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 피땀으로 일군 저수지 기념비에 '친일 지주' 이름이…
1930년대 일제 식량 해결 목적 경남 곳곳 강제 수리시설 조성

일제강점기 만들어진 저수지 관련 기념물이 고성에 이어 사천에서도 확인되었다.

사천시 사천읍 두량리와 진주시 정촌면 예상리에 걸친 두량저수지로 진주 배춘·예하리와 사천 두량리 일대 논밭에 물을 대주는 역할을 한다.

▲ 사천 두량저수지 전경. 일제강점기 저수지와 보의 축조는 당시 일제의 만성적인 식량 부족 극복을 위한 산미증식계획에 맞물려 진행됐다. 이곳은 창원·김해 주남저수지, 고성 대가저수지와 함께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진행된 대표적인 수리 흔적이다. /김훤주 기자

◇공식 준공 기록은 1945년이지만 = 관리 주체인 한국농어촌공사(사천지사)에 확인했더니 공식 준공은 1945년 12월 31일로 되어 있다. "해방 이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관련 기록이 없어서 해방된 해의 마지막 날로 적고 있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저수지 배수문에서 대각선 방향 대숲에 있는 '남주제준공기념비(南州堤竣工記念碑)'는 저수지가 축조된 내력을 일러주고 있다.

모서리 네 곳에 낮은 콘크리트 기둥을 세운 다음 굵다란 철재 원통을 두른 울타리 안에 기념비가 있는데 높이는 기단까지 4m 안팎이다. '남주제준공기념비'라 새겨진 정면 왼쪽 비면에는 '사업 개요'가, 오른쪽에는 '직원(職員)'과 '평의원(評議員)'이 적혀 있다.

왼쪽은 명칭(사천수리조합)과 설립인가(소화(昭和) 6년=1931년 3월 31일), 몽리면적, 사업비, 저수지 유역 면적, 제방 높이·길이, 만수(滿水)면적, 저수량, 평균 수심, 용수(用水) 간선·지선과 신·구 수로의 길이, 제수문 숫자 등 관련 정보가 자세히 적혀 있다.

오른쪽은 조합장 최연국(崔演國) 부조합장 신달곡청조(信達谷淸造) 서기 재등중언(齋藤重彦)·권종태(權鍾泰)가 직원으로 강위수(姜渭秀) 구보원조(久保元助) 동척회사(東拓會社) 이기태(李起台) 백남재(白南在) 소전절후(小田切厚) 서상희(徐相熙) 산본청(山本淸) 최보경(崔普卿) 허재준(許再俊)이 평의원으로 새겨져 있다.

또 기공 소화 6년 8월 18일과 준공 소화 7년 5월 20일이라 적었으며 공사감독대행(工事監督代行)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朝鮮土地改良株式會社) 청부인(請負人) 죽본조(竹本組) 현장주임 초야홍(草野弘)·좌등동장(佐藤仝藏) 등도 새겨두었다.

청부인은 지금으로 치면 시공업체에 해당된다. 죽본조=다케모토구미는 1908년 진주에서 설립된 합자회사로 1945년 일제 패망까지 일본인 죽원웅차(竹元熊次)·일시(一市) 부자가 가족 기업으로 운영하면서 정미업·운수업에까지 진출했다.

▲ ▲ 1940년 3월 5일 자 <부산일보>에 보도된 최연국. 기사에는 '사천 최연국씨 아사히 노보루로 개명' '솔선해 창씨명 실행'이라는 제목으로 얼굴 사진도 실렸다.

◇남주제 준공 기념비 본문 내용을 보면 = 뒷면에는 본문 329자 8행이 새겨져 있다.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이 국역한 내용을 바탕으로 간추려 보았다.

"동쪽 사주천은 근원이 고성 경계 5방리 유역에 걸쳐 비롯되고 북쪽 길호천은 진주 경계에서 근원이 비롯하여 2400정보에서 물이 모여도 바다로 방류되니 산림천택의 이로움이 없다"며 "가물까 두려워 거름내기를 게을리 하고 지력이 다하도록 의욕을 내지 못해 농사가 병이 들었다"고 했다.

다음에는 '군사람 최연국(郡人崔演國)'의 활약이 소개되어 있다. "1929년 큰 가뭄으로 사람들이 모두 굶주려 울게 되었을 때 동지를 불러 창립위원회를 일으키고 업무를 주관하였으며 대중들에게 고루함을 허물고 날로 펼쳐서 해이해지지 않고 있는 힘을 다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또 "온갖 어려움에도 경남도·조선총독부를 자주 찾아가 설립 인가를 받고 공사비 절반을 특별보조로 얻어서 주민 부담을 반으로 줄였다"며 "사주천에 보를 쌓으니 청진(淸津)·신계(新溪)·고읍(古邑)·용당(龍塘)이고 길호천 상류에 못을 쌓으니 남주제다"라고 했다.

마지막은 "제방 이름을 '남주'라 한 까닭은 최연국의 호이기 때문이니 공적을 표현하여 후세가 기념하게 하기 위해서"라며 "뒷날 여기서 이득을 입는 이들로 하여금 즐겨 먹게 할 것이니 지금의 이런 심력 덕분"이라는 투로 마무리했다.

◇친일파 최연국의 공적을 기리자는 기념비 = 비문이 알려주는 사실이 몇몇 있다. 먼저 최연국(1886~1951)이라는 존재다.

사천의 대표적인 친일파로서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총독부시정5년기념물산공진회평의원·다이쇼(大正)즉위기념대례기념장(1915), 경남평의원 당선(1920·24) 조선박람회평의원(1929), 경남평의원 임명(1930), 중추원(총독 자문 수당 연간 600원)참의(1933~1936), 경남지주봉공회 결성(1941),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1941), 국민총력사천군연맹 고문(1944)을 지냈다.

일본 이름은 아사히 노보루(朝日承)다. 1940년 3월 5일 자 부산일보에 4단 크기 기사가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남선(南鮮)의 명문" "사천 최연국씨 '아사히 노보루'로 개명" "솔선해 창씨명 실행" 등이 제목이다. 이듬해 8월에는 조선인 최초로 교토 헤이안(平安)신궁에서 딸의 혼례를 치르고 남은 비용을 국방헌금 등으로 헌납했다.

최연국은 해방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면서 피의자로 지목되었다. 1949년 8월 19일 발표된 '미체포 반민 피의자 명부'에 들어 있는데, 반민특위가 같은 8월 무력화되고 이듬해 해체된 데 비추어 보면 끝까지 버티고 출두하지 않은 것으로 짐작된다.

1951년 숨을 거둔 뒤에는 사천 곤명면 은사리 산438번지 단종태실 자리에 묻혔다. 세종 임금은 1441년 손자 단종이 태어나자 이 태실을 조성했다. 지금 경남도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태실지를 최연국은 일제강점기 일찌감치 불하받아 놓았다.

이밖에 당시 수리조합사업은 제방을 쌓아 저수지를 조성(길호천 상류)하는 것은 물론이고 별도로 보(洑)를 축조(사주천)하는 공사까지 중시하는 개념임을 알 수 있다. 또 지금 중선포천과 사천강을 당시에는 길호천과 사주천이라 했다는 사실도 확인된다.

▲ 사천 두량저수지 배수문에서 대각선 방향 대숲에 있는 '남주제준공기념비' 모습. 기념비 오른쪽에는 조합장 최연국을 비롯해 직원과 평의원 이름이 적혀있다. 최연국은 사천의 대표적인 친일파로서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된 인물이다. /김훤주 기자

◇친일파 이익 극대화와 지배력 강화의 계기 = 1930년대 저수지와 보의 축조는 당시 일제의 만성적인 식량 부족 극복을 위한 산미증식계획과 맞물려 있다. 조선총독부는 35만ha를 관개(灌漑) 개선 등 토지개량 목표로 정하고 정부 알선자금 장기저리융자를 제도화하는 등 지원을 강화했다.

최연국 같은 친일세력은 대규모 수리시설 조성 주체가 됨으로써 이익을 극대화하고 지역 지배력을 키울 수 있었다.

남주제준공기념비는 1920~30년대 지역 실정과 인물·지명을 담은 금석 기록이지만 관리·보전 대상은 아니다.

문화재로 지정·등록되지도 않았고 근대건축유물을 망라하는 경남도청의 근대건축문화유산(www.gyeongnam.go.kr/archi_heritage) 목록에도 올라 있지 않다.

최헌섭 원장은 "이곳 남주제는 창원·김해의 주남저수지, 고성의 대가저수지와 함께 일제강점기 우리 지역에 강제된 수리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라며 "이것만으로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 역사 자료로 삼을 가치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최 원장은 나아가 "조선 사람들의 피땀으로 조성된 저수지에 자신의 호(남주)를 붙여 개인의 공적으로 삼은 최연국은 대표적인 친일반민족행위자"라며, "단종의 태실 자리를 빼앗고 죽어서도 거기 묻혀 발복을 빌었던 반역사적 인물을 제대로 평가하고 단죄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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