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선각자들
이제부터라도 얽힌 실타래 풀어내야

오래전 일이다. 지인들과 단재 신채호 선생의 묘소를 찾았던 적이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청주가 낳은 불세출의 천재이며 왜놈에게 머리를 숙이지 않겠노라고 세수도 꼿꼿이 서서 했다는 일화를 남긴 민족사 연구가이며 독립투사이다. 선생이 쓴 <조선상고사>와 저작들은 만주벌판에서 몸으로 이해한 풍찬노숙의 숭고한 열매였으며 민족사에 관심을 가진 이들에게는 교본으로 남았다. 선생은 1925년경부터 아나키스트를 신봉하기 시작하였다는데 무정부주의 동방동맹에 가입하여 잡지 <탈환>을 발간하였으며 자금 조달을 위해 대만으로 건너가던 중 일제에 피검되어 뤼순 감옥에서 1936년 사망했다.

선생의 묘소를 찾아갔던 그날 우리는 돌아오는 길목에 있는 대표적인 친일 화가로서 당시 화단의 추앙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운보 김기창의 대궐을 방불케 하는 작업실 앞에 있는 보신탕집에 들렀었다. 다분히 객기였으나 운보가 그 집 개고기를 좋아한다니 맛은 좋을 테고 실컷 욕지기나 퍼붓고 싶은 심정이어서 모두 의미심장하게들 개고기에 소주를 마셨으나 소주의 쓴맛보다 더 쓴 현실 앞에 막막하였던 기억이 지금도 어제 일인 양 새롭다. 그러나 그날 가슴에 아로새겼던 아픔과 현실의 쓰라림이 온전히 삶을 살아가는 지표가 되었더라면 시골구석에서 세상을 등지고 살지는 않았겠지만 스스로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를 핑계로 그날의 다짐은 삶의 한 옆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그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현충일 기념사 때문이었다. 의열단장이었으며 독립운동가로서 독립군 지도자였으나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 정권수립에 공을 세우고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진 김원봉의 이름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연설에서 나왔고 국군 창설의 주역으로 등장하였으니 그것은 경악이었고 마침내 올 것이 온 것인가에 대한 감회로 온몸이 전율케 하였다.

두 사람이 비슷한 삶의 경로를 걸었다는 것으로 인식되는 것은 어리석은 소치일 것이다. 단재 선생은 죽어서 고국으로 돌아왔으며 김원봉은 살아서 돌아왔고, 단재 선생은 정권을 잡은 이승만의 서슬이 무서워 구들장 밑에 암장이 되어 죽어서도 고초를 겪어야 했고 김원봉 또한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월북을 하였으니 다르면서도 비슷한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공통점은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비록 숙청을 당했으나 그렇게 되기 전까지 또 하나의 조국에서 나름의 역할과 대접을 받았으니 성공한 삶이라 평가할 자신은 없다. 단재 선생 또한 세상의 의기가 살아 있어 시신이나마 밝은 곳으로 나왔으나 평생을 일궈온 역사연구가 일제로부터 이어받은 사학의 흐름이 강단을 지배하는 현실에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두 선각자는 다르면서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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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왜 하필 보수 우익의 공격 받을 것이 자명한 인물을 그것도 현충일 기념식에서 언급한 이유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국가에 대한 충성을 기리는 것이 꼭 6·25에 국한하지는 않을 것이다. 국가가 국가로서 존재하는 한 국가를 지켜내기 위한 희생은 있게 마련이고 그 희생을 기리는 것은 국가의 책무이니 의미를 한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기도 하다. 대통령의 언급을 계기로 대한민국이 어떤 상태인지는 분명히 드러났다. 이제부터는 얽힌 실타래를 풀어내야 한다. 김원봉은 단재와 비슷했으나 다른 삶을 살았다. 김원봉은 북한 주도의 통일을 위해 살다가 김일성 독재를 고착화하는 과정에서 숙청당했다. 대한민국에서는 김백일 등 자유대한민국을 지켜낸 이들이 친일 행적으로 수모를 당하고 있다. 국가 정체성을 어떻게 바로 할 것인지, 분단에 모든 것을 미루어 둘 것인지, 나만 옳다는 식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지금도 못 먹는 개고기를 먹겠다고 들어갔던 그 보신탕집에서의 씁쓸함이 더욱 진하게 머리를 짓누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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