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릉 없어 국가 아닌 큰 세력
타지 문화 보여 '개방적'추측
"함안 말이산 고분군과 비교해
1세기 정도 앞선 목관묘 중심"

창원시 마산합포구 현동 봉화산 산허리에 자리 잡은 가야시대 사람들의 흔적 앞에서 일종의 경이를 느꼈다. 하얀 선으로 표시된 무덤이며 집터가 정말 촘촘하게 이어져 있었다. 마치 눈앞에 당시의 마을이라도 보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창원 현동 가야 고분군은 지난 2017년 거제~마산 국도 건설 현장에서 발견된 것이다. 공사 전에 하는 문화재 조사를 통해서다. 대구에 있는 (재)삼한문화재연구원이 지난달 27일까지 발굴 조사를 진행했다. 그리고 지난 5일 오전 11시 발굴 현장에서 설명회가 열렸다. 지난해 6월에 이미 가야 시대 최대 고분군이라는 사실은 발표됐다. 이날은 발굴 작업을 마무리하면서 여는 설명회 자리였다.

여기서 최대라는 건 지금까지 조사된 무덤 수가 그렇다는 말이다. 이 고분군 외에 1989년과 2009년에도 근처에서 청동기와 가야시대에 이르는 마을 흔적이 발굴됐었다. 이때 발굴한 무덤까지 포함하면 1000기가 훨씬 넘는다.

앞서 두 차례 현동 주변 발굴을 통해 4~5세기에 최소한 이 주변에 제철집단, 즉 철을 제련해서 만들던 집단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번 발굴을 통해 이 주변에 상당한 규모의 세력이 있었다는 게 확인이 된 것이다. 현동 고분군 주변이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이 살던 중요한 주거지였다는 뜻이다.

▲ 창원시 현동 가야 고분군 발굴 현장. 유적은 봉화산 남동쪽 경사지에 형성되어 있다. /이서후 기자

◇바다 무역으로 급성장한 세력

지금으로 보면 이런 곳에서 왜 사람들이 살았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에는 지정학적으로 꽤 중요한 위치였을 것으로 발굴팀은 추정한다. 예컨대 지금 창원시하수종말처리장이 있는 덕동만이 삼국시대에는 현동 고분군 바로 앞까지 이르렀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 덕동만을 통해 쉽게 바다로 진출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 고분군이 왕릉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아주 큰 세력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발굴팀은 출토 유물로 볼 때 현동 고분군을 형성한 이들은 함안 아라가야 문화를 기반으로 한 집단이었다고 본다. 아라가야 특유의 불꽃 무늬 토기가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만들어진 유물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한반도 내 집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주변 고성이나 김해 지역 가야 문화도 발견되는 것으로 봐서 일반적인 아라가야 사람들보다는 좀 더 개방적인 사람들이라고 발굴팀은 생각한다.

"하나의 국가 세력이라기보다는 현동을 중심으로 무역을 해서 급성장한 세력 같아요. 존속 시기가 100년에서 150년 정도 된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도 많았고, 사회 변동이 매우 컸을 시기에 이 정도 규모를 이뤘다는 건 엄청난 거라고 볼 수 있어요."

삼한문화재연구원 양하석 부원장의 말이다.

◇다른 고분군보다 100여 년 앞서

그런데 현동 고분군에는 가야시대 무덤들이 으레 그렇듯 큰 봉분이 이어져 있지는 않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 등 대부분 가야 시대 고분군은 석관묘가 중심인 왕릉들이다. 보통 4~5m 너비에 10m 정도 높이로 봉분을 만든 것이다. 발굴팀은 이와 비교해 현동 고분군은 이들보다 1세기 정도 앞섰고 목관묘가 중심이라고 설명했다. 그리도 당시에는 봉분을 그렇게 높이 만들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석관묘는 돌로 위를 덮었기에 무덤이 유지되지만, 목관묘는 봉분을 만들었다 해도 나무가 삭으면서 대부분 내려앉았을 가능성이 크다.

현동 고분군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고성 내산리 고분군이 생각났다. 덕동만을 낀 현동 고분군처럼 고성 당항만이 바깥 바다와 만나는 자리에 있는데, 남해를 낀 가락국, 아라가야, 일본(왜), 신라 등이 고성으로 드나드는 해상관문 노릇을 한 세력이었다. 현동 고분군을 형성한 세력이 해상관문 노릇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경남 지역에 거대한 가야시대 세력이 존재했고, 우리는 지금 그 실체를 만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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