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중 납북 뒤 생사 불명
여성·민족해방 애쓴 공훈 인정
남편 조봉암은 무산 '반쪽 추서'

한국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30일, 김조이(金祚伊·1904~?)는 인공치하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된다. 서울을 못 벗어난 그는 '반역자' '배신자'로 몰리며 남동생 김송학과 함께 연행된 것으로 전해진다.

1956년 정부는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납북인사 조사를 벌였다. 김조이 가족은 '실향사민' 안부조사신고서를 써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넘었지만, 김조이와 그의 동생은 생사조차 분명치 않다. 이제 한반도 평화 국면에서 독립운동가 김조이의 마지막 장면을 복원해야 하지 않을까.

▲ 진해에 있던 김조이 친가를 방문한 김조이·조봉암 부부. 뒷줄 오른쪽 두 사람이 김조이, 조봉암이다. 뒷줄 맨 왼쪽은 김조이 남동생인 김영순. 김영순 제공 사진. /<조봉암평전>

◇고학을 자청하다 = 김조이는 옛 창원군 웅천면 성내리 189번지에서 큰딸로 태어났다. 1919년 웅천우시장 터(현재 복원된 웅천읍성 동문)에서 펼쳐진 웅동 4·3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웅천지역은 김조이의 조부 김재형(金載亨) 집(웅천 북부동 560번지)에서 밀의가 이뤄지고, 여성인 주기선·김조이·주녕옥 등도 웅천교회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김조이는 외가가 있던 두동에서 계광(啓光)학교(웅동중학교 전신)를 다녔다. 1922년 졸업 이후 공부를 계속하려는 의지가 컸다. 조부가 조선왕조 마지막 창원군수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는데, 넉넉한 살림이었다. 하지만 집안 반대가 심해 경성에서 고학했다. 직접 돈을 벌어 학교를 다니고 중간에 휴학도 했기에 4년 과정 동덕여학교를 7년 만에 마쳤다.

김조이가 참여한 경성여자고학생상조회는 회원 30여 명이 가내수공업으로 여아용 모자, 운동복, 간호부복, 천막 등을 만들어 팔면서 학비를 마련했다.

▲ <동아일보> 1924년 7월 1일 자에 보도된 조봉암·김조이 결혼식 기사.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정치적 동지 '조봉암' = 김조이의 삶은 남편이자 투쟁 동지인 조봉암(曺奉岩·1899~1959)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조봉암이 속한 신흥청년동맹과 여자고학생상조회가 전국 순회 강연회를 하면서 두 사람은 인연을 맺는다. 청년문제, 여성해방이 강연 내용이었다.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 비결과 원고 점검 등을 이야기하며 둘은 가까워졌다. <조봉암평전>(2013)에서는 김조이에 관해 "말과 행동이 시원시원했다. 키는 163㎝로 조금 큰 편이고 몸이 가늘고 얼굴이 갸름했다. 그러나 속이 꽉 차 보여 연약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고 묘사했다.

1924년 4월 인천공회당에서 열린 신흥청년동맹 결산강연회에서 김조이는 은곡(隱谷)이라는 가명으로 연사로 나섰다. 제목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추억함'.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1871~1919)는 독일에서 활동한 폴란드 출신 사회주의 이론가이자 혁명가다.

같은 해 6월 30일 김조이 고향집에서 둘은 결혼식을 올린다. 조봉암이 유명 인사여서 결혼 소식은 신문 단신으로도 실렸다.

▲ 김조이(맨 왼쪽) 등이 창립한 경성여자청년동맹의 종로구 낙원동 사무실. 조선일보 보도사진. /오마이뉴스

◇여성해방·계급투쟁 외치다 = 김조이는 1925년 1월 허정숙·주세죽 등 또래 여성들과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창립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한다. 여성해방 서적 연구·토론, 여성노동자 위안 음악회, 무산아동학원 설립, 여성문고 설치 등을 추진한 사회주의 청년단체다.

같은 해 4월 조선공산당 창당 과정에서 민중운동자대회가 열리기로 했으나 경찰이 탄압한다. 이때 대회 개최 보장을 요구한 이들이 단성사와 우미관 앞 등 2곳에서 시위를 펼쳤다. "무리한 경관의 압박에 반항하자"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만세" "무산자 만세" 등이 적힌 붉은 깃발 아래 수천 명이 모였다. 이른바 '적기(赤旗) 시위사건'이다. 이 자리에서 김조이도 잡혔다가 다음 날 풀려났다.

그해 11월 고려공산청년회 추천으로 김조이는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한다. 입학생 중 김조이를 비롯해 고명자(1904~?)와 마산 출신 김명시(1907~?)가 여성이었다. 창원과 마산이 이웃이어서 김명시와는 언니 동생 사이였다.

김조이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애썼지만, 결국에는 형무소에서 고초를 겪는다. 1931년 9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동양부 지시로 김조이는 김복만 등과 함께 몰래 귀국한다. 아울러 함흥을 중심으로 '조선노동좌익재결성'을 주도한다. <동아일보>는 1932년 2월 3일 '모종(某種) 사명 띠고 김조이 잠입'이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김조이가 시골마을 부인으로 변장해 다닌다는 점을 알릴 정도로 당시 경찰이 크게 견제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해 김조이는 '항남공청사건'이라고 불린 '제2태평양 노사사건' 주동자로 지목돼 붙잡혔다. 2년여 구금됐다가 기소돼 1934년 12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미결 구류 100일 통산)을 선고받았다. 함흥형무소에 갇혀 있다가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진 김조이는 1937년 9월 출소했다.

▲ 1934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수감된 이후 김조이 자료사진. 죽산 조봉암 선생 명예회복 범민족 추진위. /오마이뉴스

◇이토록 서글픈 마지막 = 김조이·조봉암 부부는 재결합 뒤 1939년 창원 웅천 집을 찾았고, 기념사진도 찍었다. 조봉암이 왕겨를 취급하는 비강조합 사업을 벌이면서 어느 정도 의식주가 해결됐고, 김조이 식구들이 인천으로 이사하는 등 행복한 나날이었다.

해방 뒤에도 김조이는 인천부녀동맹을 이끄는 등 활동을 이어간다. 그런데 차디찬 옥살이 후유증에 시달려야 했다. 오한과 같은 증상에 시름시름 앓아 한약을 달여 먹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 와중에도 김조이는 조봉암의 고난 어린 정치와 삶에 신뢰를 보여줬다. 전향성명과 공산주의 계급독재 비판 때도 그의 곁을 지켰다.

전쟁 도중 김조이가 끌려간 사실에 조봉암의 슬픔도 컸다. 김조이 친동생이자 조봉암 근접 수행원이었던 김영순(金永淳)은 "누님(김조이)이 어찌 됐느냐고 묻더니 그 길로 평양까지 찾으러 갔던 모양이라예. 결국에는 못 찾고 1·4 후퇴로 부산 피난 시절에는 매일 술로 괴로움을 달래는 걸 봤습니다"라고 회고했다. (<한국일보> 2012년 12월 3일 자 인터뷰)

2008년 정부는 김조이의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한참 늦었지만, 공산주의 계열 독립운동을 공로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조봉암은 2011년 대법원 재심에서 간첩 혐의 무죄 판결로 누명을 벗었고, 이승만 정권의 '사법살인'이 인정됐다. 하지만 조봉암의 독립유공자 서훈은 수차례 심사 문턱에서 막혔다. (<인천일보> 2018년 7월 31일 자 보도) 이처럼 부부의 독립운동 서훈은 반쪽만 진행돼 있다.

▲ <동아일보> 1932년 2월 3일에 보도된 '모종 사명 띠고 김조이 잠입? 경찰은 그 종적을 엄탐 중' 기사. /국사편찬위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참고문헌

<조봉암평전(잃어버린 진보의 꿈)>, 이원규, 한길사, 2013
<죽산 조봉암 평전>, 김삼웅, 시대의창, 2010
<진해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 황정덕, 금창출판사, 2004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sajeok.i815.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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