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후인 1934년 12월 2일, 조선어학회는 임시총회를 열어 두 번째의 중요사업으로 표준어 사정문제를 결의하고 이극로, 이윤재, 이희승, 이병기, 최현배, 김윤경, 백낙준, 안재홍, 이태준 등 40명의 사정위원을 선정하였다. 표준어 사정위원들의 수차례에 걸친 독회를 거쳐 16인의 수정위원회를 통하여 수정한 다음, 30명을 늘여서 70명으로 확대된 사정위원회에서 또다시 독회를 하였다. 이 70명은 지역적 안배와 교육, 종교, 언론계 등 각계각층 인사를 망라하였다. 영화 ‘말모이’에서는 전국에서 모여들어 영화관에서 공청회로 진행하다가 경찰의 방해로 해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노산과 1925년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같이 공부한 양주동, 염상섭도 포함되어 있는데 노산은 이 명단에 포함되어있지 않다. 이후 25인의 수정위원회를 거쳐서 3명이 늘어난 73명 사정위원회의 독회 그리고 또다시 수정위원회를 거쳐서 1936년 10월 28일 한글날에 표준어 사정안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의 국어 상용화 정책이 더욱 강압적으로 진행되어 조선어학회는 대중 집회를 금지당하였다. 표준어 보급은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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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날을 가갸날이라고 부를 때의 잔치행사. /전점석

일제는 한글날 행사를 금지하고 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을 폐지했다

그런데 조선어학회가 표준어 사정을 위해 노력하는 동안에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진행하는 사전편찬 작업은 재정 문제로 1933년 6월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다행히 이극로의 노력으로 1936년 사전편찬후원회가 조직되어 활동해오다가 1936년 3월 20일, 조선어사전편찬회는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그동안 추진해온 사전편찬업무를 조선어학회로 인계하였으며, 어학회는 사전편찬을 완성하기 위한 체제로 개편되었다. 4월 1일부터 이극로, 이윤재, 정인승, 이중화, 한징 등 5인이 조선어사전편찬 전임 집필위원이 되어 원고 집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평생 사전편찬을 위해 노력한 정인승은 외솔 최현배가 직접 집으로 찾아와서 권유하여 사전 편찬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 1936년 봄부터 사전 편찬위원 6인은 이극로, 이윤재, 최현배, 정인승, 이중화, 한징 이었다가 나중에 이윤재, 최현배가 휴직하고 권승욱, 정태진이 참여하였다.

한편 한글날은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매년 9월 29일에 행사를 진행해왔는데 처음에는 명칭이 ‘가갸날’이었다. 신문보도를 통해 가갸날을 안 만해 한용운은 너무나 반가워서 1926년 12월 7일 자 동아일보에 ‘가갸날에 대하여’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그는 가갸날에 대하여 ‘오래간만에 문득 만난 님 처럼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기쁘면서도 슬프고자 하여 그 충동은 아름답고, 그 감격은 곱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1937년부터 일제는 한글날 행사를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이 당시 조선어학회 간사장은 이극로였으며 간사는 최현배, 이윤재, 이희승, 정인승, 이만규, 이강래 등이었다. 환산은 1935년부터 1937년 6월까지 5, 6, 7대 출판부 간사로 일하고 있었다. 일제가 본격적인 중국침략을 앞두고 진행한 민족주의 단체 회원들을 예비검속하는 과정에서 1937년 6월 7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김윤경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되었다가 다음 해인 1938년 7월 29일 보석으로 출감하였다. 그런데 이때부터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학교에서의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고 1943년, 제4차 조선교육령에 의해 아예 공사립학교에서 조선어 교육과목이 폐지되어 한글이 학교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민족진영에서는 조선어학회 활동을 경외(敬畏)하고 있었던 만큼 일부 회원의 일탈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어느 회합 장소에서 만해 한용운은 물불 이극로를 만났다. 당시 이극로는 일제의 강권에 못이겨 학도병 출정을 권유하는 연설을 한 일이 있었다. 만해는 “물불, 더럽게 되었군”이라고 말했다. 그 뜻을 알아채고 조선어학회를 살리기 위해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변명하는 이극로에게 “어찌 그리 어리석으오. 그것이 오래 갈 것이냐 말이요. 죽으려면 고이 죽어야 되지 않겠소”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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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어학회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한글 맞춤법통일안. /전점석

노산은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발기취지문 작성

노산은 조선어학회의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과정, 표준어 사정과정에서 구성된 각종 위원회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다만 사전편찬 작업의 초기 단계인 계명구락부에 잠깐 참여하였을 뿐이다. 이희승에 의하면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인하여 노산이 1942년에 체포된 것도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의 발기취지문 때문이었다고 한다. 단, 조선어학회의 책임 맡은 위원은 아니었지만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환산의 요청이 있을 때에 도왔을 가능성은 있다. 이 같은 정황은 같은 시기에 노산이 몸담았던 직장과 국토순례 활동을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노산은 일본에서 돌아온 직후인 1928년 6월부터 계명구락부 조선어사전 편찬위원으로 16개월간 일을 한 후 1929년 10월부터 1931년 3월까지 <신생>지 편집장을 지냈다. 29살인 1931년 4월부터 만 1년간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 교수로 일하게 된 노산은 환산이 <성웅 이순신>을 출판하는 일을 거들었다고 한다. 노산은 이미 <신생>지에 있을 때인 1930년부터 시작한 다섯 번의 금강산 탐방과 황해도의 묘향산, 정방산을 오르는 국토순례를 하고 동아일보에 ‘史上 로맨스’라는 제목의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였고 이것을 모아서 1931년에 <조선사화집(朝鮮史話集)> 삼국시대편과 <묘향산유기(妙香山遊記)>를 펴냈고 다음해인 1932년에 금강시를 위주로 한 <노산시조집>도 발간하였다.

이희승은 노산이 그만둔 직후인 1932년 4월부터 10여 년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였다. 이희승 자서전에는 조선어학회에 참여한 위원수와 명단을 종류별, 시기별로 자세하게 열거해놓았는데 각종 위원 명단에서 노산의 이름은 찾을 수가 없다. 의외이다. 1929년부터 1938년까지 <신생>지, 이화여전, 동아일보, 조선일보에 연이어 근무하면서 왕성한 국토순례와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어학회가 같은 시기에 진행한 한글맞춤법통일안, 표준어 사정, 조선어사전 편찬 작업에 중심적으로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가 그의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었다. 그러나 이윤재와의 관계는 계속되고 있었다. 1934년 5월 7일에 창립한 진단학회(震檀學會)의 24명 창립 발기인에는 이윤재와 함께 이은상도 참여하였다. 동아일보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이윤재는 이 단체의 6인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노산은 3년 후인 1937년 3월 3일에는 조선어학회 안에 설치한 조선기념도서출판관에도 참여하였다. 조선일보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이 출판관은 김성수, 이윤재, 이극로, 이은상, 이종린, 안재홍, 이인 등의 각계 인사가 참여하여 조직하였다. 관장은 이인이었다. 이은상이 작성한 출판관 창립취지서에 의하면 ‘기념출판은 인간의 길흉대사에서 과분한 허례허식으로 소모되는 자금을 경제적으로 어려워 간행이 불가능한 도서출판에 출자할 수 있도록 알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인의 부모회갑 기념으로 1938년 1월 김윤경의 <조선문자 급 어학사>, 오세억의 결혼기념으로 노양근의 <날아다니는 사람>을 각각 출판하였다.

조선어학회는 출판사업뿐만 아니라 장래 민족사업에 유용한 국가적 인재를 양성할 교육기관인 조선양사원(養士院)을 설치할 계획을 추진하였다. 1934년부터 이극로, 이인, 안호상, 이은상 등이 안암동 안호상 집에 모여서 의논하였고, 1936년에는 이윤재, 이은상의 주선으로 황해도 안악군의 유지인 김홍량과 출자에 관한 교섭을 진행하였고, 어학회 후원자 이우식과도 교섭이 진행되다가 태평양전쟁 발발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중단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노산은 일제의 눈 밖에 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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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어학회의 표준어 사정위원들의 모습. /전점석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징역을 살다가 1심에서 출소한 환산은 외래어표기법통일안을 완성하여 1940년 6월 25일에 발표하였다. 외래어표기법은 1931년 1월 24일 각계인사 45명으로 협의회를 조직하고, 책임위원 3명을 뽑아 그동안 작업을 진행해온 일이었다. 출소한 환산은 대동출판사에 근무하면서도 계속해서 조선어사전 어휘 주해작업을 하였고, 사전편찬 원고의 일부를 출판사에 넘겨 조판까지 해놓았다. 그리고 불구속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 재판은 계속 진행되다가 1941년 11월 17일 자로 고등법원에서 관련자 36명 전원이 무죄판결을 받았다.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의 전면적 확대와 함께 1938년 지원병제도를 실시하였고, 1941년 태평양전쟁의 시작과 함께 1942년 징병제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징병제는 일제의 입장에서는 조선인을 전면적으로 동원하는 것이므로 위험이 따르는 중요한 문제였다. 당시는 의무교육이 아니어서 청년의 절반은 보통교육도 받지 않은 상태여서 원활한 군사교육을 시키기가 곤란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이들을 대상으로 미리 황혼교육(皇魂敎育)을 실시할 필요성이 절실하였다. 미리 국민총력조선연맹에 의해 일어 보급운동을 국민운동 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됨에 따라 이 운동은 ‘영예로운 황군이 되자’는 표어가 나붙으면서 그 준비의 일환으로 일어를 빨리 또 널리 배워서 익혀야 한다는 일어전해운동(日語全解運動)으로 발전하였다. 1942년 5월 1일부터 국민총력조선연맹 내에 일어전해운동본부를 설치하고 각 도부군(道府郡)에 지부를 두고, 많은 강습회를 실시하면서 참여하는 사람들에게는 물자배급을 하였고,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경찰서에 호출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일어상용운동(日語常用運動)과 함께 가정국어화, 생활국어화를 강조하며 조선어 말살에 열을 올렸다.

이런 일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드디어 1942년, 일제는 한글을 핑계로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아 독립운동을 한다는 틀에 맞추어 조선어학회를 옭아매기 위한 사건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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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시대 전국의 경찰서에 무덕전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에서 대전경찰서 무덕전. /전점석

조선어학회 사건의 발단은 함남경찰부 특고과의 무리한 수사

발단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증언이 있다. 첫 번째는 1942년 3월 중순경, 박병엽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위이며 두 번째는 기차에서 여학생들의 이야기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내용이다.

함흥은 관북지방 제1의 도시이며 인구는 16만 2천 명이었다. 박영희(朴英姬)가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던 1942년 3월 중순,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박영희의 삼촌 박병엽(朴炳燁)이 함남 홍원읍 전진역(前津驛)에 친구 지장일(池章逸)을 만나러 갔다가 대합실에서 홍원경찰서 보안과 일본인 형사 후까자와(深澤)의 불심검문을 받게 되었다.

영생고등여학교는 1903년 캐나다 선교사 마의대가 세운 관북 최초의 사립 여자 교육기관이었다. 6·25전쟁 이후 폐교되었다가 남한에 생존한 동창들에 의해 1990년 3월 1일 수원 영생고등학교로 문을 열었다. 박영희의 삼촌 박병엽은 나이 당시 25~26세였고 주소는 홍원읍 내원리. 아버지 박동규는 홍원어업조합장이었다. 4년 동안 겨우 한 번씩 밖에 받을 수 없는 데구리(기선 저망어업) 허가를 3기에 12년 동안이나 계속 받은 홍원읍의 거물 실업가이고 갑부였다. 그리고 홍원읍의 유일한 사학 교육기관인 육영학원의 경영자였다.

친구 지장일과 박병엽은 서울 협성실업학교와 일본 명치대학교를 같이 다닌 동창생이다. 지장일은 함북 경성(鏡城) 사람이며 며칠 뒤 자기 결혼식에 입을 관복을 빌리러 온 것이었다. 박병엽은 1941년 10월에 일본 명치대학 상과를 졸업하였다. 박병엽은 일반 청년처럼 국방복을 입지 않고 양복 차림이었다. 일본말로 신분증을 보자면서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대해 반일감정이 컸던 박병엽은 조선말로 퉁명스럽게 “박병엽이요”라고 대답했다가 친구와 같이 경찰서로 연행되었으나 친구 지장일은 곧바로 경찰서에서 풀려나왔다. 당시에는 태평양 전쟁이 불리하게 진행됨에 따라 기차가 정거장에 도착할 때마다 의례히 경찰이 검문하기 위해 역에 나오곤 했다.

홍원경찰서 고등계 주임 나까시마, 형사부장 안정묵(일본명 야스다·安田禾念), 후까자와 등 세 명이 박병엽의 가택을 수색하였다. 이때 뒷방에 있는 조카딸 박영희의 책상서랍에서 문제의 일기장 2권이 발견되었다. 박영희가 2학년 때 쓴 일기장이었다. 다른 자료에는 박영희의 이름이 박영옥으로 나온다.

이로부터 4개월 동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1942년 7월 하순경 박병엽은 일기장을 돌려달라는 전화를 안정묵에게 하였다. 비로소 안정묵은 서랍에 넣어둔 일기장을 다시 꺼집어 내어 살펴보던 중 ‘국어를 사용하다가 벌을 받았다’고 적힌 부분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사 제8권 문화투쟁사>(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1970년)) 1011쪽에는 가택수색의 계기와 학생 이름이 전혀 다르다. 정태진에 관해서는 같은 내용이다. 1942년 여름방학 날, 함경남도 홍원에서 함흥으로 통학하는 영생여자고등학교 여학생들이 기차 안에서 남몰래 태극기를 종이쪽지에 그리고 우리나라 국기라느니 무궁화, 독립 등의 말을 속삭이는 것을 들은 홍원경찰서 경찰대는 영생고녀 4년생인 박영옥의 일기책을 뒤지다가 2학년 때 쓴 일기 중에서 국어(일본어를 가리킴)를 상용하는 자를 처벌했다는 문구를 찾아냈다.

박영옥을 위시하여 일기장에 등장하는 이성희, 채순남, 정인자, 이순자 등 학생들이 경찰서로 끌려가 1주일이나 고문을 당하였고 결국 정태진, 김학준 두 선생이 학생들에게 민족주의 사상을 불어넣었다는 자백을 받아내었다. 김학준은 일본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으며 공민과 체육을 담당하였으며 일본이 패전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태진은 조선어와 영어를 담당하다가 과목이 폐지되어 수학, 공민을 가르치면서 틈틈이 이순신 장군과 행주대첩, 논개와 계월향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다. 일제 경찰은 이미 영생고녀를 그만두고 서울에 와서 조선어학회의 사전편찬사업에 열중하던 정태진을 이들 학생들의 증인이란 명목으로 소환하였다. 한 달 가까이 갖은 고문으로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들의 모임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허위 자백을 하게 하였다. 여학생 3명이 회령을 향해 함흥정거장을 떠나 북쪽으로 가는 기차에서 홍원경찰서 형사부장 야스다는 왜 조선말을 쓰느냐고 하였고 이에 너무 심하다는 생각에서 항의를 하다가 경찰서로 붙잡혀 갔다.

여기서 국어는 일본어를 가리킨다. 담임선생의 검인이 찍혀 있었다. 홍원경찰서는 이것을 트집 잡아 수사에 착수하였고 이어서 담임선생이었던 정태진이 2년 전에 영생고녀를 그만두고 서울에서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서 사건은 급속도로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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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두봉. /전점석

함남경찰부 특고과(特高課) 회의에서는 조선어학회를 소탕키로 결정하였다.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표면상 문화운동의 가면 아래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실력배양단체’로 규정하였다.

곧바로 박영희의 증인으로 정태진(鄭泰鎭)에 대한 체포 작전이 진행되었다. 석인 정태진(1903~1952년)은 1925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4월부터 함흥 영생고등여학교 교원으로 영어와 조선어를 가르치다가 1927년 5월 미국으로 건너가 우스터대학 철학과, 1930년 6월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서 교육학 과정을 수료하고 막 귀국하여 1931년 9월, 다시 함흥 영생고등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 후 1941년 6월, 11년 동안 근무했던 영생고녀를 그만두고 조선어학회에서 조선말 큰사전 편찬 일을 하였다.

이런 사정을 전혀 모른 채로 1942년, 서울에서는 이극로, 권승욱, 정인승, 정태진 등이 밤을 지새우면서 사전편찬 원고정리를 하고 있었다. 건재 정인승과 석인 정태진은 1921년 연희전문대를 입학하여 4년간 함께 공부한 동창생이었고 필운동의 같은 동네에서 이웃하여 살았다. 둘은 정인보 교수의 지도를 받고 민족문화를 사랑하게 되었다. 나이는 건재가 6살 위이다. 졸업 후 몇 년이 흐른 뒤에 1941년, 건재의 추천으로 석인은 조선어학회에서 국어사전 편찬 일을 하게 되었다.

여름이었다. 원고정리를 하던 정태진에게 겉봉의 수신자는 ‘서대문구 미근동 60-18’, 발신자는 홍원경찰서로 되어있는 소환장을 받았다. 소환장의 내용은 치안유지법 피의사건의 증인으로 9월 5일 출두하라는 것이었다. 이 소환장을 받고 “죄 지은 것이 없으니 다녀오는 것이 낫겠다”고 하면서 내려간 지 한 달이 가까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이극로와 정인승은 무심하다고 짜증을 내고 있었다. 조지훈의 회고에 의하면 정태진 선생이 함흥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붙잡혀서 억류되었다고 한다.

며칠 후 느닷없이 이들도 집에서 체포되었다. 소환장을 받고 출두한 정태진은 홍원경찰서 유치장에 있으면서 취조를 받다가 경찰서 뒤에 있는 무덕전(武德殿)에서 고문을 당하였다. 당시에 전국 각지에 세워진 경찰서 내의 무덕전은 겉으로는 유도, 격검 등 무술 연습 장소였지만 실제로는 사상범 고문장소로 사용되었다. 온갖 고문을 당한 정태진은 형무소에서 징역살이하는 것보다 재판정에서 진술할 기회를 얻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하고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자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비밀히 한다는 허위자백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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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말모이에서 극장에서 진행된 표준어 전국공청회 장면. /전점석

고문으로 작성된 허위자백서를 근거로 어학회 일망타진

이때부터 홍원경찰서는 경기도 경찰부의 협조를 받아 조선어학회를 일망타진하기 위한 검거계획을 수립하고 민완형사를 총동원하여 체포 작전에 돌입하였다. 총독부 시정 기념일인 10월 1일 새벽, 처음으로 이극로, 이윤재, 이희승, 장지영, 최현배, 김윤경, 정인승, 권성욱, 한징, 이중화, 이석린 등 11명이 1차로 검거되었다. 건재 정인승(1897~1986년), 1919년 와세다대학에서 문학과 법률학을 공부한 뒤 1925년 연희전문 문과를 졸업하였다. 1936년부터 조선어학회에서 사전편찬을 담당하였고 한글맞춤법통일안 기초위원을 역임하였다. 해방 후, 큰사전 6권이 출간되는 1957년까지 사전편찬실을 지킨 유일한 인물이었다. 위당 정인보의 제자이며 김윤경의 3년 후배였다.

이어 10월 20일을 전후하여 2차로 이병기, 이만규, 이강래, 김선기, 정열모, 김법린, 이우식 등 7명이 검거되었다. 정열모(1895~1967년)는 해방 후 이극로, 안재홍 등과 함께 설립한 홍익대학의 학장을 역임. 대종교의 종교이념인 홍익을 내세운 민족대학이었다.

또 12월 23일부터 1943년 1월 초에 걸쳐 3차로 서승효, 안재홍, 이인, 김양수, 장현식, 정인섭, 윤병호, 이은상, 김도연, 서민호 등이 차례로 검거되었다. 안재홍(1891~1965년)은 해방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참여하였다가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좌파세력과 충돌하였고 이어서 건준을 탈퇴하였다. 이후 국민당을 결성하여 위원장을 할 때에 이극로도 참여하여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김도연, 서민호, 김양수는 조선어학회의 운영위원으로 자금조달을 맡았었다. 김도연은 조선흥업사를, 서민호는 반도흥업사를 각각 운영하고 있었다. 이듬해 3월 초에 검거된 신윤국, 김종철 등을 합하여 피의자로 검거된 사람은 모두 33명이었다. 끌려간 증인은 48명이었으며 이 가운데 권덕규, 안호상은 신병으로 구속을 면하였다. 안호상은 초대 문교부 장관을 지내면서 학도호국단을 창설하고 이승만과 함께 북진통일을 주장하였으며, 대종교 총전교(교주에 해당함)를 역임한 사람이다. 그는 또 안희제가 주관하던 기미육영회의 장학금으로 유학하여 독일에서 헤겔 철학을 전공하고 귀국했을 때 이광수의 중매로 모윤숙과 결혼하였다가 성격차이로 별거하기도 했다. 불구속된 권덕규는 중풍이 심하였다. 안호상은 어학회에 직접적으로 참여해서가 아니라 1934년 겨울, 안암동 집에서 이극로, 이은상 등과 함께 조선양사원 설립을 모의한 일이 일경에 포착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해 정리해놓은 카드, 원고와 자료들도 모조리 압수당하였다.

이극로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가택수색을 할 때 꼼꼼히 적어놓은 그의 수첩이 발견되었는데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중국 상해를 들러 김두봉 선생을 만난 사실이 적혀 있었다. 경찰들은 조선어학회 사건을 총독부의 어문정책에 반대하는 단순한 문화 활동이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의 밀명을 받아 문화 활동을 가장하여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사건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어학회 사무실을 수색하다가 이극로의 책상 위에서 노래 가사가 적힌 편지가 발견되었다. 이 가사는 대종교 3대 교주였던 윤세복이 1942년, 만주 동경성에서 ‘단군성가(檀君聖歌)’를 작사하여 이극로에게 작곡을 의뢰한 것이었다.

이극로는 이에 답장하는 글인 ‘널리 펴는 말’을 썼다. 이 편지에서 ‘천운은 빙빙 돌아가는 것이라. 한번 가고 다시 아니 오는 법이 없다. 날마다 낮이 가면 밤이 오고, 밤이 가면 낮이 오며, 또 춘하추동 4철은 해마다 돌아온다’라고 하면서 대종교가 곧 활기를 띨 것이니 열심히 활동하라고 했다.

이극로는 일본과 미국이 벌이는 태평양 전쟁의 양상을 보고 일본이 반드시 패망할 것이고, 대종교가 곧 흥하리라는 것을 알고 대종교 교우들에게 ‘일어나라, 움직이라! 한배검이 도우신다’라고 썼다. 일제는 이 편지의 제목과 문구를 몇 자 고치고 대종교와 조선어학회 요인들이 독립운동한다고 몰아붙이며 대거 검거해서 대종교는 임오교변을 당하고 한글학회는 조선어학회 사건을 당했다. 결국 책상 위에 있던 윤세복의 편지를 빌미로 조선어학회를 대종교의 국내 비밀결사조직으로 규정하고 수사를 진행하였던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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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종교 홈페이지, 경일알림-개천 4474년 6월 4일 제74-23호, 2017년 6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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