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독립 강화 시스템 밑바탕
첫해부터 굵직한 특종 쏟아져
도민 목소리 1면에 바로 싣기도

◇미디어 전문 매체의 관심을 끌다

<경남도민일보>는 창간과정에서부터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창간 이후에도 언론 독립을 강화한 시스템과 보도행태로 관심은 지속됐다. <미디어오늘>은 1999년 5월 20일 자에서 <경남도민일보>가 국내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언론비리고발센터를 개설했다고 보도했고, 오마이뉴스와 MBC 등에서도 창간 과정을 다뤘다. <기자협회보>는 6월 1일 자에서 "도민주주 형식으로 창간한 도민일보가 언론개혁 시리즈와 기자조판제 도입, 주재기자 대신 파견기자제를 도입해 신문을 발행한다"고 실었다.

이후에도 개혁언론 실천과 보도 내용은 미디어 전문 매체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촌지수수를 완전히 봉쇄하고 불가피할 때엔 사회시설에 보낸다는 내용, 제2의 노근리 사건 마산 곡안리 민간인학살, 언론사 첫 벤처기업 선정, 계도지 폐지 운동 등이 소개됐다.

◇참언론 기치 두드러졌던 1999년

언론개혁시리즈 연재, 민간인학살 사건 조명, 노산 이은상 실체 집중 보도, 계도지 폐지 앞장 등 굵직한 어젠다를 이끌었던 해였다.

<경남도민일보>는 창간호에서부터 언론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시리즈 연재를 시작했다. 먼저 도민에게 한 21가지 약속을 실천하는 차원에서 5월 14일 사원윤리강령을 제정, 공표했다. 독립언론 수호, 도민 밀착 보도, 잘못된 관행 타파, 금품수수 배격, 윤리위원회 운영 등을 담았다.

10월 4일 곡안리 민간인 학살 사건을 특종했다. 이 사안이 보도되면서 전국적 관심을 모았으며 나아가 영국 BBC에서 취재하기도 했다. 이는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기본법 제정에 영향을 미쳤고 2006년 진실화해위원회를 출범케 하는 계기가 되었다.

1차 주주모집 7개월 만인 10월 20일, 제2차 신주를 발행해 20억 원의 자본금을 채우고 주주 역시 6300여 명을 확보했다.

'가고파'의 시인이자 한국 문단의 거목으로 불린 노산 이은상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11월부터다. 11월 5일 1면에 '이은상 기념할 만한 인물 아니다'라는 제하에 이은상의 친독재 부역 문제를 언급했다. 이 논쟁 끝에 결국 '노산문학관'으로 하려던 문학관을 '마산문학관'으로 명명하게 만들었다.

11월 9일 국내 언론사상 처음으로 경남중소기업청으로부터 벤처기업에 선정된 사실은 기록할 만하다. 11월 27일 도내 시군의 계도용 신문이 주민 혈세를 축낸다는 보도에 이어 29일 1면에 '경남도민일보 계도지 넣지 않습니다'라는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계도지 근절 운동의 신호탄을 올렸다. 한 달 후에는 도내 30여 단체가 철폐 운동에 동참하는 등 분위기가 급속도로 확산했다. 계도지 폐지 이슈는 이듬해에도 지속했고 그 결과 도내 모든 시군에서 계도지 예산을 삭제하게 되는 결과를 끌어냈다. 2000년 말, 경남민주언론시민연합과 경남도민일보 10대 뉴스에도 포함됐다.

▲ 1999년 5월 11일 발행된 <경남도민일보> 창간호.

 

◇2000년 변화와 안정, 깊이를 모색하다

새천년이 시작되는 2000년엔 1월 1일 신년호 신년사에 '통일염원'을 담았다. 이러한 기대감은 6월 15일 공동선언에 이어 10월 13일 김대중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으로 더욱 고조되었다. 그러나 이후로 통일 문제는 정권의 변화에 따라 명암이 엇갈리는 길을 걷게 되었다.

언론개혁 문제는 멈출 수 없는 과제임을 3일 자에 실린 신년특집에서도 알 수 있다. '언론개혁 이것부터'에는 '언론 부패고리 사전 차단' '관행적 촌지 거부의 실천' '취재 시스템 획기적 개선' '안정적 수입원 계도지 거절' '보도·논평 비판 겸허히 수용' '올바르고 건전한 토론 제공' 등을 실천할 것임을 기사를 통해 밝혔다.

2000년 5월 창간 1주년은 <경남도민일보>에 큰 의미가 있는 날이었다. 창간 전부터 줄곧 따라다녔던 소문의 꼬리표를 마침내 끊는 순간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소문의 진원지는 알 수 없지만 "오래 가봐야 3개월" 그러던 것이 6개월을 넘기자 "1년 내 문 닫는다"는 말들이 기자들의 동선을 따라다녔다. 9일 마산가톨릭여성회관에서 열린 '창간 1주년 평가회'에는 주주와 독자 100여 명이 참석해 지난 1년을 평가했다.

창간 전부터 임시로 운영해오던 홈페이지를 5월 14일 비로소 정식 사이트로 개설했다. 창간 1년 만에 비교적 일찍 인터넷 서비스를 시작한 데다 홈페이지 운영을 적극적으로 펼쳐 인터넷이 강한 신문으로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6월 10일 청소년합창축제가 처음으로 창원 성산아트홀 대극장에서 개최된다. 올해 20회를 맞는 행사의 역사적 순간이었다. 첫 회 참가합창단은 창원경일고, 마산여고, 창신고, 진해여고, 그리고 해군진해기지사 군악대가 특별출연했다.

초창기 <경남도민일보> 1면에는 전국 어느 신문도 시도하지 못하던 독특한 코너가 있었다. '들어봅시다'. 신문 1면에 직장인, 주부, 학생 등 다양한 도민의 목소리를 직접 담아내는 코너였다. 그것이 모여 6월 13일 책자로 발간됐다. 8월 6일 시작한 '낙남정맥 종주 대장정' 역시 기사가 책으로 나온 사례다. 낙남정맥 종주 트레킹은 9개월간의 긴 여정 끝에 이듬해 5월 20일 지리산 영신봉에 올라 종지부를 찍었다. 총 20회 지면에 실린 이 트레킹 과정은 2006년 이수경 기자가 <아줌마 기자, 낙남정맥에 도전하다>라는 제목으로 출판됐다.

<경남도민일보>의 여러 독특한 시스템 중 대표적인 게 '지면평가위원회'다. 지면평가위원회는 4월 주주대표 기관인 자문위원회와 사원주주회의 공동추천으로 구성됐고 8월 7일 첫 회의를 열었다. 한국언론사상 유일한 정관상 독립기구이기도 하다.

2000년은 <경남도민일보>에 변화가 많았던 해였다. 어쩌면 가장 큰 사업이었을, 양덕동 현 사옥으로 이전한 것이 그해 10월 1일이었다. 텅 빈 사무실에 하나둘 집기가 들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창고에서 시작하는 기분으로 의기투합했던 창간시절과 그 후 1년여. 이렇게 일찍 번듯한 사옥을 갖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다음 날인 10월 2일, <경남도민일보>는 지면을 4면 늘려 20개 면으로 발행하면서 지역신문으로서 제대로 정보를 담아낼 그릇을 마련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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