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유족부터 뒷돈 요구한 공무원까지
전수조사하고 구조적 범죄 뿌리 뽑아야

첫 사례, 1995년 1월 서울고법은 특별한 판결을 하나 내렸다. 당시 경기도 파주에 거주하던 박정훈(당시 77세) 씨가 국가와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낸 건국훈장 수령권자 지정처분 무효확인 등 청구소송에서 박 씨의 손을 들어줬다. 박 씨의 조부는 대한독립단을 결성해 무장투쟁을 벌인 의병 출신의 독립군 화남(華南) 박장호(朴長浩) 선생이다. 화남 선생은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현 독립장·3등급)을 추서받았다. 그런데 엉뚱한 박명길이라는 사람이 화남 선생의 손자로 보훈처에 유족으로 등록해 보훈연금을 받아왔다.

박정훈 씨는 보훈처를 찾아가 유족 지정이 잘못되었다며 시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보훈처는 시정 노력을 하기는커녕 "박명길이 유족으로 결정돼 기득권이 있다"며 "박명길이 유족이 아니라는 증거를 대라"고 요구했다. 이후 박정훈 씨는 총 9차례에 걸쳐 라면상자 2~3개 분량의 자료를 제출했다. 그때마다 보훈처는 "큰집 작은집이 사이좋게 합의하라"며 마치 집안싸움처럼 사태를 왜곡시켰다. 급기야 박정훈 씨는 93년 소송을 내게 되었고 결국 승소판결을 받았다. 이 사건은 1995년 1월 27일 자 국내 중앙일간지 조석간 모두에 사회면 톱으로 실렸다.

두 번째 사례, 90년대 초반 독립유공자 A씨가 사망했다. 보훈처가 펴낸 공훈록에 따르면, A씨는 광복군 3지대에서 활동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A가 해방 후에 광복군에 들어갔다고 증언했다. 해방 직후 북경에는 광복군 출신, 학도병 출신 등 수많은 조선 청년들이 집결하였다. 그 숫자가 대략 400여 명에 달했는데 만주군 중위 출신의 박정희 전 대통령도 그중 한 명이었다. 임시정부는 동북반사처(辦事處) 최용덕 처장을 보내 이들에게 임시거처를 마련해주었다. 그러고는 이들을 임시로 김학규 광복군 3지대장 휘하로 편입시켰다. 이때 박정희는 만주군 장교 경력을 인정받아 3지대 1대대 2중대장을 맡았다. 이들은 모두 '해방 후 광복군'이다.

지난 93년 한 독립유공자는 필자에게 "A씨는 박정희 부대(해방 후 임시로 편성된 부대)에서 '쇼리'를 하던 사람"이라고 증언했다. '쇼리'란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하는 아이를 말한다. 그런데 보훈처 공훈록에는 A씨가 1944년 11월 북경에서 광복군 3지대에 입대하여 지하공작원으로 활동했다고 돼 있다. A씨는 90년대 초반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이런 식이라면 박정희에게도 건국훈장을 줘야 하지 않을까?

세 번째 사례, B씨는 60년대 초반 정부에서 독립유공자 포상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총무처에 부친의 포상신청을 했다. 그의 부친은 독립군의 지도급 인물이다. 얼마 뒤 서훈심사위원회를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고 총무처를 방문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담당직원은 부친의 서훈을 조건으로 뒷돈을 요구했다. 격노한 B씨는 그 자리에서 담당자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런데 심사를 통과했다는 그의 부친은 서훈이 취소되었다. 이후 B씨는 매년 신청을 했으나 번번이 탈락했다. 70년대 중반에 가서야 그의 부친은 겨우 훈장을 받았다. 독립유공자 포상에 밝은 한 인사는 B씨 집안을 두고 보훈처에 '악성 민원인'으로 찍혀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정운현.jpg

근자에 심각한 사회문제로 불거진 독립유공자 포상비리는 구조적인 범죄행각의 결과물인 셈이다. 브로커와 결탁한 가짜 유공자 혹은 그 유족, 본분을 망각한 보훈처 담당 공무원, 소위 '인우보증'을 하면서 거짓 증언을 해준 독립유공자, 그리고 일부 독립운동사 분야의 역사학계조차 배제할 수 없다.

독립유공자 전수조사가 불가피한 것은 물론이요, 향후 구성될 '재심사위원회'는 사법권조차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