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활동 경험 살려 고향 남해에 봉사하는 게 꿈"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의 박재성(44) 한국자동차해체재활용협회 전무이사는 협회 일과 정치 활동 둘 모두를 동시에 하고 있는 '투잡맨'이다. 고향인 남해에서 정치를 하고 싶다는 그는 "서울에 살지만 고향을 꾸준히 오가고 있었고 또 국회에서 근무하면서 지역과 관련한 법안·예산에 늘 관심을 두고 있었다"며 "기회가 되면 내년 남해군수 선거든 다음 국회의원 선거든 도전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자란 남해 사람

Q. 남해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략적인 자기소개를 부탁합니다.

"1973년 남해군 서면 서호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적 워낙 몸이 약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지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셨다고 해요.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할머니와 부모님, 두 분의 누나, 형과 저 4남매가 오순도순 살았습니다. 그러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작은 누나와 형이 먹고 살길을 찾아 서울로 가게 됐죠. 용산시장, 가락시장 등에서 과일 도매업을 하셨습니다. 저 역시 초등학교 입학 전, 그러니까 7살 때쯤 할머니, 큰 누나와 함께 서울로 왔구요. 학교는 숭문중학교, 환일고, 성균관대 법학과를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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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성 한국자동차해체재활용협회 전무이사. / 고동우 기자

Q. 어릴 때 서울에 자리를 잡으셨군요. 고향에 대한 기억이 많지 않을 거 같은데요.

"아닙니다. 서울에 왔지만 가족이 살던 집이랑, 전답, 선산은 남해에 그대로 있습니다. 아버지와 사촌, 저의 오촌·육촌 형님들, 누나들도 많이 살고 있구요. 외가도 남해군 서면 염해마을에 있습니다. 1년에 몇 번씩 벌초, 성묘 등을 하러 남해를 찾았습니다. 지금은 서울에서 4시간 정도, 어릴 때는 훨씬 더 걸렸지만 아버지를 따라 자주 오갔습니다."

Q. 원래 조상 대대로 남해에서 살았나요. 부모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전 박혁거세 70대손이자 밀양박씨 규정공파 26대손입니다. 수백 년 전부터 조상이 남해에 터를 잡았고 집안을 일으킨 것으로 압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지난 2012년 제가 안경률 국회의원 보좌관으로 일할 때 총선 준비로 부산-서울을 오가는 사이에 급성 심장마비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올해 노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아버지가 79세셨으니 제가 늦둥이인 셈이죠."

한나라당 지구당 일로 정치 첫발, 국회 인턴 100여 곳 지원

Q. 국회의원 보좌진으로 일했는데 원래 정치 쪽에 뜻이 있었던 겁니까. 법대 출신인데 좀 의외입니다.

"사법고시 준비를 했지만 2002년 대학 졸업과 함께 정리했습니다. 고시 공부 목적도 그렇고, 정치 현장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늘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 할머니가 꼬박꼬박 TV 뉴스를 챙겨보는 등 집안 분위기가 정치와 가까운 게 있었어요. 대학 다닐 때도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 결론을 내린 게 정치 현장이었구요. 그런데 어찌하다 보니 대학 졸업 즈음에 당시 한나라당 서울 송파을지구당위원장을 알게 됐고 그 인연으로 지구당 기획실장을 하게 됐습니다. 저의 첫 직장이었습니다. 월 50만 원 받고 일했지만 정말 재미있고 흥미진진했습니다.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Q. 국회의원 보좌진은 언제부터 하게 됐고, 또 어떤 의원을 보좌했나요.

"의회정치 현장도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인턴 모집공고를 보고 약 100여 곳에 지원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003년이었습니다. 제가 채용된 의원실은 김기배 의원실이었습니다.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셨죠. 그 후 이원창, 황진하, 안경률 그리고 경남 거제의 김한표 의원을 차례로 모셨습니다. 정책비서, 정책비서관, 정책보좌관 등으로 한 단계 한 단계 밟아 올라간 것이었죠. 18대 때 보좌한 안경률 의원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완벽주의자·원칙주의자여서 정말 고생이 많았지만 그만큼 또 배운 것도 많았습니다. 요즘도 서울에 오시면 종종 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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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과 아들, 장인·장모·처남·처제 등 처가 식구들과 함께. / 박재성 씨 제공

기회가 된다면 내년 지방선거 나설 것

Q. 올해 초 자유한국당 사천·남해·하동 지역위원장 지원도 하셨죠? 한국당 부대변인도 맡고 있고 정치 행보가 활발한데 내년 지방선거 또는 다음 총선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까? 직접 정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언제부터 하게 됐는지도 궁금합니다.

"정치를 시작한 이상 당연히 선거에 생각이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남해군수든 국회의원이든 도전하고 싶습니다. 지난 1월 당시 사천·남해·하동 지역위원장이고 현 자유한국당 국회의원인 여상규 의원이 탈당해 바른정당으로 간 후, 지역 조직이 엉망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당 지지율이 5% 정도밖에 안 될 때였어요. 많은 지역위가 지원자가 전무하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드디어 애당심을 발휘할 때가 됐구나 생각했습니다. 오랫동안 보수정당, 한국당 당원으로서 당을 지켜왔다고 자부합니다. 아주 조심스럽게 지원을 했습니다. 비록 김재철 전 MBC 사장이 위원장이 되었지만요. 겨룰 만하다고 봤는데 경력과 경륜에서 밀렸습니다. 저는 젊은 혈기와 열정으로 밑바닥부터 조직을 재구성해 민심을 되찾아올 수 있다고 봤는데 아쉽습니다. 전 그때 당의 선택이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김재철 위원장은 지역에 살지도 않고 조직 관리 의지도 전혀 없는 걸로 압니다. 요즘은 MBC 사장 시절 문제로 검찰 수사까지 받고 있더군요."

Q. 고향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오래 살았는데 굳이 남해에서 정치할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요?

"서울에 살지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꾸준히 고향을 오가고 있었고, 또 국회에서 근무하면서 남해지역 국회의원의 활동, 남해 관련 법안·예산 늘 관심 있게 보고 있었습니다. 정치를 하면 남해에서 해야 되겠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Q. 첫 직장부터 지금까지 보수정당에 쭉 몸담아 왔는데 특별한 이유 내지 배경이 있는 건가요. 

"젊은 사람 대부분이 진보나 개혁, 혁신을 말하죠. 저 또한 학교 다닐 때는 그랬습니다. 첫발을 어디에 내딛는가가 중요한 것 같아요. 그에 따라 인생도, 선택도 바뀌는 것 같습니다. 한나라당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고 줄곧 보수정당 국회의원실에서만 일하다 보니 보수 쪽에 제 생각을 맞춰나간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물론 지금 한국당이 어렵습니다. 회생하려면 당명부터 혁신적으로 바꿨으면 좋겠습니다. 수구·보수라는 이미지를 벗어야 해요. 박근혜 전 대통령 출당은 당연한 것이고 서청원·최경환 의원도 떠나야 한다고 봅니다. 누구든 책임을 져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 보수정당의 습성이자 문제입니다. 이대로 가면 내년 지방선거도 쉽지 않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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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월 중국 귀양 폐차장 현장 방문 및 워크샵에서 한국자동차해체재활용협회 이사들과 함께. / 박재성 씨 제공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기회는 없다"

Q. 어쩌다 보니 정치 이야기만 하고 있네요. 지금 하고 있는 일, 한국자동차해체재활용협회 전무이사직과 관련해 질문을 드리고자 합니다. 협회 일은 언제, 어떤 계기로 하게 됐는지 궁금하고 또 협회에 대한 간략한 소개도 부탁드립니다.

"2015년 국회 보좌진 생활에 매너리즘을 느끼고 학업에 대한 새로운 욕구가 생겨 국회를 떠났습니다. 동국대 일반대학원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한 건데 그때 우연찮게 한국자동차해체재활용협회에서 전무이사를 채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특별히 아는 분야, 인연이 있는 분야는 아니었지만 저처럼 국회 경험 등이 아주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쉽게 말해 폐차장을 운영하는 전국 520여 개 회원사가 회비를 내서 만든 단체예요. 제가 하는 일은 협회 소관 부처인 국토교통부와 환경부 정책에 맞춰 협회 관련 일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정부 정책 하나가 관련 업체를 폐업에 이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다양한 상황을 수시로 점검해서 방어할 것은 방어하고 법 개정이 필요한 것은 국회에 요청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전문 영역을 찾은 것이라고 할 수 있네요.

"제가 오기 전까지는 국회와 정부를 상대로 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민원을 내려 해도 엉성한 자료, 엉성한 논리로는 안 되거든요. 가령 경유차 배출가스저감장치라는 게 있는데 이전까지는 폐차할 때 정부에 반납해야 했습니다. 한데 이거를 택배 등으로 부치면 비용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이조차도 업체에 부담이 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정부가 고시금액을 정해주면 입금하는 형태로 제도를 바꾸었죠. 관련 법 개정을 통해서요."

Q. 앞서 일부 언급을 했습니다만 앞으로 삶의 계획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모든 게 준비하는 상황이고 경험을 쌓고 있는 과정 같습니다. 준비하지 않는 자에게 기회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회도 열정과 신념이 있는 자에게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협회 일도 계속해야 하고 남해도 꾸준히 오가며 기반을 쌓아야 합니다. 아무래도 서울에 오래 살았다 보니 텃세, 넘기 힘든 벽 같은 게 있습니다. 고향에는 남해미래발전전략연구소를 세워 그를 통해 사람도 만나고 지역 현안도 챙기고 있습니다. 미래를 준비해가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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