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함도' 생존자 김삼수 옹, 4년간 매일 중노동 시달려
가스폭발 등 죽을 고비 빈번…"법 없는 곳, 관리자 잔학"
탈출했다 피폭, 기구한 삶

"하시마서 도저히 못 있어서 탈출해서 나가사키서 노역을 했는데, 거기서 원폭 피해를 맞았소. 내 팔로 보소."

김삼수(95) 옹은 만나자마자, 팔과 다리를 걷어 보였다. 나가사키항에서 18㎞ 떨어진 섬 하시마. 면적 0.063㎢로 야구장 두 개 정도 크기의 작은 섬. 1916년 일본 최초 철근콘크리트 건물을 세우면서 아파트가 빽빽하게 들어선 모습이 마치 군함처럼 보여서 '군함도'로 불린 그곳. '지옥섬', '감옥섬'으로 불린 그곳 생활을 물으러 지난 1일 김 옹이 사는 고성집을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군함도'를 가까스로 탈출한 그에게 다시 원폭 피해라니. 그의 삶은 그렇게 기구했다. 다치고 병든 몸으로 그는 '말로는 다 못할' 그의 삶을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강제 동원되기 전 그는 부모와 6남매와 함께 농사지으며 살았다. 그는 다섯째였다. 어렵게 농사를 지었지만, 일본이 공출로 다 빼앗아갔다. 가난했던 그는 동네에서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모집책의 거짓말에 속아 끌려갔다. 고성에서만 160명이 동원 차에 올랐다. 밤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다.

경남 유일의 군함도 생존자로 알려진 김삼수 옹이 기억을 떠올리며 참혹했던 상황을 증언하고 있다.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규슈(구주)의 한 탄광에 도착해서 보니, 고성에서 함께 온 이들이 다 도망가고 40여 명만 남았다.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다. 늘 배고팠다. 강냉이 껍질 밥, 라면, 국수 등이 조금 나오는 정도였다.

고향 사람이 하시마로 도망가자고 부추겼다. 하시마가 어떤 섬인지 알지 못했다. 형편이 나아질 것이라 여겼지만, 오산이었다.

그는 하시마 시절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하시마는 법이 없다. 사람을 때려죽여도, 경찰이 와서 하는 게 없다. 하시마 탄광에서는 무조건 일만 시켰다. 죽어도 그만이었다. 사고로 죽는 사람이 많았다. 지하를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를 타야 탄광 굴로 들어갈 수 있다. 엘리베이터에 죽은 사람 올라오는 것 보고, 다시 석탄 캐러 내려가야 했다."

죽은 사람은 제대로 장례도 못 치르고, 어딘가에서 불 태워졌다고 했다. 그는 "일 안하면 때려죽이삐고, 조선에 편지 써서 석탄 굴 어디에 치여죽었다고 하면 그뿐이었다. 언젠가는 진주 사람이 사람을 때렸다가 잡혀서 꿇어앉아 있었는데, 관리자가 구둣발로 차서 다리가 썩었다. 관리자가 그만치 독했다"고 말했다.

4년간 하루 8시간에서 12시간까지 일했다. 10명 정도가 한 방에서 지내며 생활했다. 월급을 주긴 했지만, 온갖 명목으로 많은 부분 공제해 손에 쥐는 돈은 적었다.

굴에 구부리고 들어가서 괭이로 석탄을 파고, 나무를 받쳐서 더 들어가서 또 팠다. 하루에 캐야 하는 석탄 양이 정해져 있어서 그 일을 다 해야 마칠 수 있었다. 김 옹은 "가스 폭발 사고도 빈번했다. 돌이 떨어져서 치여 죽을까 봐 늘 겁이 났다. 큰 돌에 찍혀 죽을 뻔도 했다"고 기억했다.

공기가 탁하고, 축축하고 습기 많은 이곳에서 제대로 된 밥조차 먹지 못했다. 그는 "거기는 진짜 사람 살 데가 못 된다"고 치를 떨었다.

손과 다리에 석탄이 박혀가고, 더는 버틸 수 없을 만큼 힘들어지자, 한 사람이 그에게 돈을 주면 섬에서 나가는 배편을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성공했다.

하지만, 기구한 운명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가사키 우라카미라는 곳에서 고향 사람이 밥 짓는 일을 하는 '밥쟁이'로 있는 곳을 알아내서 찾아갔다. 일본 절을 짓는 공사를 하는 곳이었다. 하시마에서 나가사키까지 도망 온 그를 잡으러오는 이들도 있었다. 도망자였다. 그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기 전날도 그곳에서 일을 했는데,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비행기 폭탄이 떨어져서 죽을 뻔도 했다. 다음날 피난에 나섰다. 산골짜기에 누워서 쉬고 있는데 11시쯤 비행기 소리가 나고 뭔가 펑 터졌다고 했다. 원자폭탄이었다. 얼굴·팔·다리가 탔다. 피난 가지 않은 동료를 찾아갔더니 살가죽이 다 벗겨진 채 타 있었다. 그는 "뜨거운 물이 온 몸에 끼얹어진 것 같았다"며 고통스러운 기억을 되짚었다. 병원에서 2주 정도 치료를 받았다.

불에 탄 얼굴에 붉은 약을 바르고, 고름이 나온 얼굴을 하고 다녀서 사람들이 다 쳐다볼 정도였다. 모아둔 돈을 다 털어서 간신히 작은 배를 마련해서 마산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만신창이가 돼 돌아온 그를 맞았다.

그는 "신세를 조졌다고 생각하고 왔다. 돌아와서 보니, 같이 알고 지내던 고향 사람은 아무도 못 돌아왔더라. 결혼해서 지금까지 자식을 두고 살고 있다. 내가 오래 사니까 자식들 살아가는 걸 봐서 좋다. 그게 내 자랑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원폭 피해자이자, 일제 강제동원피해자로 정부로부터 일부 지원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고통받은 삶을 보상받을 수 있을까.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