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관념·차별 내려놓고 상대를 보면
좋은 점이 보이고 공감할 수 있게 돼

온 산야에 초록의 향연이 펼쳐진다.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전해오는 색감도 진하다. 바람결에 따라 움직이는 잎들의 동작 또한 자연스럽다. 위아래로 옆으로 움직이는 율동은 어느 춤사위와 비견할 수 있겠는가.

그 동작을 따라가다 보면 전해오는 에너지가 강함을 알게 된다. 이러한 과정을 온전히 받아들이면 자연과 함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의 움직임을 그저 바라만 보았을 뿐인데 치유와 정화를 경험하게 된다. 훨씬 더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진다.

그러므로 나의 내면을 더 성숙시키기 위해서는 자연에서 배운 것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사람과의 관계도 이 원리가 그대로 활용된다.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상대편의 좋은 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나의 마음을 더 관조해 보면 상대편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들이 확연해진다.

나의 관념과 차별심을 놓고 보면 있는 그대로 보인다. 새로움으로 다가오는 무언가가 있다. 상대방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진다. 참 만남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것은 명확한 사인(sign)이다.

이를 통해 공감 능력이 확산된다. 상극의 관계가 아니라 상생의 관계임을 인지하게 된다. 작은 배려에도 감사할 줄 알고 서로를 존중하게 된다.

데일 카네기는 철강업계의 신화적인 인물인 찰스 슈왑에 대한 일화를 자주 이야기하곤 했다. 데일의 부친은 슈왑에게 100만 달러의 연봉을 지급했다. 그런 고액을 지급했던 것은 슈왑이 무엇보다 사람 다루는 데 비범한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데일은 말했다.

언젠가 슈왑이 제련소를 돌아보고 있을 때 직원 몇 명이 금연 표지판 밑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

슈왑은 표지판을 가리키면서 "이봐 무슨 짓들이야! 글자도 못 읽나?"라고 소리치는 대신 그들에게 다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넸다. 금연 표지판 아래서 흡연한 것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도 않았다. 얘기를 마무리 지을 무렵 슈왑은 담배를 피운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가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그러곤 눈을 한번 찡긋하고서 "이 시가는 밖에서 태워주면 고맙겠네"라고 했다.

그가 말한 것은 이것이 전부다. 훈계도, 근로자들을 부끄럽고 무안하게 만들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처럼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은 공감의 의미도 함께한다. 알면 알수록 그렇다. 걸림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이다. 소통의 흐름도 원활해진다. 상대방과 좋은 인연이 된 것에 대해 감사하게 된다. 나를 사랑하게 된다. 더 나아가 나의 영적 성숙을 가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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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사람 사랑에 눈뜨게 된다. 사람 사랑을 진정으로 할 수 있게 된다. 살아 있는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행복해한다. "사랑해. 감사해. 소중해. 함께해"라는 말들도 쉽게 공감하게 된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만 해도 이러한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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