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개 추모하려 기생들이 연 여성제례악
역사성과 현장성 뚜렷해 유산 가치 커

26일 끝난 진주 논개제를 전후로 '의암별제(義巖別祭)'를 문화재로 지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1593년 순국한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움직임이 진주에서 계속됐고, 결국 1740년 조정의 명으로 의기사가 건립됐다. 1868년 당시 진주목사 정현석은 경상우병마절도사와 의논하여 논개의 사당을 다시 중건한 뒤, 매년 6월 중 길일을 택해 논개에 대한 제향을 지냈는데 이것이 바로 '의암별제'였다. 의암별제는 논개를 추모하고자 기생들만이 치른 대규모 의식으로, 악공을 제외하고 제관(祭官) 등 모든 의식을 여자들이 주관하는 독특한 제전이며, 선비들의 음악인 정악(正樂)을 사용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조선시대 종묘대제나 석전대제를 제외하고서 이처럼 음악과 노래, 춤이 어우러진 제사의식을 치른 경우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1868년 첫 제례 때 300명의 기생들이 3일 동안 진행한 의암별제는 장관이었다고 전해진다. 정현석 자신도 "무진년 6월에 단을 만들어 향불을 피워 300명의 기녀들이 정성으로 제를 올리니 논낭자의 충의의 영혼이 내려오는 듯하구나"라고 감격했다. 정현석은 이것에 그치지 않고 제사에 대한 기록을 <교방가요>라는 책으로 남겼다. 1893년 진주성 함락 300주년을 맞아 열린 의암별제에는 수천 명의 구경 인파가 몰렸다는 기록이 전한다. 하지만, 1910년 국권을 상실하면서 의암별제는 쇠락했고, 이후 자취를 감추게 된다.

이후 진주교방 출신으로 직접 의암별제에 참여했던 최순이 씨와 최 씨로부터 춤을 배운 성계옥 씨에 의해 복원이 추진됐다. 성 씨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교방가요를 찾아냈고, 그 책 속에는 의암별제의 제례과정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술돼 있어 완벽한 복원을 가능케 했다. 성 씨는 각고의 노력 끝에 이 책을 번역해 1986년 <의암별제자>를 간행했고, 1992년 의암별제는 재현됐다. 이후 진주민속예술보존회에서 전승해오고 있다. 의암별제는 단독행사로 진행되다가 지금은 진주논개제의 한 부분으로 치러진다. 원형을 약간 변행해 대중과 함께하려는 노력도 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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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별제가 문화재로 지정돼야 한다는 당위성은 뚜렷하다. 이미 의암별제 속에 있는 진주검무 등은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먼저 국내에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여성제례악이라는 점이다. 또 전승계보와 역사적 근거, 복원 과정 등이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그리고 진주대첩의 장소인 진주성과 논개의 얼이 서린 의암, 국가에서 내려준 사당인 의기사 등의 역사성과 현장성이 뚜렷하다. 복원한 의암별제는 일부 부족한 점이 있다. 악(樂)·가(歌)·무(舞) 중에서 악과 가는 더 보강해야 한다. 지금처럼 민간에 맡겨서는 한계가 있다. 완벽한 복원을 위해선 문화재로 지정해야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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