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책장에 오늘도 숨쉬는 슬픔과 그리움

오래된 시집의 책장을 넘기는 건 항상 설레는 일이다. 요즘 책과는 다른 의미로 멋들어진 표지. 세로쓰기, 요즘 책과 반대로 제일 뒷면이 표지인 것까지. 빛바랜 책장은 넘길 때마다 낡아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날 듯하다. 경남 문단의 오랜 원로였던 고 추창영 시인(1939~2019)의 지난 시집들이 그랬다.

지난 2월 시인 타계 소식을 접하고 그가 발간한 시집들을 살펴보자 생각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는 시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인은 평생 그렇게 많은 시집을 내지는 않았다. 그의 이름으로 나온 시집은 모두 5권. 1990년에 나온 게 마지막이다. 특히 60, 70년대 나온 시집들은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시인의 아들인 창원대 고봉진 교수를 찾아가 그가 소장한 시집들을 빌려 읽었다.

▲ 1968년에 나온 추창영 시인의 첫 시집 <오월 한낮에>와 1977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징소리>. 낡아서 더욱 멋져진 시집들이다. /이서후 기자

◇60, 70년대 시집들

시인은 1956년 마산 시내 남녀고등학교 문예반 학생들이 결성한 '백치 동인'에서 활동했다. 이들은 이후 쟁쟁한 문인들로 성장하며 마산, 넓게는 경남 문학의 여명을 밝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치 동인에서 시인의 꿈을 키운 추 시인은 당시 최고의 문학잡지인 <현대문학>에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추천을 받아 등단했다. 1960년이니 21살 때 일이다.

첫 시집 <오월 한낮에>는 1968년에 나왔다. 시인이 29세가 되던 해다. 고봉진 교수도 단 한 권만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추 시인의 전체 시집을 통틀어 첫 시집 표지가 가장 예쁘다. 처음부터 멋지게 만들었으니 낡아 있는 모습조차 멋들어진다. 이런 시집은 보고 만져보는 것 자체가 많은 위안이 된다.

시집 첫 머리에 미당 서정주 시인의 축사가 실렸다. 미당은 추 시인의 시를 두고 '일상의 자잘한 구석에서 배어 나오는 고도한 슬픔'이라고 표현하는데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시구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밤에는 땀에 젖어/ 낭패한 기분으로, 새벽이면/ 짙은 안개 서린 머리를 흔들어 본다// 안개는 어리어 비가 되는가/ 눅눅한 머릿속을/ 텅 빈 댓숲의 울림 (중략) 낮을 주고 어둠을 사서/ 제 것인 양 안식을 취하는/ 위장된 오밤중에/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나를 부른다." ('병후' 중에서)

하지만, 첫 시집에는 슬픔보다 묵직한 언어들도 제법 많다. 마치 해거름 먼 산 노을을 바라보며 인간의 감당할 수 없는 오랜 사물들의 시간을 헤아려 보려 애쓰는 듯한 느낌 말이다.

"저무는 밤으로/ 나무는 돌아서서/ 무궁한 세월의 아픔을/ 소리 없이 다스리고 있다." ('겨울 나무' 중에서)

축사 중 '세대를 통하는 슬픔의 전통'이란 미당의 표현은 두 번째 시집 <징소리>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1977년에 나온 이 시집 역시 지금 봐도 멋진 표지에 세로쓰기를 했다.

"어머니/ 내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당신의 얼굴은/ 꽃입니다// 쥐었다 펴 보는 손바닥에/ 세월이 흐르고/ 당신은 세월에 떠 있는/ 하얀 꽃입니다." ('부재' 중에서)

▲ 추창영 시인의 시집들. 1968년에서 1990년까지 모두 5권을 발간했다. /이서후 기자

◇80, 90년대 시집들

<빗소리 바람 소리>(1981), <빈 배가 되어>(1984) 두 시집은 직장 생활에 한창 바쁠 시기에 낸 것들이다. 추 시인은 1959년부터 1996년까지 방송국에서 근무했는데, 아나운서에서 시작해 PD, 편성부장 등을 지냈다.

"나는 60년대 중반쯤 부산에서 MBC 아나운서로 몇 년간 근무를 하다가 1969년 2월 1일 마산MBC 전신인 경남방송의 개국을 앞두고 스카우트 되어 68년 말 PD 겸 아나운서로 직장을 마산으로 옮겼다. 그리고 나는 70년대 초, 창사 기념프로그램으로 당대 최고의 문화 예술인들의 첫 사랑 이야기를 듣는 녹음 프로그램을 제작했었다." ('꽃대궐' 114호 2014년 4월호 시인의 기고 중에서)

그는 특히 전통문화 쪽 다큐멘터리를 열심히 만들었는데 대표적으로 <한국민요대전>이 있다. 다음과 같은 시에는 전통문화에 대한 시인의 관심이 잘 드러난다.

"사보뎅을 키우는 남녀의/ 행복을 나는 모른다// 고려 청자/ 신라 불상/ 돈 놓고 돈 먹기/ 회오리 바람을/ 나는 모른다// 잠 오지 않는 밤의/ 쓰린 속앓이거나/ 마파람에 터지는 두통쯤으로/ 살아가는데// 아침 찻잔의 티끌쯤/ 건져 내는 손가락이 떨린다." ('외곽' 전문)

시인은 30대에 겪은 교통사고 이후로 계속 몸이 좋지 않았다. 타계할 때까지 몸무게가 40㎏을 넘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병약한 몸을 견뎌내는 긴 밤들의 이야기들도 이들 시집에 담겼다.

"밤은/ 앓는 이에게 머물고/ 침묵은 덮을수록/ 오한으로 흔들리는데// 형광등 불빛은 어둠 속에 고이고/ 창은/ 창백한 거울이 되어/ 거울 속에서/ 발자욱 소리가 들린다. (중략) 훤히 뚫린 두 개의 동공,/ 그 속에서 발자욱 소리는/ 간단없이 흘러나와 방안을 가득 채운다./ 신열에 빠져드는/ 깊은 잠결에도/ 나를 떠올리는 발자욱 소리는// 떠나가는가/ 돌아오는가" ('가을비' 중에서)

▲ 젊은 날의 추창영 시인. 1981년 세 번째 시집 <빗소리 바람소리> 출간기념회에서 찍은 것이다. /고봉진

◇그리고 마지막 시집

아들 고봉진 교수는 어머니를 굉장히 정확하고 엄격하신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개인 생활의 엄격함이 시인으로서 고도의 언어 제련과 바쁜 방송국 생활에 밑바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정년퇴직하시고 머리를 짧게 깎으시더니, '이 지역에서 내가 할 일을 다했다'며 모든 제안을 거절하고 손주를 돌보며 지내는 걸 즐기셨어요. 일부 지인 빼고는 거의 사람을 만나지 않으셨죠. 모든 경조사를 제가 대신 갈 정도였으니까요."

시집 발간은 이미 1990년에 나온 <우리 삶에 그리움으로 오는 것>이 마지막이었다. 시인이 51세 때 나온 것이다. 명상시집이란 부제가 붙었는데, 마치 시인으로서 삶을 정리하는 듯한 느낌이다.

"진실이 없는 시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시일 수는 없다. 오십고개에 서서 나 자신이 바로 허무 그 자체임을 생각한다. 그러면 시도 허무다. 이제는 지나온 흔적들을 남김없이 지우고 완전하게 나 자신을 허무를 돌려주기 위한 마지막 작업이 남았을 뿐이다." (머리말 '허무의 변' 중에서)

이 시집의 마지막 시에는 그가 책임감이란 짐을 짊어지고 안간힘으로 걸어내었을 지난 세월이 느껴진다. 이제는 어느 잔잔한 곳에서 편안하게 쉬고 있을 시인을 상상해 본다.

"바람이 분다/ 이제/ 떠나야지.// 눈물도 무겁고/ 한숨도 무겁다.// 가진 것 다 내려놓고/ 가질 것 다 그냥 두고// 빈 어깨 시려도/ 이제는/ 떠나야지."('바람 부는 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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