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 서정 시인이었던 스님의 깨달음의 노래

blank-1298178.png

<서산대사 선시집(禪詩集)>을 처음 본 것은 꼭 15년 전, 창원 불모산 곰절이다. 절집 서가에서 얻어 본 서산의 시는, 오도송(悟道頌)으로 불리는 선시(禪詩)나 게송류의 번거로움보다는 서정적인 정취가 한껏 풍겼다. ‘시인은 통달함이 적고 궁함이 많다詩人少達而多窮(시인소달이다궁)’는 옛말대로라면 그는 오히려 시인에 가까운 스님이었다고 할까. 하지만 스님은 선과 교를 아우른 큰 깨달음과 수행으로 우리 불교 일천오백 년사에 손꼽힌 분이다. 그런 스님이 헤어짐이나 흥망을 걱정하거나 삶의 덧없음 따위, 인지상정을 읊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아이러니였다.

“밤비는 솔 평상 울리는데夜雨鳴松榻(야우명송탑) / 푸른빛 등불은 제 홀로 밝구나靑燈獨自明(청등독자명) / 넓은 하늘이 한 장의 종이더라도長天爲一紙(장천위일지) / 이 속마음을 다 적긴 어려우리難寫此中情(난사차중정)”. 전형적인 서정시의 표현이 뚜렷하다. 또 “국화는 웃으려하는데菊花將解笑(국화장해소) / 머리털은 가을이로다頭髮不禁秋(두발불금추)”. 꽃이 막 피려하는데 서리 맞은 듯 귀밑머리가 희끗해진다는, 누구나 나이 들면 느낄 수 있는 비가(悲歌)다.

서산은 폐불(廢佛)의 시대를 살았다. ‘법광사(法光寺)를 지나며’라는 시에는 “온갖 금빛불상 이끼와 먼지로 덮이어 있으니苔塵萬佛金(태진만불금) / 선객의 눈물을 알아야한다定知禪客淚(정지선객루)”라 하여 불교를 탄압하고 승려까지 없애려 한 이씨왕조의 남루한 절 풍경을 담담히 묘사했다.

‘두견새 소리를 듣고’란 한 구절엔 “봄 가자 산꽃 떨어지고春去山花落(춘거산화락) / 두견이 사람더러 돌아가라 하네子規勸人歸(자규권인귀)” 늦봄의 낭만과 풍자가 교차하고 있다. 여기서 선시류의 언어도단(言語道斷)과 난삽함은 찾기 어렵다.

서산은 선승(禪僧)이다. 우리 불교의 계보를 고찰한 퇴옹 성철의 논문 <한국불교의 법맥(法脈)>은 그가 차지한 불교사의 위치를 이렇게 적었다. 태고는 석옥의 법을 이어받아 그것을 환암에게 전하고, 환암은 그것을 구곡에게 전하고, 구곡은 정심에게, 정심은 지엄에게, 지엄은 영관에게 전하였으며 영관은 이를 서산에게 전하니, 이것은 실로 임제의 정통법맥이니 오직 서산대사가 홀로 그 종지를 얻었다.太古는 嗣石屋而傳之幻庵하고 幻庵은 傳之龜谷하고 龜谷은 傳之正心하고 正心傳之智嚴하고 智嚴은 傳之靈觀하고 靈觀은 傳之西山하니 此實臨濟之正脈而唯西山이 獨得其宗하니라 -休靜碑 李廷龜 撰, 仁祖八年 1630

성철스님의 주장대로, 불교의 법통은 석가부처가 가섭에게 그 깨우침을 마음으로 전한 이래로 인도에서 28대로 이어져 달마스님까지 왔고, 달마는 다시 중국에 이 법을 전해 육조 혜능(六祖 慧能)을 기점으로 선종의 황금시대가 열렸고 그 법맥은 당·송대 이후 연연히 이어졌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의 스님인 태고 보우(太古 普愚)선사가 중국에 건너가 임제종 18대 법손인 석옥石屋 淸珙(석옥 청공)스님의 인가를 얻어 그 법을 해동(海東)에 가져왔음을 ‘휴정비’는 기록하였다. 즉 성철은 “심법을 잇고 등불을 전함嗣法傳燈(사법전등)은 몸소 수기記莂(기별)로 이루어져 그 혈맥(血脈)이 상승(相承)”한 중요성을 이르고, 서산이 부처의 심법을 이은 적손임을 논증한 것이다.

서산은 말 그대로 자기의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룬見性成佛(견성성불) 일대 선사였다. 그러한 그가 곤궁한 시인의 회포와도 유사한 ‘슬프고 애절한 노래’를 곳곳에서 읊을만한 이유는 없었다. 노산 이은상은 그의 <서산의 문학>에서 “사(師)는 절륜한 천재로서 영감(靈感)의 시품(詩品)을 이루었다. 서산시의 특색을 말하면 ‘그의 시를 사상으로 보기에는 말이 너무 문학적이요 또 그것을 단순히 서정(抒情)으로 보기에는 뜻이 너무 깊다”고 평했다. 서산시는 구절마다 문학적 색채가 짙은 데다 선처(禪處)의 깊이마저 잴 수 없어 ’이것이 불가(佛歌)다, 저것은 서정시다‘라며 둘로 쪼개기 어렵다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서산은 타고난 시재를 가졌고, 게다가 선불교 종장(宗匠)의 자리에 올랐기에 그의 문학은 여타 선시(禪詩)와는 완연한 차이를 보였다고 해야 옳은 말일 것이다.

노산이 국역한 ‘유회(有懷)’. “달은 저 새벽인데 베갯머리 냇물소리, 새들은 무삼 일로 밤새도록 저리 우나落月五更半(낙월오경반) 鳴泉一枕西(명천일침서) 如何林外鳥(여화임외조) 終夜盡情啼(종야진정제)” 또 스님 벗이었던 봉래 양사언에게 쓴 시. “가을바람 옷 날리고 잘 새 바삐 날아들 제, 임은 안 오시고 빈산에 달이로다秋風兮吹衣 夕鳥兮爭還 美人兮不來 明月兮空山” 이 구절에 대해 노산은 “그는 이러한 우정이라는 것으로써 번뇌의 한 끝을 위로하기로 했던 것이다”라는 주옥같은 평석을 달았다.

서산은 일찍이 머릴 깎았고 약관에 이미 한 경지를 얻었다. 벗을 찾아가는 길, 남원에서 낮닭 울음을 듣고 “머리털은 희어도 마음은 늙지 않네髮白非心白(발백비심백)”라는 일게(一揭)로써 대장부 할 일을 마쳤노라 했다. <능엄경>에서 부처가 아난에게 갠지스강을 가리키며 ‘얼굴은 늙었지만 저 강물을 보는 본래 자성(自性)은 변함이 없다’고 한 말씀을 극진히 체득한 것일 게다. 대사는 법명을 휴정(休靜), 스스로 청허자(淸虛子)라 하고, 서쪽 묘향산에 오래 머물러 서산(西山)이라 불렸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