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놀기에 딱 좋은 계절이다. 예전엔 그랬다. 가을 수확을 끝내고 나면 그때부터 농한기다. 봄부터 가을까지 땀 흘려 일한 농부들은 겨울 만큼은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구들방 따끈따끈하게 데울 장작 마련하는 일, 밥 짓는 데 필요한 '갈비' 해오는 일만 마무리되면 봄이 올 때까지 대체로 편안한 겨울이었다. 어른들은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새끼를 꼬거나 소일거리 찾아 이리저리 마실 다니는 일이 일의 전부였다. 아이들은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냇가도 놀이터였고, 집 앞 타작마당도 훌륭한 놀이터였다. 자치기, 연날리기, 썰매 타는 일이 주된 놀이였다. 앞산 언저리를 맴돌며 토끼 찾아온 산을 헤매는 경우도 많았다. 지금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어렸을 적에 이렇게 놀았다고 말하면 아이들 말로 '개부럽'이라며 입술을 씰룩거린다.

그 시절엔 아래채에 살던 소도 마찬가지였다. 겨울이면 사람만큼이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소는 사람을 도와 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동물이었다. 경운기가 나오기 전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농사일을 함께 해왔다. 농사일에 농기구와 소를 이용한 기록은 신라 눌지왕 22년(서기 348년)으로 전해진다. 무려 1,600년 동안 일을 해왔던 것이다. 소를 대하는 사람들 태도와 대우도 최고였다. 소는 자기만의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외양간이다. 예로부터 소는 집에서 지내는 머슴처럼 사람대접받으며 식구로 함께 살아왔다. 장정 열댓 명의 일을 할 수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에 얽힌 이야기들은 무수히 많다. 대표적인 동화는 '소가 된 게으름뱅이'다. 줄거리를 요약해 보면 이렇다.

123.jpg
▲ 꽃 양귀비와 소.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어느 게으름뱅이가 부인에게 명주 두 필과 엽전 닷 냥을 받고 소를 구해 오겠다며 집을 나섰다. 그러나 사실 게으름뱅이는 이것으로 편하게 놀다 들어올 생각이었다. 길을 가다 노인을 만난 게으름뱅이는 노인이 만들고 있던 소 탈을 쓰게 되었다. 그런데 다시 소 탈을 벗으려고 해도 벗겨지지 않고 소 울음소리만 났다. 노인은 소가 된 게으름뱅이에게 일을 시키고는 소를 팔면서 상대방에게 무를 먹이면 안 된다고 했다. 소는 여름내 힘들게 일하고 가을에 무밭에서 우연히 무를 먹고 소 탈이 벗겨져 다시 사람이 되었고, 집으로 돌아와 열심히 일하고 살았다.

지금 어른들이 어렸을 때부터 무척이나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아무리 소리쳐도 주인이 못 알아듣고 죽도록 일만 시키는 대목에서 살짝 소름이 돋았던 기억도 난다. 게으름 피우다 잘못하면 소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부리던 소의 고달픈 일상이 퍼뜩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소는 태어나자마자 순식간에 벌떡 일어나 뛰어다닌다. 천방지축 사방을 돌아다니며 집 안을 쑥대밭으로 만들 때도 있었다. 장독대로 뛰어가는 일은 결사코 막아야 했다. 하지만 소의 자유로움을 오래가지 않는다. 코를 뚫어 코뚜레를 하고 길을 들이기 때문이다. 코뚜레는 주로 노간주나무로 만들었다.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향나무나 낙엽송, 다래나무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 물에 불린 노간주나무를 휘어서 구멍을 뚫어 끼운 후 못을 박아 고정한다. 2년에서 3년 정도 쓰고 나면 다시 갈아 끼운다. 요즘은 쇠로 만든 코뚜레를 쓰기도 한다. 소는 코뚜레를 하는 순간부터 사람 손에 이끌려 일을 해야 하는 숙명에 처하고 만다. 어른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코뚜레를 꿰어야 되겠네!" 하는 말은 가장 공포스러운 말이기도 했다. '소가 된 게으름뱅이' 동화를 여러 번 듣고 난 후에는 더욱 그랬다. 강원도 삼척에서는 단오를 '소 코뚜레 끼우는 날', '소 시집가는 날', '쇠 코 뚫는 날', '소 군둘레 끼우는 날'이라 해서 음식을 차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황소고집을 꺾고 일을 시키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코뚜레를 끼우고 난 후에는 굴레를 씌웠다. 굴레는 말이나 소를 부리기 위해 머리와 목에서 고삐를 걸쳐 얽어매는 줄이다. 이때부터 소는 죽기 전까지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처하고 만다. 소는 코뚜레와 굴레만으로 일만 하는 고분고분한 가축으로 만들긴 어렵다. 부리에도 망을 씌워야 한다. 고구마를 캐거나 모내기할 땐 부리망이 꼭 필요했다. 소는 틈만 나면 주변에 있는 농작물을 그 큰 입으로 싹둑 잘라 먹는다. 농부가 한눈 파는 순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남의 밭이나 논에 있는 벼나 보리, 콩잎, 고구마 잎을 혓바닥으로 훑어 먹으면 십중팔구 실랑이가 벌어진다. 부리망은 가는 새끼를 엮어서 입 모양에 맞게 그물처럼 만들어 씌우고 끈으로 묶어 목에 고정시킨다. 어린 시절 일하는 소를 잡고 앞서가다 낭패를 당했던 기억이 난다. 어린 마음에 배고파 허덕이는 소를 방치했다가 소보다 더 크게 야단을 맞기도 했다.

123.jpg
▲ 소.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농사일이 힘들 때 소는 거품을 문다. 야속하기만 한 주인을 원망하는 눈초리로 숨을 헐떡거리며 눈망울을 부라린다. 한번 쓰러지면 일어서기 힘들다는 사실을 아는 농부는 잠시 일을 멈춘다. 부림을 당하는 소나 부리는 농부나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다시 채찍질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고삐를 아래위로 치면서 '이랴'를 반복한다. 고삐를 세게 당겨 '워'라고 달래면 소는 멈춘다. 죽을힘까지 다해 일한 소는 꽤나 융숭한 대접을 받는다. 농부는 정성스레 소죽을 끓인다. 큰 가마솥에 볕 짚을 썰어 넣은 후 콩이나 된장을 양념처럼 넣는다. 소죽은 아궁이에 불을 지펴 한참을 끓여야 한다. 소죽 담당이 되는 날은 TV에서 방영되는 인기 만화 보는 것도 포기해야 한다. 아침·저녁 볕 짚 써는 일도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자칫 잘못하다간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예리한 작두날을 피하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볕 짚 써는 일은 되도록 어른들이 담당한다. 꽤나 긴 시간 동안 기다리다 보면 가마솥에서 주르륵 눈물이 난다. 소죽이 거의 완성되었단 신호다. 풀이 나지 않는 겨울엔 소죽 끓이는 일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요즘은 가마솥에 소죽 끓이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대신 발효시켜 만든 '소 김치'를 대신 먹인다. 소죽 대신 사료가 소에게 제공된다.

파릇파릇 풀이 돋아나는 봄이 되면 소를 몰고 풀을 먹이러 나간다. 둑방이나 산에 풀어 놓으면 알아서 잘도 뜯어먹는다. 가만히 살펴보면 맛있는 풀과 맛없는 풀을 소는 정확히 안다. 먹어서는 안 되는 풀은 입에 대지도 않는다. 소가 좋아하는 풀은 콩과 식물이었던 기억이 난다. 자귀나무 잎을 제일 좋아한다. 그래서 자귀나무를 '소 쌀밥' 나무라 부르기도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은 소 꼴부터 베야 했다. 소 꼴은 주로 부드러운 억새나 바랭이 종류였다. 다급한 나머지 먹지 못하는 풀을 베어 먹이면 소에게 탈이 날 때도 있었다. 식물 공부의 시작은 소 꼴 베는 일로부터 비롯되었던 듯하다. 소가 좋아하는 식물이 어떤 종류인지 어른들이 일러 주기도 했다. 처음엔 지게를 지고 다니며 풀을 운반하다가 리어카를 이용하기도 했다. 남의 집 논둑에 난 풀을 베었다가 논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안타까운 일도 있었다. 그래도 자칫 게으름 피우다 소가 되는 일에 비하면 꾸중 듣는 일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참 오래전 이야기다.

어렸을 적 소에 얽힌 에피소드는 끝이 없을 정도로 많다. 중학교 때 쯤으로 기억된다. 시험 기간이 다가와 일하러 가자는 부모님 말을 듣지 않고 집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공부에 지쳐 잠이 들고 말았다. 밭일을 끝내고 돌아온 부모님은 먼저 외양간부터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소가 없어졌다. 시험공부 한다며 집 안에 있던 아들 녀석을 다그친다. 사라진 소의 행방을 알 길이 없던 아들은 울음을 터뜨리며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우두커니 외양간만 쳐다본다. 어둠이 내리는 가운데 소를 찾아 허둥지둥 사방을 살펴보고 있는데 다행히 소가 나타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네 사람 소행이었다. 소도둑이 소를 몰고 간 거였다. 처음엔 고분고분 소도둑을 따라나섰던 소가 어느 순간부터 말을 듣지 않더란다. 당황한 소도둑은 급기야 고삐를 놓쳤고 소는 자신이 살던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천만다행이었다. 풀을 먹이러 가서 소를 잃어버렸을 때도 소는 사람보다 먼저 집으로 돌아오기도 했었다. 우직하지만 영리함과 성실함의 대명사가 바로 소였다.

123.jpg
▲ 소 가족들. / 윤병렬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

우시장에 얽힌 이야기들도 재미있다. 우시장은 쇠전, 쇠장, 소시장으로도 불렸다. 전문 유통 상인들은 옛날부터 쇠장수, 소장수라 불렀다. 소를 감별하는 능력이 탁월한 사람들이었다. 일하는 소는 대부분 봄이 시작되는 2월과 3월에 많이 나왔다. 자식들 대학 등록금 마련을 위해 소를 내다 파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대학을 상징하는 상아탑을 '우골탑'이라 부르기도 했었다. 그 무렵 송아지 한 마리 가격은 15만 원 선이었다고 한다. 일을 잘하는 소의 경우는 40만 원에서 50만 원 선에 거래가 이루어졌다. 국립대학 등록금이 4만 원에서 5만 원 정도 하던 1970년대쯤 이야기다. 하지만 1980년대 솟값 파동 이후 소는 더이상 우골탑이 될 수 없게 되었다. 거의 50여 년 동안 솟값은 계속 떨어지고 사룟값만 올랐다. 이때부터 소의 운명은 바뀌었다.

지금 아이들은 소를 특별한 날 먹는 가족 회식의 도구 정도로만 여긴다. 어느 시점부터 그야말로 우후죽순처럼 한우집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생구로 대접받던 소의 시대가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요즘엔 외양간에 메여있는 소를 발견하기가 무척이나 어렵다. 농촌 마을을 지나다 간혹 보게 되는 소를 바라보는 시선도 안타까움으로 바뀌고 말았다. 어쩌다 만나게 되는 소들은 대부분 사료 먹여 키우는 도축용 소이거나 싸움용 소들뿐이다. 이제는 소에 관한 기억들을 오래된 옛 추억으로 간직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소와 함께했던 그 시절 그 마음만큼은 그대로였으면 좋겠다. 사람과 똑같이 하나의 소중한 생명으로 여겼던. 그래서 살아 있는 입, 생구로 대했던 그 마음만큼은 그대로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