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지역 일제시대 비행기 격납고 기존 20채서 현재 2채

◇산자락에 남은 비행기격납고

사천시에 가면 일제강점기 비행기격납고가 두 채 있다. 콘크리트 구조물인데 정동면 예수리 180-2번지와 60-6번지에 한 채씩 있다. 격납고(格納庫)는 항공기를 점검·수리 또는 은폐를 위하여 넣어두는 시설물을 이른다.

사천강이 펼쳐놓은 들판이 성황당산 자락과 만나는 구석에 자리 잡았는데 직선으로 650m 정도 서로 떨어져 있다. 하나는 원래대로 내부가 비어 있고 다른 하나는 앞쪽을 흙담장으로 막고는 농사도구 등을 넣어두는 헛간으로 쓰고 있다.

얼핏 보면 둥근 공을 절반으로 잘라 엎어놓은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머리와 다리를 떼어낸 마른오징어를 닮았다. 비행기 꼬리가 들어가는 데는 좁고 나머지 날개에 해당되는 부분은 넓은 것이다.

높이는 앞부분이 5m가량이고 뒷부분은 2m70cm 정도, 너비는 앞쪽이 16m를 살짝 넘었고 뒤쪽은 대략 7m50㎝였다. 또 두께는 폭격에 대비한 듯 대부분 65cm 안팎이었는데 특히 뒷부분은 1m20㎝나 되었다.

앞뒤 길이는 13m 남짓인데 일부 헐어진 데서는 철근이 드러나 있었다. 소켓 비슷한 물건에서 전선이 바깥으로 나와 있었는데 이를 보고 구조물 속에다 전기 배선을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 사천시 정동면 예수리 180-2번지 비행기격납고. 윗부분을 잡초가 뒤덮고 있다. /김훤주 기자

◇곡절 많은 사천비행장

사천에 비행기격납고가 남아 있는 까닭은 군용 비행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0년 일제가 사천면 수석리 272번지 일대에 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동원령을 내렸으며(<사천읍지> 20쪽) 수천 명이 국민근로보국대로 끌려와 노동했다(<사천시사(史)> 751쪽).

1945년 8월 15일 패망을 맞은 사천 일본군은 9월 전투용 항공기를 둔 채 진주로 물러나 10월 미군에 무장해제 당한 뒤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겨진 비행기는 주변에 살던 주민들에게 산산조각 해체되었다'(<사천읍지> 146쪽).

이렇게 미군에 접수된 사천비행장은 한국전쟁 당시에는 강릉·대구 비행장과 함께 공군의 주요 작전전개기지로 쓰였다. 1951년 8월에는 사천에 있던 비행단이 제1전투비행단으로 개편되었는데 9월 강릉기지로 옮긴 뒤에는 제1훈련비행단으로 남았다.

지금 사천에는 제3훈련비행단이 있는데 1975년 5월 대구에서 옮겨왔다. 또 1999년 12월에는 제52시험평가비행전대가 사천에서 창설되어 군용과 민간 항공기에 대하여 정상 작동 여부를 확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공군이 관할하는 이 비행장은 민간에는 사천공항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와 서울/김포 노선이 운행되고 있는데 1967년 5월 진주비행장으로 시작하였고 1969년 사천비행장, 1970년 사천공항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 뒷부분이 민가와 맞닿아 있는 예수리 60-6번지 비행기격납고. /김훤주 기자

◇항공산업이 집중된 사천시

한국항공우주산업(Korea Aerospace Industries, KAI)도 사천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완제품 항공기를 생산하는 하나뿐인 기업으로 삼성항공·대우중공업 항공사업본부·현대우주항공 등 항공 3사가 합병되면서 1999년 10월 1일 출범했다.

다른 항공산업 관련 기업들도 많이 있다. 남양정밀·두원중공업·라코·미래항공·비에스아이·샘코·에이원·장안항공산업·코텍·피엔엘·한국표면처리 등 2016년 사천시청이 펴낸 <사천 항공 63년사>에 실려 있는 업체만도 서른다섯 곳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항공 제조업에서 경남이 70%를 담당하고 있다. 통계청의 2014년 광업·제조업 보고서(10인 이상)에 따르면 생산액의 72%, 사업체의 67%, 종사자의 70%를 경남이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항공 분야는 사천을 대표하는 산업이 되어 있다. 사천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한테 사천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느냐 물으면 대부분 '비행기'라고 대답할 정도다.

항공 기업들이 사천에 집중되어 있는 까닭은 간단하다. 활주로를 갖춘 비행장이 사천에 있기 때문이다. 군용 비행기든 민간 항공기든 완제품을 만들어 시장에 내놓으려면 정식 활주로에서 시험 비행을 하여 성공해야 가능한 것이다.

사천비행장은 일제가 침략을 위한 도구로 조선 사람을 강제 동원하여 만든 것이지만 그 덕분에 사천이 항공산업의 최적지로 떠오르게 되었다는 얘기다. 비행기격납고는 이런 측면에서 사천의 항공산업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 예수리 60-6번지 비행기격납고의 내부 모습. 경운기를 비롯한 농사도구들과 거름이 쌓여 있다. /김훤주 기자

◇문화재는커녕 변변한 기록도 없어

그런데 사천시청 누리집과 <사천시사>·<사천읍지>·<정동면지> 등을 살폈더니 제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일본군은 기지를 중심한 주변 4~5km 이내의 도로변 각 요소에 콘크리트조(造)의 아치형 엄폐호(掩蔽壕) 수십 개를 축조하여 전투용 항공기의 대피는 물론 각종 군수물자를 저장해 놓고 있었다"(<사천읍지> 145쪽)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역사적·지역적으로 의미가 작다고 할 수 없는데도 지정문화재는 물론 등록문화재로도 되어 있지 않았다. 아울러 경남도청이 2016년 만든 근대건축문화유산(www.gyeongnam.go.kr/archi_heritage)에도 올라 있지 않았다.

문화재청 누리집을 검색했더니 다른 지역 비행기격납고는 처지가 달랐다. 남제주 비행기격납고 19채와 밀양 구 비행기격납고 4채가 등록문화재 제39호와 제206호로 올라 있었다. 제각각 제주도를 일본군의 출격 기지로 건설하려 했음을 알려준다거나 당시 일본의 밀양 지역 전투 준비 상황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 지난 2017년 경남도청 건물에 항공 MRO(정비사업) 유치를 축하하는 현수막이 달린 모습. /경남도민일보 DB

제주도와 밀양의 비행기격납고는 문화재보호법으로 관리·보전되지만 사천의 비행기격납고는 아무런 보호도 없다. 예수리 주민들에 따르면 성황당산 들머리에서 사천강 상류 방향으로 1km 넘는 구간에 대략 50m 간격으로 최소한 스무 채 넘게 있었으나 두 채를 빼고는 모두 시나브로 캐내어 농지로 바꾸었다. 남은 두 채 또한 소유자가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지 없앨 수 있으나 그나마 예수리 60-6번지 347㎡는 국유지라 다행이라 하겠다.

격납고를 둘러본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은 19일 "사천은 일제가 제주와 함께 동아시아·태평양을 향하는 핵심 공군기지였고 비행기격납고는 이런 역사성을 담고 있다"며 "사천시청에서 사들여 근대사 교육 자료로 활용하고 문화재 지정 또는 등록을 추진하면 바람직하지 않겠나 싶다"고 말했다.

▲ KAI가 제작한 태국 수출기 T-50TH. /K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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