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야, 오늘 어땠어? 오늘 좋았지, 행복했어!

서우야, 오늘 어땠어? 오늘 엄청 좋았지, 지윤이랑 사이좋게 놀았는데 무지 행복하더라. 그랬구나, 다행이네. 아빠도 네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기분이 좋은 걸. 잠자리에서 종종 하는 대화 패턴이다. 딸은 자신의 하루를 규정할 때 대부분 행복이라는 단어를 쓴다.

나에게는 참 부러운 측면이다. 뭐랄까, 불혹에 근접하게 되어서 그럴까. 감정선의 중간을 유지해야 할 것 같다. 평정심을 강요받는 느낌이다. 때로는 품위를 접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해야 하는데, 이제는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 그런 사회적 시선이 느껴진다. 그 마음을 배제하더라도, 행복이라는 단어는 최상급의 감정표현이므로, 그 말을 좀처럼 쓰기 어렵다. 우리 카페 와이파이의 패스워드가 happyhappy인데, 오늘은 행복했었다고 평하는 나날은 거의 없다.

▲ 눈을 맞추는 아내와 아이. /정인한 시민기자

◇행복

돌이켜보면, 와이프의 손을 처음 잡았을 때 행복했다. 우여곡절 결혼식이 끝나고, 모든 의무를 뒤로한 채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갈 때도 좋았다. 딸이 태어났을 때, 아빠라고 처음 말해줬을 때, 그녀가 첫걸음을 걸을 때, 나는 정말 기뻤다. 그때는 그렇게 말을 못 했지만, 그 단어가 적합한 순간들이 꽤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아쉽다. 우리의 행복이 첫 경험과 너무 밀착된 것 같기 때문이다. 그 지점이 서글프다. 인생을 살아갈수록 경험은 쌓일 것인데, 미지의 세계를 찾으러 다니면서 늙어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런 점에서 딸에게 배울 점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날은 딱 까놓고 물어본다.

온아, 이게 재미있어? 그럼 얼마나 신난다고.

서우와 온이에게 거실은 지루하지만, 현관문만 나서도 신선한 곳이다. 엘리베이터 단추의 질감을 먼저 느껴보겠노라고 시작부터 경쟁이다. 그러니, 밖은 어련할까. 신선을 넘어서 신성한 장소다. 요즘은 킥보드를 제법 탄다. 차의 길과 사람의 길을 알고,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면 서행한다. 매일 같은 길이지만, 어찌나 신나게 발을 구르는지. 머뭇거리지 않고 자신의 방향을 믿는다.

3주째 아파트 화단에서 논다. 깊숙한 곳이다. 어느 나무 그늘에서 콩 벌레 잡는 것을 좋아한다. 꼬물꼬물 콩 벌레 친구들이 출몰하는 존이 있다. 그곳에 모기가 무척 많은데, 나는 기피제를 가지고 다니며 그녀의 옷에 칙칙 뿌려준다. 가녀린 등을 보면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 나에게도 나쁘지 않은 시간이 된다. 그렇게 보낸 하루는 그녀에게 틀림없이 행복으로 기록된다.

▲ 음료를 갖고 노는 아이들. /정인한 시민기자

◇기쁨

행복이 믿어지는가. 그 단어를 쓰기에 합당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과거의 나는 대부분의 하루가 그것을 쓰기에 부족하다고 느꼈다. 어떤 힘겨운 날은 그 단어의 존재가 의심스러웠다. 여기보다, 우주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신처럼 비현실적인 관념이라 느껴졌다. 과대 포장된 광고 같았고, 거짓된 이상을 제시하는 선동이라 믿었다. 우울한 나날이었다.

하지만 딸의 시선으로 세상을 볼 때는 행복이 믿어진다. 그녀가 만난 작은 세상과 그 속에서 싹트는 더 작은 이야기는 그 단어로 규정하기에 적확하다. 두 음절을 계속 반복해도 민망하지 않다. 그녀의 발끝이 머문 곳은 분명 새로운 감각과 기쁨이 가득하다.

오늘은 날이 좋아서 동네의 놀이동산에 다녀왔다. 작은 곳이라서 같은 회전목마를 몇 번 탔다. 아무래도 자연보다는 빨리 질리는지 두 딸의 표정이 어느 순간 뚱해졌다. 그래도, 아내가 미소지으며 손을 흔들면 그녀도 환하게 웃는다.

아빠가 되니 기쁨이 예전보다 늘긴 했다. 굳이 첫 경험이 아니라도 충분하다. 딸의 시선 덕인 것 같다. 서우와 온이가 나의 표정을 보고 행복을 규정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웃는다. 딸이 그렇게 하는 것처럼.

▲ 놀이기구를 타는 아이들. /정인한 시민기자

◇지속가능한 반복

소크라테스가 그랬나. 음미할 수 없는 삶은 가치가 없다고. 많은 사람이 삶을 감상할 수 없다면, 그것이 행복이라는 감정에까지 미칠 여지가 없다면, 그것은 정치적 문제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살아가려면 생각을 바꿔보는 것도 좋지 싶다. 어디를 보고, 무엇을 보는가. 가지지 못한 경험만을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노오력이 아닌 타인의 시선을 상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지 싶다.

8년째 같은 곳에서 장사를 한다. 같은 거리에 새로운 카페가 오픈 준비를 한다. 높은 천장에 하얀 커튼이 하늘거리고, 세련된 에스프레소 기계가 보인다. 안락한 의자와 탄탄한 목제 책상이 눈에 들어온다. 부럽다. 처음 겪는 것은 아니지만, 신경이 쓰인다. 모든 것이 오래된 우리 카페는 힙한 것과 거리가 멀다. 그런데도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참 고맙다. 아마도, 그들은 반복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것이 가능한 사람이지 싶다. 그들의 걸음 덕에 앞에 놓인 시간이 두렵기보다는 새로운 길이 있을 것 같아 기다려진다.

▲ 아이들에게 손을 흔드는 아내. /정인한 시민기자

손님의 시선을 상상하면, 미래가 믿어진다. 카페 밖을 보면 풍성한 나무 그늘에 6월의 햇살이 부서진다. 미지의 사람들이 익숙한 거리를 한가로이 거닐고 있다.

내가 성장하는 것은 너무 먼 이야기, 거짓 같다. 하지만, 딸이 커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나는 그저 지속가능한 반복을 바란다. 이 거리와 두 딸을 조용히 바라보면서 작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 그것 또한 믿어진다.

※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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