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초대 마산상고 감독, "마산팀 선수들, 장례 상여 메"
"신마산 쪽 미국 사람들 많아 공 몇 개 얻으려 경기하기도"

김성길 옹은 1926년생으로 올해 만 93세다. 생존한 마산 야구인 가운데 가장 원로다. 그는 1940년대부터 1958년까지 마산팀에서 선수로 활동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운동을 좋아했는데, 특히 야구에 흥미를 느꼈다.

"9살 때 야구라는 걸 알았습니다. 1930년대 중반, 지금의 신마산 함흥집 근처 자리에 나카무라 광산 사무실이 있었습니다. 거기 사람들하고 철도역(마산역) 근무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야구 시합을 했어요. 장소는 '중앙운동장(지금의 마산 중앙동 장군천 인근)'이었어요. 경기 열린다는 얘길 들으면, 자산동에 살던 저는 걸어서 땀 뻘뻘 흘려가며 보러 가는 거죠."

그는 10살 때 동네 아이들과 모여 야구를 직접 했다. 주먹으로 고무공을 치는 '손 야구'였다. 그러다 마산상업중(현 마산용마고)에 진학하면서 배트 야구를 접했다.

"오쿠다라는 부기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이 분이 엄청난 야구광이었던 거죠. 이 선생님이 갑조·을조 2개 반에서 운동 좀 하는 애들을 뽑았습니다. 제가 갑조 주장 격이었습니다. 그때 소화 16년(1941년) 당시 우리 학교가 옛 로얄호텔(마산합포구 불종거리) 자리에 있었습니다. 부기 선생이 토요일마다 기숙사 운동장에서 야구를 시켰습니다. 그때 제 별명이 '오토바이'였습니다. 발이 빠르고 민첩해서 야구를 곧잘 했던 거죠.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평양전쟁이 터지면서 운동을 더 이어가지는 못했습니다."

▲ 김성길 옹은 마산 야구인 가운데 가장 원로다. 그는 긴 세월 속에서도 자신이 뛰었던 1940~50년대 마산군 야구팀에 관한 기억을 또렷이 하고 있다. 김 옹이 창원NC파크를 찾아 둘러보고 있다. /남석형 기자

그는 1945년 마산상업중을 졸업했고, 동양주조(이후 유원산업) 경리과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해 해방과 동시에 마산지역에는 직장별 야구팀이 꽃을 피웠고, 그 역시 잠시 뒤로했던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1946년 지역 대표 격인 마산군 선수로 뽑혀 10년 넘게 각종 전국 대회에 출전한다.

"타격은 그리 뛰어나지 않아 타순이 6번 정도였습니다. 대신 100m를 12초대에 뛰어 도루를 잘했죠. 수비는 중견수를 맡았는데 어깨가 강했습니다. 공을 잡아서 홈으로 던지면 일직선으로 들어갔죠, 허허허…."

당시 마산군 선수들은 유니폼을 광목(표백되지 않은 면직물)으로 직접 만들어 입었다. 하지만 재질이 떨어져 슬라이딩만 하면 유니폼은 찢어지기 일쑤였다. 이에 하얀 해군복을 뜯어 만든 일명 '양달령' 유니폼이 인기를 끌기도 했다. 선수들은 그 외 공·방망이 등과 같은 용품을 주로 미국인들로부터 얻었다.

"당시 야구공은 조금만 지나면 실밥이 터졌어요. 그러면 선수들이 집에 들고 가서 바늘로 깁는 거죠. 공이 그만큼 귀했으니까요. 신마산 쪽에 미국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이들과 종종 시합했습니다. 공 몇 개 얻으려고 경기를 하는 거죠."

김성길 옹은 가늠할 수 없는 세월 속에서도, 옛 기억을 또렷이 간직하고 있다. 당대 스타였던 박상권에 대한 기억이다.

"박상권 씨는 해방 직후 마산으로 돌아왔습니다. 1947년 초대 마산상고 감독을 맡았는데요, 남성동에 집을 얻어 선수들을 먹이면서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마산야구를 위해 희생하다, 1955년쯤이었나, 40대 때 폐병으로 저세상에 갔죠. 당시 마산군 선수들이 유니폼 입고 상여를 멨습니다. 그렇게 남성동 집에서 출발해 창동·성호동을 거쳐 서원곡 근처 화장터까지 갔죠."

그는 선수 생활 은퇴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 당시 무학국민학교 감독을 10년 넘게 맡았다. 보수도 없이 아침·저녁 시간 될 때 학교를 찾아 가르치는 식이었다. 그는 1984~1985년 경남야구협회장을 끝으로 현장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뜻밖의 얘기로 대화를 맺었다.

"우리 때 야구공은 비 맞으면 가죽이 늘어나 '덜덜덜' 소리를 냈습니다. 지금은 얼마나 깨끗하고 좋은지, 너무 좋아요…. 지금 제일 부러운 게 야구공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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