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산이 1970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은 것과 1977년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으로 위촉된 것에 대해서 친일신문 만선일보에 적을 두었다는 이유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같은 해 건국포장을 받았는데 역시 같은 이유로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었다.

만주국 유일의 친일 한국어신문인 만몽일보는 1937년 1월에 이용석이 새로 사장에 취임하면서 제호를 만선일보로 바꾸었다. 이 무렵 고문은 최남선이고 편집간부는 주필 염상섭, 편집부장 박팔양, 사회부장 전영우, 정치부장 심형택 등 서울의 언론계에 종사하던 사람이 많았다. 손소희와 송지영도 근무하였다. 만선일보 역시 국내 지국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노산이 만선일보에 근무하였다는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서 친일시비는 증거 불충분 상태이다. 오히려 이승만 정부의 초기시절에는 남북통일과 진보정치운동을 한 독립운동가와 가까이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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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공화당 창당 모습. /한국학중앙연구원.

5·16을 혁명이라고 한 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

군사쿠데타로 3·15와 4·19를 짓밟고 박정희가 집권하자 노산은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 선언문 초안을 썼다. 그런데 창당한 지 한 달 만에 박정희는 주체세력 간의 암투로 인해 공화당 해체를 결심하였다. 4월 8일 언론에 해체 발표를 하기 위해 당의장 김정렬은 창당 선언문 초안을 써준 노산을 찾아가서 해체 성명서를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이 문제는 우여곡절 끝에 발표시간 직전에 취소되었다.

민주공화당 창당 선언문에서는 '일인 일당을 위한 국헌의 농락과 역사상 유래없는 부정선거의 연속으로 항구적 집권을 꿈꾸던 독재정권과 이념의 빈곤 및 부패로 걷잡을 수 없는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여 조국을 누란의 위기로 쓸어 넣고 말았던 무능정권은 한국의 민주화와 근대화의 지상과제를 저버리고 조국의 역사 위에 커다란 상처를 입히고도 오히려 뉘우침이 없었음을 우리는 눈여겨 보아왔다…… 정치 상황 속에서 4·19와 5·16 혁명이 일어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이 아닐 수 없다'고 5·16 쿠데타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4·19와 5·16을 모두 '백척간두에 선 조국의 운명을 바로잡고 민족중흥의 대업을 이룩하려는 민족적 양심의 발로'이므로 '우리는 4·19와 5·16혁명의 이념을 계승하고 이 나라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의 꽃을 피게하기 위해 민주공화당 창당을 선언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실제로는 전혀 다른 4·19와 5·16을 똑같게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5·16을 혁명이라고 까지 표현하고 있다. 역사적 평가는 쿠데타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을 추모하는 이은상

추사 김정희가 살았던 시절에도 기회주의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1844년에 그린 세한도(歲寒圖)에는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익에 눈이 멀었다'고 하는 구절이 있다. 한두 번이 아니고 항상 그런 사람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자신의 생각을 펼치기 위해서는 항상 권력이 필요하다는 자기 논리가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람들이다. 지조와 변절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죽을 때까지 한 길로만 가는 경우를 지조라고 한다면 또 다른 길을 찾는 게 변절일 것이다. 물론 시대가 바뀌었다는 자기 논리는 있을 수 있다. 지조와 변절의 문제를 이은상과 김성숙의 관계에서 살펴볼 수 있다.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역임하였고 해방 후에는 단독정부를 반대하며 민족통일을 위한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한 운암 김성숙이 죽었을 때 추도시를 생전에 가까이 지내던 노산이 썼다. 시조시인 김복근은 심리적 이미지를 표현한 시라고 하면서 외로움이나 상상의 세계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정확히 표현하면 자신이 존경하는 운암을 그린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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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암 김성숙.


하늘에 구름이 간다

나도 그 구름같이 간다

물 속에 구름이 간다

나도 저 구름같이 간다

아무리 파도가 쳐도

젖지 않고 간다

산 위에 바위가 섰다

나도 저 바위처럼 섰다

비바람 뒤 흔들어도

꿈쩍 않고 섰다

 

운암은 노산보다 나이가 다섯 살 많다. 정찬주가 쓴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를 보면 노산이 '1960년 3월 부정선거를 획책한 이승만 대통령을 변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여 정치적으로 생애 최대의 곤경에 빠졌을 때 운암은 등 돌리지 않고 그를 찾아와 지인들에게 용서를 구하라고 타일렀으며 한 번의 실언으로 일제강점기 때 감옥에 갇혔던 항일의 이력이 묻혀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던 것이다' 고 기록돼 있다. 이 책은 소설 형식으로 쓴 실록인데 첫째 장부터 노산이 등장한다. 운암을 생각하면서 심란해하는 노산의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운암은 대범하면서도 세심한 성격이었다. 노산의 큰 귀를 보고는 부처님의 귀라고 추켜 세워주기도 했다.

김성숙이 죽기 6년 전에 항일동지 구익균은 성동구 구의동에 있는 자기 집터의 일부인 20평을 운암에게 내어주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지인들이 운암이 기거할 10.5평의 오두막을 짓기 위해 시인 구상, 노산을 포함하여 최덕신, 최태섭, 김홍일, 설원식, 안춘생 등 항일동지 31명이 모금에 참여했다. 운암은 노산에게 집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했다. 노산은 망설이지 않고 여러 개의 당호를 생각하다가 하룻밤을 보냈다. 다음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피우정(避雨亭)을 선택하였다. 평생 가난과 고독의 비를 맞고 살아왔지만 앞으로의 여생은 비를 피하는 집에서 안락하게 살라는 축원이 담긴 당호였다. 방 한 칸, 부엌 한 칸의 비나 겨우 피하는 집이어서 당(堂)이라고 하지 않고 정(亭)자를 붙였다. 대문 옆에 걸려있는 편액도 노산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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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계사에서 열린 운암 김성숙의 장례식.

1969년 4월 12일 운암이 죽었을 때 그의 집 피우정에는 많은 조문객들이 모였다. 노산이 마당 안으로 들어왔을 때 먼저 와 있던 몇 명은 보기 싫다고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친일파를 감싼 이승만에 대한 분노를 노산에게 전가한 것이다. 노산 역시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박태일 교수(경남대)는 노산을 두고 '당시(1967년경) 권력 가까이서 가장 매끄럽게 나돌았던 기생문인'이라고 하였다. 마산 성호초등학교 친구인 목발(目拔) 김형윤은 이은상을 가리켜 '주구(走狗) 같은 놈'이라며 싫어했다. 김형윤의 유고집인 <마산야화>가 1973년 12월 5일에 발간되었는데 이 책의 서문을 쓴 노산 이은상은 김형윤을 '꽃 피듯이, 잎 지듯이, 바람 불 듯, 구름 가듯, 아무런 조작도 없이, 어리고 매인데 없이 행주야와(行往野臥)에 제멋대로 살다 간 자유방랑, 목발기인' 김형윤, <마산야화(馬山野話>, 만산문화원(1996년), 341쪽이라며 옛 벗과의 정을 되새겼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님 웨일스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본명 장지락)은 '내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금강산에서 온 붉은 승려 김성숙이었다'고 하였다. 김성숙은 김산보다 7살 위였다. 중국의 3대 혁명음악가인 정율성의 후원자이기도 했다. 운암에게 있어서는 좌와 우를 포함한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조국독립과 민족독립 앞에 부수적인 방법론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시대를 살아오면서 그에게 사회주의, 공산주의는 조국독립 혁명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김구 선생이 1949년 암살되기 몇 달 전 운암의 대쪽처럼 올곧은 성품을 높은 산과 긴 강에 비유하여 경교장으로 찾아온 운암에게 '산고수장(山高水長)'이라는 글씨를 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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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우정 낙성식 안내장에는 이은상이 이름을 명명했다고 기록돼 있다.

운암을 향해 추모시,

추도사와 묘비문·묘비명도 작성한 노산

노산은 '운암 김성숙 선생을 哭하다' 는 제목의 추도사를 썼다. 추도사에서 '일제시대 역사의 어둔 밤을 지켜주던, 독립정신의 값진 별이, 또 하나 이 하늘 아래서 사라져갔다'고도 했고 '불굴의 지조로써 자기를 지키고 남을 맑히던 깨끗한 스승이, 또 한 분 이 땅에서 사라져갔다'라고도 말했다. 그리고 '운암이란 이름의 굽힐 줄 모르던 지조인(志操人) 한 분이 끼쳐준 감명과 인상만이 벗들의 가슴마다에 서려 있을 따름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노산이 말한 지조는 과연 어떤 것인가?

1959년이었다. 동지와 제자들이 마련한 조촐한 회갑잔치에서 운암은 노산에게 붓을 쥐여주며 즉흥시를 청하였다. 노산은 이 일은 운암이 자신을 항일동지로 인정해주었다고 감사하면서도 미안해했다. 왜냐하면 노산은 늘 운암의 항일투쟁에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정찬주는 이 부분에 대해서 평소 노산이 '자신이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던 것이나 해방 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경찰서에 붙들려 있다가 광복을 맞은 것이 중국 대륙으로 건너가 쫓기는 맹수처럼 반생을 항일투사로 살아온 운암에 비하면 부끄러운 이력이기 때문이었다' 고 하였다. 일제시대의 암흑기에 '달걀로 바위 치기보다 더 가망 없는 싸움에 수많은 사람들이 떨쳐나섰다는 것을, 그들이 이름 없고 빛나지도 않으면서 굶어 죽고 맞아 죽어 가면서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는 것을' 운암을 보면서 노산은 절실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운암의 사망을 계기로 독립운동가에 대한 정부의 무관심을 질타하는 여론이 일어났고 신문에서도 두 번의 톱기사를 연속적으로 보도된 후에야 정부 총무처는 운암 장례식을 사회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그러나 서울시는 광장 사용을 허락하지 않아서 결국 조계사에서 하였다. 노산이 추도사를 애끓게 읽었을 때 유족과 일부 조객들이 오열하였다. 1년 후인 1970년, 1주기 추도식을 하면서 경기도 파주에 있는 운암의 묘역에 묘비를 세웠는데 기단의 검은 돌에 새긴 묘비명도 추모시, 추도사와 같이 노산이 썼다. 노산 이은상이 쓴 '김성숙 묘비명' 은 그의 삶을 명료하게 보여준다.

조국광복을 위해 일본제국주의에 항쟁하고 정의와 대중복리를 위해 모든 사회악과 싸우며 한평생 가시밭길에 오직 이상과 지조로써 살고 간 이가 계셨으니 운암 김성숙 선생이시다. …… 귀국한 뒤에도 민족통일을 위해 사상분열을 막기에 애썼으며 최후에 이르기까지 20여 년, 정치인으로, 사상인으로 온갖 파란을 겪으면서도 부정과 불의에 추호도 굽힘 없이 살다가 1969년 4월 12일, 71세로 별세하자 모든 동지들이 울며 여기 장례지냈다.

장례위원회 회장은 유진오, 부회장은 김성곤(공화당 재정위원장)과 김현옥(서울특별시장) 등 14명, 집행위원장은 양일동 의원이었으며 장건상과 윤보선 등이 고문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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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1969년 4월 15일 자 운암 김성숙 사망 기사.

운암은 민주공화당 입당을 거절,

노산은 창당선언문을 작성

언론인 출신 김재명은 <한국 현대사의 비극>에서 70 평생에 달하는 김성숙의 삶을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요약한 바 있다. '진보적 민족주의자'는 소위 '좌파 민족주의자'를 달리 표현한 것이다. 한평생 가시밭길에서 오직 이상과 지조로 살다가 사람. 운암 김성숙. 그만큼 한국근대사에서 독특한 존재이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자격으로 귀국한 지 몇 달 뒤 운암은 임정을 탈퇴하였다. 왜냐하면 임정이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국민대표 민주위원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김성숙은 김원봉, 장건상 등과 함께 민주주의 민족전선에 참여하였다. 민전은 자주, 민주, 통일, 독립 등 4대 노선을 추구하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중간파였다. 운암은 전국을 다니면서 강연을 하다가 군정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1946년 미군에 체포되어 전주형무소에서 6개월 징역을 살았다. 조국에서의 첫 번째 수감생활이었다. 두 번째는 1957년 민주혁신당을 창당한 뒤 간첩사건의 누명으로 6개월 동안 구속당하였고, 세 번째는 1961년 1월에 통일사회당을 창당한 뒤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나 혁신계 인사로 분류되어서 아무 죄 없이 10개월 동안 구속당하였다가 군사혁명재판소에서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 석방된 지 얼마 뒤 군인들이 찾아와 창당할 예정인 민주공화당에 입당하여 요직을 맡아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김성숙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쿠데타를 일으킨 군사정권이 만드는 당에 입당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뿌리 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은상은 1963년, 민주공화당 창당선언문 초안을 썼고 10·26이 일어나기까지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했다.

민주공화당에 참여하고 안 하고는 각자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면 된다. 마찬가지로 이승만 대통령을 지지하고 안 하고의 문제 역시 각자가 선택할 문제이다. 다만 종전에 정치적인 입장이 같았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배신자라는 욕을 먹을 수는 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정치적 입장이 아니고 지조이다. 항일운동을 평생 해온 입장에서 볼 때 친일파를 감싸주는 동시에 친일파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지지는 변절인 것이다. 김성숙의 지조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노산이 동료들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변절한 이유는 무엇일까? 권력에서 거세당한 추사 김정희를 변함없이 섬겼던 제자 이상적의 지조는 세한도에서 동시대의 아픔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노산이 쓴 추도시에서는 슬픔은 느껴지지만 지조에 대해서는 진정성을 믿을 수 없다. 이승만 대통령의 보호를 받고 있는 친일파의 입장에서 볼 때 크던 작던 항일운동의 경험이 있는 사람이 반드시 필요하였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산의 입장에서는 해방 직후에 선택한 언론활동을 중단하면서 단독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는 정당활동도 달라졌다. 김구 선생의 서거 이후에는 한독당 활동을 할 수 없었으며 6·25전쟁 이후에는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이승만을 노골적으로 지지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는 정당활동 보다 단체활동, 문화활동을 통하여 집권세력, 분단세력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노산은 자신이 선택한 길을 새길이라고 정리했고 새 나라 건설을 위해 권력자와 함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지조보다 중요한 노산의 '새길론'과 강력한 '지도자론'

노산은 극우와 극좌를 비판하고 중도를 외치며 강대국의 힘이 아니라 민족자주역량을 키워 남북통일 하자는 운암의 신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민족자주노선은 같았지만 노산은 극우를 선택하면서 강한 정부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인하여 독재자를 지지하였다.

노산은 1960년 3·15의 부정선거가 있기까지 문인유세단을 조직하여 박종화, 김말봉, 조연현, 황성수 등과 함께 전국을 다니면서 이승만, 이기붕 정부통령 후보의 당선을 위하여 지지유세를 하였다. 1961년에 쓴 새길론과 새나라 건설을 위해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그의 소신은 운암의 지조와는 완전히 다른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산은 운암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생전에 운암은 병마에 시달리면서 제대로 치료를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러나 일본군 장교 출신의 박정희에게서 자신의 독립운동 사실을 인정받기 싫어서 서훈 신청을 아예 하지 않았다. 1982년에야 운암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더니 운암이 죽은 지 35년이 지난 2004년 파주 유택에 있던 운암의 유해가 마침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로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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