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Ⅱ 아마 자존심(1946~1981)
마산상고, 재창단 2년 만에 첫 전국제패 감격

'3·15의거' '5·16군사쿠데타' 격변기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 1960년, 당시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민주주의 제단'에 피를 바쳤다. 그해 마산에서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반발해 대규모 시위(3·15의거)가 일어났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마산상업고등학교(현 마산용마고) 학생이었던 김주열 군이 4월 11일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이는 2차 시위로 이어졌고, 4·19혁명 도화선이 됐다.

마산야구는 이러한 격변기에 1960년대를 시작했다. 1960년 7월 27일 경남야구협회와 국제신문사 주최로 부산공설운동장에서 열린 '제12회 쌍룡기쟁탈 전국고교대회'에 마산고가 출전했지만, 별다른 성적은 내지 못했다.

1961년엔 박정희 주도로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났다. 이 여파로 서민호 대한야구협회장이 회장직을 박탈당한다. 이처럼 어수선한 시대 상황 탓에 1961·1962년 마산지역 초·중·고교 야구부는 전국대회 참가를 건너뛰었다.

1963년 7월 17일 '제10회 전국중학 선수권대회', 7월 30일 '제15회 쌍룡기쟁탈 전국고교대회'에서야 비로소 각각 마산동중·마산상고가 출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그해 10월 4일부터 9일까지 전주종합운동장에서 개최된 '제44회 전국체육대회 야구경기'에 출전한 마산상고는 1회전에서 경남상고와 경기를 벌였지만 1-6으로 패했다.

'절치부심'한 마산상고는 1963년 10월 22일 대한야구협회·동아일보사가 공동 주최한 '제17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지구별 초청 고교쟁패전'에 박상권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가운데 출전했다. 1회전에서 경동고를 4-1로 꺾었지만, 2회전에서 경남고에 3-5로 석패하며 탈락했다. 이 대회에서 3루수로 뛰었던 마산상고 이장길은 10타수 6안타(6할)로 타격상을 받으며 앞으로 '맹활약'을 예고했다. 이장길은 일본고교야구연맹 초청으로 1963년 11월 30일부터 12월 6일까지 일본 규슈에서 5차례 열린 '영남지구고교선발 일본원정경기' 내야수 명단에도 이름 올렸다.

1964년에도 도전은 이어졌다. 마산상고가 7월 8일 '제19회 청룡기쟁탈 전국고교선수권대회', 7월 22일 '제16회 쌍룡기쟁탈 전국고교대회'에 각각 출전했다. 예선 탈락 등 뚜렷한 성적은 거두지 못했지만, 당시 청룡기 대회에서 유격수로 활약했던 마산상고 전성욱이 미기상(美技賞·훌륭한 플레이를 한 선수에게 주는 상)을 받기도 했다.

1964년 8월 10일부터 9월 1일까지 열린 '제9회 재일교포학생야구단 모국방문환영대회'도 특기할 만하다. 서울·대구·부산·마산 등에서 모두 16차전이 펼쳐진 이 대회 마지막 경기는 마산에서 벌어졌다. 재일교포가 5-1로 마산상고를 눌렀다. 당시 마산상고가 뽑은 1점은 우익수 겸 투수였던 김차열의 중월 홈런이었고, 그는 이 한방으로 홈런상을 받았다.

▲ <동아일보>가 1965년 10월 1일 자에 '제19회 황금사자기대회'에 출전하는 마산상고 선수단을 소개한 기사(오른쪽)와 사진.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캡처

마침내 전국대회 첫 우승 트로피

마산상고는 1964년 9월 3∼8일 인천에서 열린 '제45회 전국체육대회 고등부 정상'에 오른다. 그리고 '제18회 황금사자기 쟁탈 전국 지구별 초청 고교 쟁패전(9월 29일∼10월 5일)'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대미'를 장식했다.

마산상고는 전국체전 고등부 3회전에서 대전고를 11-0으로 대파하며 결승에 올라 성남고와 연장 접전 끝에 공동 우승을 했다. <한국 야구사 연표>에는 점수가 나와 있지 않고, 우천으로 경기가 마무리됐다고만 기록돼 있다.

당시 마산상고 좌익수였던 최재출(73) 씨 이야기다. "스코어는 0-0으로 팽팽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공동 우승을 하게 된 건 폭우 때문은 아니었고, 곧 시상식을 해야 하는데 그 시간까지 경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으로 기억합니다."

마산상고는 기세를 몰아 '제18회 황금사자기대회'에서도 결승에 올랐다. 고교야구 첫 메이저대회 결승 진출이었다. 얄궂은 운명이었다. 이번에도 결승 상대가 성남고였다. 하지만 1-2로 분루를 삼키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최 씨 증언이 이어졌다. 그는 이 대회에서 멋진 수비를 선보여 '미기상'을 받기도 했다.

"당시 성남고는 전국 최강이었습니다. 출전하는 전국대회를 거의 휩쓸다시피 했습니다. 전국체전 때 승부를 못 낸 게 너무 아쉬웠죠(웃음). 선수들과 '이번에는 제대로 한 번 붙어보자'며 결의를 다졌지만, 아무래도 부담감이 있었습니다. 성남고의 김윤겸이라는 왼손 투수가 공을 참 잘 던졌고, 9회까지 '완투'를 했습니다."

최 씨는 1964년 마산상고 야구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박상권 감독의 지도력과 헌신에 힘입은 바 크다고 했다. 박 감독은 안타깝게 전국체전 5개월여를 앞두고 지병으로 별세했다. 이 밖에도 최 씨는 마산상고 야구가 뿌리내리는 데는 졸업 후 사회로 먼저 진출했던 당시 유원산업 사장이었던 최재형 씨 등 당시 선배들의 '물심양면' 지원도 큰 밑거름이었다고 했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도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듯 마산상고 야구가 그 시절 결실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땀 흘린 선수와 감독, 그리고 야구를 사랑했던 이들의 관심·지원이 만든 합작품이었던 셈이다.

마산상고는 이듬해부터 당당히 우승 후보로 거론되는 대접을 받았다. 1965년 10월 1일 자 동아일보는 '제19회 황금사자기대회'에 출전한 마산상고를 이렇게 소개했다.

'박상권 감독 지도 하에 팀 창설 2년째인 작년, 전국체전에서 감격의 공동 우승을 차지, 고교야구계 왕자로 군림했다. 제18회 황금사자기대회에서도 결승전까지 일사천리로 올랐고, 결승에서 게임 운이 나빠 우승 기회를 놓쳤으나, 막강한 실력은 야구 팬의 뇌리에 아직도 새로운 바 있다. 올해는 지장 고창렬 감독 지도 아래 기필코 패권을 잡고 말겠다는 일념에 정진을 거듭하고 있다.' 

<참고 문헌>
△<한국 야구사 연표>, 홍순일 편저, KBO·대한야구협회, 2013 △<마산시 체육사>, 조호연 책임 집필, 마산시, 2004 △경남야구협회 소장 자료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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