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할 때면 로스팅 집중, 일상 속 손님 이야기 '활기'
먹고살기 벅찬 하루지만 기쁜 일 기대하며 최선을

월요일 아침은 왜 이렇게 몸이 무거운지 모르겠다. 잔잔하게 울리는 알람이 반가웠던 적은 없다. 한 번에 일어나지 못하고, 몇 번의 예비된 자명종 소리를 들어야 몸이 겨우 움직인다.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오면 주말의 흔적이 남아 있다. 딸이 맞추다 만 퍼즐 조각이 널브러져 있고, 짝 잃은 양말이며, 작은 블록들이 놀이 매트 위에 듬성듬성 자리 잡고 있다. 정돈한 뒤에 출근하면 아내가 편할 텐데, 나는 그리하지 못한다. 그저 식탁에 비스듬히 앉아 빵을 씹어먹다가 집을 나선다.

카페에 들어서면 의무적으로 에스프레소를 몇 잔 마신다. 커피 맛을 잡기 위함이다. 나는 의식적으로 느리게 움직인다. 새벽은 잠이 덜 깨서 서두르면 어딘가 꼭 다치는 편이다. 몇 차례 원두 가루를 갈아서 버리고 맛을 본다. 그라인더 날의 간격을 조절한다. 이것을 몇 번 반복한다. 그것이 끝나면, 테라스의 문을 활짝 열고 의자와 테이블을 흔들리지 않게 배치한다.

열린 창으로 서늘한 새벽과 박하 향을 닮은 숲의 질감이 들어온다. 작은 공간 안에서 밤새 고여있던 공기에 천천히 생기가 돈다. 더불어 정신이 조금씩 든다. 내가 좋아하는 테라스에서 아메리카노와 남은 빵조각을 마저 먹는다. 오물오물하다 풀냄새 덕에 고개를 든다. 길 건너편의 산 사면으로 눈길이 자연스레 간다.

▲ 아내와 아이들. 정인한 시민기자

◇로스팅

꽃이 떨어지고 본격적인 봄이 시작된 것 같다. 초봄의 녹색은 다층적인 색감이지만, 5월이 되면 하나의 초록빛으로 수렴되는 느낌이다. 모든 잎이 적당히 두꺼워졌고 색들의 간격은 좁아졌다. 식생 고유의 특징들이 보이지만, 둥그렇게 표현해서 봄이라고 해도 좋을 경관이다. 나는 마음을 기울여 계절의 그늘에서 벌어지는 작은 생명의 움직임을 상상한다. 카페 안으로 날아 들어오는 풀벌레들과 이름 모를 새소리는 그것의 실마리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경쟁하고 협력하고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그린다. 먼 산을 바라볼수록 커피는 점점 줄어든다. 머그잔의 바닥이 보이면 기지개를 켠다.

아침 손님이 적은 날 로스팅을 한다. 초록의 생두는 향과 맛이 미미하다. 여기에 열을 가하면 화학적으로 물리적으로 변한다. 커피콩은 가열되면서 무게와 수분이 줄어들고, 부피는 팽창한다. 생명을 잃으면서 오히려 고유한 맛과 향을 내는 그 모습은 어떤 메시지를 주는 것 같다. 뜨거운 열기 속에서 부지런히 몸을 뒤집는 소리를 듣는다. 한참을 앉아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늘어져서는 곤란하다. 귀를 기울여야 한다. 원두마다 특성이 있고 원하는 향미를 위해서는 적당한 불 조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투입되는 온도와 배출되는 온도도 제각기 다르다. 몇 초 차이에도 제법 큰 변화가 생긴다. 매캐한 냄새를 맡으면서 귀는 콩의 팽창하는 소리에 집중한다. 원두의 변화를 상상하다, 이때다 싶으면 콩을 빠르게 식혀준다.

▲ 기차 안에서 그림을 그리는 아이의 모습. 정인한 시민기자

◇응원

그즈음부터, 손님들이 조금씩 밀려든다. 아침 손님들은 거의 고정되어 있다. 어떤 날은 그들이 커피를 사러 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응원을 해주러 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는 그저 커피 한잔을 건네는 것이지만, 손님은 다른 것을 준다. 건투를 빌어준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이런 반복적인 말이 나를 추동한다. 손님과 인사를 몇 번 주고받으면서 나는 어느새 진짜 바리스타가 되어간다. 그들의 언어가 내 몸에 차곡차곡 쌓이고 어느새 활기가 넘친다.

여유가 생기면 이야기를 더 주고받기도 한다. 서울에 유학 간 딸 이야기를 하며 지친 얼굴이 밝아지는 J, 시집간 딸들과 함께 이 공간을 종종 찾는 H를 보면서 내 삶이 확장되는 느낌을 받는다. 이렇게 지금 살아가지만 나도 머지않아 저런 시간이 오겠구나, 생각한다. 마음을 열고 손님에게 정성을 다할수록, 이 공간은 여러 삶을 관통하는 통로가 된다. 어떤 때는 몇 권의 책 읽는 느낌이고, 어떤 날은 시간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그래서 그럴까, 무더움도 견딜만하다. 한낮이 되면 밖은 초여름으로 변하고, 뜨거운 머신과 제빙기와 냉동고가 밀집된 바안은 한여름이다. 그래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신을 만지고 또 머그잔을 세척한다. 고될수록 함께 일하는 목소리를 신뢰한다. 나는 그것을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이것을 반복하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난다. 어느덧 조용하던 휴대폰에 알람이 울린다. 서온이의 어린이집 알림장이 도착한 것이다. 구석으로 가서 새로 올라온 딸의 사진을 본다. 화면을 넘기면서 나는 집이 그립다. 환하게 웃는다.

▲ 꽃을 든 채 활짝 웃고있는 아이. 정인한 시민기자

◇퍼즐 맞추기

딸들이 조금씩 커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작은 블록으로 그럴듯한 마을을 조금씩 짓는 느낌이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하면 생기발랄한 딸들의 의지가 지친 나를 압박하기 일쑤다. 저녁을 먹기도 전에 서우와 온이는 심심하다고 할 터이다. 허겁지겁 배를 채우고 밖을 향하는 날이 많다. 벌써 놀이터를 빙글빙글 도는 딸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네를 밀다 아파트를 보면, 같은 색의 조명이 층층이 빛난다. 비슷한 조도의 주광색 불빛들. 인테리어를 했어도 크게 다를 리 없는 삶. 가끔은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드라마를 주제넘게 상상하기도 한다. 울고 웃고 다투고 화해하고 사랑을 나누는. 우리 집과 비슷하지 싶다. 서툴지만, 담담하게 인생이란 퍼즐을 맞추어 나간다.

이렇게 하루가 간다. 흘러가는 일상 속에서 가족이 서로에게 온 마음을 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날이 먹고살기에도 벅차기 때문이다. 집에 오면 아무런 생각 없이 드라마를 보는 것이 더 기꺼울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는 밤이 오는 것이 싫었고 새벽에도 상대가 보고 싶어서 결혼을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서로에게 육박하여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오늘 저녁은 짝에게 마음을 기울여 보는 것은 어떨까. 그저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 따르면 되지 싶다. 달이 기울어, 또 어떤 기쁜 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다.

▲ 세일러복을 입은 아이. 정인한 시민기자



※본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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