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충돌할 때 합의하고 연대로 지키고
학생에게 '성숙한 시민'길러내는 교육을

본능적으로 자유를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 성기지만 나무랄 수 없는 규정이다. 선택과 행동을 자기 의지로 결정한다고 정리하면 무난하겠다.

자유를 잘 이해하면 평등 개념을 받아들이기도 어렵지 않다. 내가 자유를 누리고 싶은 만큼 너도 같은 권리를 누려야 한다. 자유만큼 쉽고 당연한 개념이다. 18세기 이전까지 인류는 나와 네가 누릴 수 있는 자유가 달랐고 대부분 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시민사회는 내가 누릴 자유를 쟁취하고 그 권리에 차별이 없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성숙해졌다.

내 자유와 네 자유가 겹치는 지점에서 시민은 늘 갈등을 빚었다. 이를 해결하는 사회적 비용은 언제나 만만찮았다. 훈련되지 않은 기성세대는 각자 누릴 자유가 달랐던 시기를 더 나은 시절로 추억하곤 했다. 각자 자유가 겹치고 침해하는 지점에서 찾은 방법이 (사회적)합의다. 제한 없는 자유를 스스로 제한하면서 더 누리지도 못하고 더 침해받지도 않는 경계를 찾아냈다. 합의를 유려하게 끌어내는 사회일수록 당연히 성숙하다.

자유, 평등 그리고 이 두 개념이 빚는 모순을 해결할 합의까지 정리하고 남은 게 느닷없는 '박애'였다. 번역 오류로 '연대'가 더 타당하다는 해석을 받아들이더라도 갑자기 연대라니? 내 자유를 지키고, 네 자유를 인정하고, 각자 자유가 겹치는 지점에서는 합의하고, 합의까지 했는데 이를 지키지 않는다면? 내 자유가 우위에 있다고 우길 강자에게 대항할 약자가 지닌 무기가 연대가 된다. 길게 풀었지만 이미 18세기에 정리된 개념이다.

학생이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가 있다. 각자 자유가 겹쳐 갈등을 빚는 지점에서 합의점을 찾아야 한다. 그 주체는 당연히 학생이다. 사회적 합의를 시민이 만들어내는 것과 같은 원리다. 학부모와 교사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그들 역시 학교 구성원 가운데 한 명으로 논의에 참여하면 된다. 우열이 없는 논의 주체 가운데 한 명으로서. 그렇게 만든 합의를 무너뜨리려는 시도에 학생들은 당연히 맞서야 한다. 그 대상이 친구든 교사든 학부모든. 어떻게? 연대해서! 똑똑한 학생이 아니라 성숙한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이다. 이 과정이 경남 학생인권조례에 담긴 선의일 것이다.

벌써 한쪽 편을 든 편협한 인간을 몰아붙이는 질책이 귓가에 쨍 울린다. 하지만, 이렇게 사고하는 것까지 내게 허용된 자유다. 학생인권조례를 악의로 해석하는 다른 자유를 막을 뜻은 조금도 없다.

다만, 두 평등한 의견이 부딪치는 지점에서 우리가 진행해야 할 단계는 어려운 합의다. 옳고 그름을 확정하고 상대를 짓누르려는 시도에서부터 쉽지 않아야 할 합의는 아주 쉬운 스포츠가 됐다. 과정은 됐고 결과는 이겨야 하는 경기. 쉬운 시합으로 가기 전에 어렵고 또 어려운 합의로 이어 갈 방법이 없었을까 또 고민한다. 별 대단한 게 아니라 고작 18세기에 정리된 시민사회 수준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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