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야구 뿌리를 들춰내다

<경남도민일보>가 ‘창원야구 100년사’ 정리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옛 마산·창원·진해 포함)은 야구 역사를 1세기에 걸쳐 이어왔습니다.

여기에는 운동 종목 이상의, 즉 지역사회 시대적 애환도 함께 녹아있을 것입니다.

<경남도민일보>는 ‘창원야구 100년사’를 통해 그러한 시간을 담담하게 담아내려 합니다.

이를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 얘길 듣고 있습니다.

그 계층은 선수뿐만 아니라, 팬, 단체 관계자, 역사학자, 기록 소장자 등 다양합니다.

<피플파워>는 이들 이야기를 따로 풀어보고자 합니다.

이번 주인공은 모두 세 분입니다. 옛 시간이 잊히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기고, 이를 끄집어내는 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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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4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선거관리위원회 앞 육호광장에 세워진 '마산 야구 100년 기념 표지석'. /이창언 기자

김재하 창신고등학교 교사

마산(현 창원시) 야구 출발은 1914년 창신학교(현 창신중·고)로 거슬러 올라간다.

1911년 창신학교에 부임한 자산 안확(1886~1946) 선생 의지에 따라 ‘일본을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야구부를 창단한 게 그 시작이다.

창단 이후 창신학교 야구부는 대구 계성학교(현 계성중·고) 등과 친선경기를 치르며 마산에서 펼쳐진 모든 경기 주 무대 역할을 했다.

그러던 창신학교 야구부는 1923년 마산소년야구대회 참가 소식을 끝으로 자취를 감춘다. 창단 이후 어떻게 운영되고 변화해 갔는지는 물론, 어떤 이유로 해체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셈이다.

희미한 역사를 그 누구보다 아쉬워하는 이가 있다. <창신 100년사>를 집필한 김재하(61) 창신고 교사다. 늘 ‘창신학교 야구 부활’을 꿈꾸는 그는 당시 창신학교 야구부 해체 이유를 두 가지로 봤다.

“아무래도 야구는 굉장히 복잡한 스포츠잖아요. 공 하나와 적당한 공간만 있으면 어디서든 할 수 있는 축구와 달리 배트에 공에, 세밀한 규칙까지…. 자주 할 수 있는 스포츠는 아닌 셈이죠. 여기에 새끼줄이나 헌 옷을 뭉쳐 공을 만들고 나무막대로 방망이를 만들거나 선교사에게서 용품을 받았던 당시 사정을 고려하면 마냥 이어가긴 어려웠던 것으로 보여요.”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1925년 마산 의신여학교와 진주 시원여학교는 우리나라 최초 여자 경기를 했고, 1929년에는 마산 수원야구단 주최로 전마산소년야구대회가 이 지역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야구 저변이 점차 확대한 모양새인데, 유독 창신학교에서만 그 맥이 끊겼다.

김 교사는 그 원인을 ‘창신학교 특수성’에서 찾았다. 안확 선생 정신이 깃든, 마산지역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던 학교이기에 억압이 더 컸을 것이라는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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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신 100년사>를 집필한 김재하 창신고 교사가 1914년 창단한 창신학교 야구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창언 기자

“일찌감치 선교사가 세우고 외국인이 교장으로 역임하다 보니 일제가 함부로 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어요. 이러한 점을 활용해 학교 내에서는 주권 회복과 관련한 교육·모임 등의 움직임이 많았고요. 그 결과가 3·1운동 등으로 이어지자 일제도 결국 손을 쓴 듯해요. 야구부 해체가 한 예로 보이는데, 순수 스포츠 클럽인 다른 학교 야구부와 달리 창신학교 야구부는 독립운동 모임의 한 축으로 본 거죠. 시대 흐름에 맞지 않는 창신학교 야구부 해체 이유가 바로 여기 있지 않을까 싶어요.”

소리소문없이 자취를 감췄지만 김 교사는 여전히 야구부가 창신학교 근원이라 믿는다. 부활을 꿈꾸는 이유도 이 때문.

“모든 정신 바탕에는 체력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창신학교 야구부를 세운 원동력이에요. 야구부를 넘어 창신학교 뿌리이기도 하죠.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고 봐요. 강인한 체력 위에 쌓인 학문은 더 빛을 발하지 않을까요.”

여기에 김 교사는 올해 또 다른 목표도 품었다.

“교장 선생님과 학교 역사관을 만들자는 이야기를 주고받았어요. 야구부는 물론 학교 전체 역사를 취합해 우리 뿌리를 확실히 하자는 취지죠. 창신학교를 빛낸 우수한 동문은 참 많아요. 그들 덕분에 창신학교도 건강히 이어올 수 있었죠. 역사라는 건 계속 관심을 두고 찾으려 해야 의미가 있잖아요. 창신학교에서는 학교 역사관 건립, 야구부 부활 등이 그 시발점이 아닌가 싶어요.”

 

김부열 마산의신여중 교사

창신학교는 1908년 개교 당시 ‘남녀 공학’으로 운영됐지만, 당시 여전히 깔려있는 유교사상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창신학교는 결국 여학생을 위한 별도 학교를 만들기로 했다. 이것이 1913년 4월 5일 개교한 마산의신여학교(현 마산의신여중)다.

그런데 1925년 3월 5일 마산의신여학교 교사 4명과 학생 14명이 진주를 찾는다. 이들은 다음날인 6일 오전 11시 진주시원여학교 운동장에서 이 학교 학생들과 야구 경기를 펼쳤다. 마산의신여학교는 난타전 끝에 48-40으로 승리했다. ‘우리나라 최초 여자야구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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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부열 마산의신여중 교사가 학교 역사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 최초 여자 야구 경기' 단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창언 기자

마산의신여학교는 이후 1939년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하게 된다. 그러다 1949년 의신여자고등공민학교로 다시 문을 열었고, 이후 1968년 지금의 의신여자중학교로 재탄생했다.

김부열(57) 마산의신여중 현 교사는 역사 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마산의신여학교 초대 교장은 호주 선교사인 ‘아이다 맥피(한국명 미희, 1881~1937)’였다. 이후 호주 여성 선교사 몇몇이 교장직을 이어가는데, 여자 야구와 관련해 특히 주목할만한 인물이 있다. ‘에디스 커(한국명 거이득, 1893~1975)’는 1924년부터 1927년까지 마산의신여학교 교장을 지냈다. 그는 이 시기 전후로 역시 호주 선교사 학교인 진주시원여학교 교장을 맡기도 했다. 즉 그가 1925년 여자야구 친목 경기를 펼친 두 학교 간 연결고리를 두고 있다. 김 교사는 이렇게 풀이했다.

“‘에디스 커’ 관련 기록을 찾아보면 한 가지 의미심장한 내용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에디스 커가 여성들에게 농구를 가르쳤다’는 설명과 함께 관련 사진 하나가 나옵니다. 사진은 치마 입은 여학생들이 작은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는 장면입니다. 여기가 정확히 어디인지 확인하지는 못했어요. 다만, 에디스 커가 마산의신여학교·진주시원여학교에서 근무했으니, 두 학교 가운데 하나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진주시원여학교 운동장 규모는 야구 경기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꽤 컸습니다. 다른 사진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죠. 이를 고려할 때 농구 장면은 마산의신여학교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즉, ‘에디스 커’가 여러 운동을 여학생들에게 가르쳤고, 그것이 1925년 3월 마산의신여학교-진주시원학교 간 야구경기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그렇게 추론해 볼 수 있다는 거죠.”

그는 ‘호주 선교사’, ‘인근 창신학교’, ‘열린 교육에 따른 개방·진취적 자세’ 등이 이 학교 여자 야구의 직·간접적인 동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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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년 5월 26일 마산구락부 운동장에서 열린 마산시민 대운동회 모습. /경남야구협회

“호주도 영국 지배를 받던 나라입니다. 그래서 호주 선교사들이 일제 강점기에 있던 우리나라에 좀 더 각별한 마음을 뒀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당시 의신여학교에서 여성 평등권을 심어주려 노력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남자가 하는 스포츠를 여자가 못할 리 없다, 우리도 해보자’는 분위기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3·1운동 이후 선진 문화에 대한 갈구도 컸던 것 같고요. 야구·농구와 같은 스포츠가 그 도구 가운데 하나일 수 있었던 게 아닐까요?”

김 교사는 ‘조선 최초 여자 야구 학교’라는 자부심 속에서 오래전부터 관련 기록을 추적해 왔다.

“과거에는 그러한 얘길 전해 들어 알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학교 선생님 한 분이 제주도 서귀포시에 있는 한국야구명예전당(1998년 개관, 이광환 전 LG트윈스 감독이 소장품 3000여 점 기증)에 갔다가, 전시된 동아일보 1925년 3월 14일 자 신문을 보신 거죠. 마산의신여학교-진주시원여학교가 국내 최초 여자야구경기였다는 걸, 현재까지 유일하게 증명하는 자료입니다. 진주시원여학교는 1939년 6월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했고, 한국전쟁 때 그 건물마저 불타 사라졌습니다. 우리 학교에도 안타깝게 야구 관련 기록은 전혀 남아있지 않습니다.”

박영주 지역사 연구가

현재 창원시 마산합포구 선거관리위원회 주변 육호광장 일대는 과거 마산구락부 운동장(약 3000평) 자리였다. 마산구락부 운동장은 지난 1921년 10월 6일 완공된 이후 1937년께 사라지기 전까지 당시 시민 체육·문화 활동 중심지였다. 특히 초창기 마산 야구의 터전이었다. 1922년 3월 28일에는 이곳에서 당시 마산야구계 거두였던 고 박광수·황의찬 선수 추도회가 거행되기도 했다.

훗날 2014년 ‘마산 야구 100년 기념 표지석’이 이 자리에 들어선 이유이기도 하다. ‘마산 야구 100년 기념 표지석’은 사진 3장과 함께 설명 글을 담고 있다. 이 지역 야구 줄기를 잘 함축해 놓았다.

‘이 운동장은 마산 야구와 마산 체육문화 발전의 기틀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야구는 일제를 이기는 힘을 기르기 위한 극일의 한 방도이자 민족교육의 일환이었다.’

이 글을 쓴 이가 박영주(60) 지역사 연구가다. 그는 마산구락부 운동장 의미에 대해 이렇게 풀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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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주 지역사 연구가가 1921년 10월 조성된 마산구락부 운동장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창언 기자

“마산은 이전까지 변변한 운동장 하나 없다가 1921년 마산구락부 운동장을 조성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범시민모금운동’을 펼쳤던 거죠. 이는 1919년 3·1운동 이후 시민 의식 영향도 있었다고 봐야죠. (마산체육사는 이와 관련해 ‘조선인의 일은 오직 조선인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조성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더구나 운동장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한 개인이나 행정당국에 맡기지 않고 공유재산으로 관리하고 활용했다는 사실도 특별히 다루어 기록해둘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운동장을 만들고 운영해 나간 일련의 과정을 관통하는 바탕은 ‘건강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정신이었습니다. 이 운동장은 야구 등 체육뿐만 아니라, 시민 행사, 금주·금연 캠페인 등 각종 장으로 활용됐습니다. 다만 정치집회는 많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산구락부 운동장은 1926년 ‘중앙운동장(지금의 마산 중앙동 장군천 인근)’이 들어서면서 조금씩 위축된 것으로 보인다.

“마산구락부 운동장이 조성될 때 일제가 노골적으로 방해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습니다. 다만 중앙운동장이 그러한 쪽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중앙운동장 주변에는 일본인이 많이 살았습니다. 아무래도 일제가 마산구락부 운동장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고 봐야죠. 실제 중앙운동장이 만들어지면서 마산구락부 운동장은 시들해진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이러한 흐름 속에서 ‘마산 야구’가 안고 있는 의미를 이렇게 풀이했다.

“야구는 개인 종목 아닌 협동을 필요로 하잖아요. 1914년 창신학교가 처음으로 야구부를 만들었는데, 이 학교에는 민족주의자가 많았습니다. 이후 일제 강점기 때 구성야구단이 활동했습니다. 조선 사람이 야구로 힘을 합쳐 일본을 이기려는 의미도 담겨 있었습니다. 그 내면에도 민족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죠. 즉, 마산 야구는 하나의 대중문화이면서도 민족주의 뿌리까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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