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응원 업고 후회 없는 대학 생활 해야지요”

우리 나이로 예순여덟인 어머니 강은옥 여사는 올해 대학에 입학한 늦깎이 대학생입니다. 사실 기자로서 어머니를 인터뷰한다는 게 맞는 것인지 어색하고 두려웠지만, 마흔 넘도록 제대로 몰랐던 어머니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독자께 전하고 싶었습니다.


Q.대학생활은 재미있으세요?

“응, 재밌지. 나 말고도 나이 많은 동기가 있어서 같이 도시락도 먹고 사진도 찍고 재밌네. 아침에는 네 아버지가 학교까지 태워 주시고 마칠 때는 네 형이 사준 등산 스틱 가지고 집까지 살살 걸어와. 한 30분 정도 걸리네. 그래도 재밌어서 다닐만해.”

Q. 입학식 못 가서 죄송해요. 그런데 장학금을 타셨더라고요?

“그러게 나이가 제일 많다고 장학금을 주네. 젊은 학생도 요즘 학교 다니기 어려울 텐데 나이로 뺏은 것 같아서 미안해. 다음에는 나이 말고 제대로 실력으로 받아야지. 이래 봬도 중학교 다닐 때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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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가 월남전 참전 때 받은 편지. 어머니의 편지일까?

어머니는 고등학교를 1학년까지 다니다가 중퇴했다. 초등학교 교감이던 외할아버지는 도서지역 학교로 전근이 잦았다. 그런 외할아버지를 따라다니다 보니 어머니는 중학교 입학도 또래보다 한해 늦었고, 고등학교도 한해 늦게 들어갔다. 어머니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67년. 당시 여러 학교에서 단체로 월남에 참전한 국군 장병에게 위문편지를 보냈다. 어머니도 위문편지를 써서 보냈다. 당시 어머니는 상상했을까? 그 편지 한 통이 자기 운명을 바꿀 것을.

Q. 아버지는 어떻게 어머니 편지를 받았어요?

“(아버지) 그때 내가 전투 참가하고 부상을 당했을 때니까 5월이었나? 부상을 치료하고 정보과에 있었어. 주로 하는 일이 국내에서 오는 편지, 위문편지 분류해서 나눠주고 하는 일을 했어. 그때 딱 눈에 들어오는 편지가 있더라고. 당시 우리 집이 창원군 웅남면이었고, 너희 엄마는 가덕도에 있었으니 당시는 같은 창원군 웅동면이라 눈에 딱 들어왔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계속 펜팔을 했다. 아버지는 월남에서 돌아왔고 가까이에 있는 어머니를 만나러 가덕도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아직 어린 중학생이었고 주위 친구들과 편지 내용을 서로 공유했기 때문에 당시에는 연인으로 발전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중학교 때 공부를 잘했지만 고등학교를 재수했다. 교사이신 외할아버지 월급으로 살림이 빠듯했는지 외할머니는 장사를 했고, 그 장사가 실패해 집안이 혼란스러워 원하는 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당시 재수를 준비하면서 무학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사촌 집에서 지냈다. 인연이라는 게 참 얄궂게도 아버지 또한 사촌 누나 일을 거들며 돈을 벌고자 고향 창원서 나와 마산 3·15 탑 근처에 살게 되었다. 어머니는 가족과 떨어져 친척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다 보니 많이 외로웠는지 왔다 갔다 하며 아버지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Q. 두 분 결혼하실 때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있는 걸로 아는데요?

“재수를 끝내고 고등학교에 입학을 하긴 했어. 중학교에서 1년 늦어져, 거기다가 고등학교에 재수를 해서 들어가니 동기들보다 두 살이 많았지. 출생신고도 1년 늦어졌으니 실질적으로 따지면 3살이 많은 거야. 내가 어색했는지 동기들이 어색했는지 학교에서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 못했어. 요즘 말로 아싸(아웃사이더)라고 하나? 백지 시험지를 내기로 했는데 나이도 있고 해서 동참을 안 했으니 딱 아싸였지. 학교생활에 적응도 안 되고 네 아버지에게 더 맘이 갔던 거 같아. 둘이 같이 있고 싶었는데 나름 우리 집이 교육자 집안이라 학교를 그만두려는 걸 엄청나게 반대하셨지. 결국, 그냥 네 아버지와 인천으로 야간열차를 타고 도망을 간 거지.”

Q. 사랑의 도피처로 인천을 택하신 이유는요?

“서울은 안 가본 데라서 두려웠고 인천에 네 아버지가 펜팔로 알던 누나가 있었어. 같은 성씨라고 또 인연이 닿았나 봐. 제대하기 전에 알던 사이였는데 그 인연으로 거기에 자리를 잡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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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을 낳고 1972년 뒤늦게 인천 주안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손유진 기자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천에서 형을 낳았다. 아버지는 결혼 허락받으려고 천주교 세례를 받으셨다. 어머니 집안이 대대로 내려오는 독실한 천주교 신자 집안이라 세례를 받아 외할머니께 인정을 받으려 했다. 두 분은 인천에 있는 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사랑의 도피(?)는 그렇게 막을 내려 마산으로 돌아왔다.

마산에서 아버지는 고물상 일을 하셨다. 그래도 당시 일이 잘 풀렸는지 아버지와 어머니는 테니스를 했다. 당시 마산 시내에서 테니스를 하던 사람은 남녀 합쳐 100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꽤 여유 있었나 보다.

Q. 왜 계속 테니스를 하지 않으셨어요?

“네 아버지가 사업을 그만두고 중국요릿집을 했어. 둘이서 장사를 하다 보니 좀 많이 바빴지. 당시에 주방장을 두고 장사를 했는데 월급날 다음 날만 되면 안 오는 거야. 월급만 받으면 그 길로 노름을 하러 가곤 했으니. 네 아버지가 주방장 찾으러 다니는 게 일이었어. 결국, 내가 요리를 배웠어. 당시 면 뽑는 기계도 없을 때인데 하도 답답해서 직접 수타로 면 뽑는 법까지 배웠어. 나이가 들고 어깨가 아파서 그렇지 지금도 자장면 몇 가닥은 뽑을 수 있을걸?”

어머니는 영화광이다. 한 번은 그동안 모아둔 영화 티켓과 전단을 보여줬다. 여행용 가방에 보관할 만큼 스릴러, 드라마, 코미디, SF, 히어로물 장르 가릴 것 없이 영화라면 너무 좋아한다. 최근 극장에서 어머니와 만난 적이 있었는데 같은 영화를 보러 온 것도 놀랐지만 바로 내 옆 좌석이라 더 놀랐다. 대중교통으로 멀리 떨어진 극장에 다니는데 마침 부모님 댁 바로 옆에 내년에 극장이 개관한다고 하니 엄청나게 좋아하신다. 아마 극장이 가까워 일주일에 두 편씩은 보실 듯하다.

Q. 이 많은 영화 중에서 감명 깊게 보았던 영화는 뭔가요?

“너무 많이 봐서 그런가? 보고 나면 이야기를 잘 까먹어서 특별히 감동을 한 영화를 꼽기는 그렇네. 기억나는 영화를 고른다면 어린 시절에 네 외할머니 돈을 훔쳐서 몰래 영화를 봤는데 하필 본 영화가 배우 이덕화 아버지인 이예춘이 교주로 나온 <지옥문>이란 영화였어. 무서운 영화를 본데다 몰래 돈을 훔친 죄책감에서인지 그날 밤에 악몽을 꾸고 식은땀을 흘려 한밤에 병원까지 갈 뻔했다더라고.”

Q. 그 연세에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기 어렵지 않으셨나요?

“나도 고등학교를 다시 가볼까 싶어서 처음에는 방송통신고를 알아보려 했어. 그런데 한 달에 두어 번씩은 나가야 하고 3년 다녀야 한다더라고. 중학교 서류까지 준비해서 도전해 보려고 했는데 3년은 좀 부담스러운 데다 결석도 두 번 이상하면 안 된다더라고. 그래서 포기하고 고졸 검정고시를 준비하려 했지. 네 형수보고 책 한 권 사달라고 해서 펴 봤는데 너무 깜깜한 거야. 하나도 모르겠더라고. 그래서 책을 던져놓고 안 보다가 시험 30일 두고 자세히 보기 시작했지. 그런데 내용이 점점 눈에 들어오는 거야. 이게 성적이 은행 식이라고 하는데 운이 좋았던 건지 한 번에 붙었어. 50년 만에 펴본 책인데. 쇠뿔도 단김에 뽑으라고 검정고시 통과한 김에 가까운 마산대학에 특별전형으로 합격하게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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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은옥 여사. /손유진 기자

Q. 이번에 입학한 대학 전공이 '아동 미술 교육과'인데요? 특별히 그 과를 선택하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7년 전인가? 8년 전인가? 내서 문화포럼 ‘예그리다’라고 취미로 그림을 배우는 모임이 있는데 집에서 가까운데 생겨서 참석하게 되었어. 해마다 전시회도 가지고 상도 몇 개 받고 그러니까 욕심이 생겼나 봐. 네 외할머니가 전문적으로 그림을 배운 것도 아닌데 심심풀이로 조각도 하고 그림도 그리고 했거든. 내가 그 소질을 물려받았나 봐. 너나 네 형이나 그림 그리는 것 보면 확실히 물려받은 것 같아. 뒤늦게 발견한 소질인 것 같은데 졸업하면 이 소질을 써먹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손자 같은 애들 돌보며 그림도 가르치고 그러려고.”

지난달 함안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지나는 길에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영화를 보여드리려고 연락했다. 어머니는 '신입생 환영회'가 있어서 합성동에 나간다며 영화 관람을 미뤘다. 어차피 극장에 모시고 가려고 한 김에 합성동 신입생 환영회 자리에 어머니를 태워 드렸다. 주점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누구보다 씩씩했다.

게다가 제주도로 2박 3일 엠티까지 다녀왔으니 세 살 차이 동기와 못 어울리던 10대 때와 많이 다르다. 40년 넘게 차이 나는 동기들과 잘 어울리니 학교생활 적응은 정말 잘하는 듯하다.

Q. 마지막으로 학교 공부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 없으세요?

“우리 채연이(큰 손녀)도 마찬가지고 그 또래 대학생들은 졸업 후에 취직이라는 목적 때문에 많은 고민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고 있겠지. 어떻게 보면 요즘 젊은 애들에 비해 학점에 대한 부담이 없이 학교생활을 하는 것 같아 미안하기도 해. 그래도 그냥 대충대충 하기는 싫어. 얼마 만에 다니는 학교인데? 사실 네 아버지나 너희가 남세스럽다고 못하게 말렸으면 도전을 안 했을 거야. 그런데 누구 하나 그런 말 없이 열심히 해보라고 응원해 주니까. 가족들이 이렇게 지지해 주는데, 온 힘을 다해 열심히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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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화 '동강 할미꽃'. 할미꽃을 그린 어머니의 작품. /손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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