번도 '이응'을 가져본 적이 없다. 어떻게 윗사람에게 예쁨 받는 건지도 알 리가 만무하다. 나는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그냥 고등학교 3학년생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사회라는 바다에 뛰어들기 전, 지금 이 시기에 확실한 준비운동을 하는 것뿐이다.

물론 '이응'을 가진 사람들은 구명조끼를 가지고 뛰어들 수 있다. 가지고 있는 이점 덕에 조금 더 겁 없이 바다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겁만 잔뜩 집어 먹지는 않을 것이다. 구명조끼가 없는 만큼 준비운동도 열심히 하는 중이고, 파도 사이로 헤엄쳐 나갈 각오도 되어 있다. '이응'의 긍정적인 면만 바라보는 입장에서, 그런 성격을 가지고 출발점에 서는 사람들이 부럽다.

앞으로도 '이응'을 갖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하지만 가지지 못한다고 해서 절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하고 마는 성격이다보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모난 성격을 예쁘게 다듬어 멋있게 조각할 것이다. 둥근 공 모양의 조각이 아니어도 좋다. 세상에 예쁜 글자는 '이응'만 있는 게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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