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의 산 : 거대한 산, 영험한 산, 수려한 산 많고 많은 양산
함안의 산 : 함안 풍요의 땅 보듬은 병풍 닮은 산

거대한 산, 영험한 산, 수려한 산 많고 많은 양산

양산의 산 

경남의 동남부에 자리 잡은 양산은 북으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쪽은 낙동강을 끼고 밀양과 김해시, 동남쪽으로 부산광역시 기장군과 금정구와 접하고 있다. 경남 동부에 있는 지자체 가운데 산지가 가장 많은 고장인 양산의 지형은 양산천을 중심으로 영축산맥과 원효산맥(천성산맥)이 우뚝 솟아있다.

울주군 언양면 신불산에서 시작된 영축산맥은 영축산~시살등~염수봉~오봉산으로 이어지다 낙동강에서 끝을 맺는다. 대표 산인 영축산은 '영남 알프스' 준봉의 하나로 거대한 성채(城砦)를 연상케 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인 통도사와 13개의 암자를 거느린 영험한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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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 정상에서 내려서 신불산으로 향하는 길. 발아래 신불평원이 넓게 펼쳐져 있고 저 멀리 신불산이 우람하게 마주하고 있다. / 유은상 기자

원효산맥은 울주군 삼동면과 양산시 하북면의 경계를 짓는 정족산에서 시작해 천성산~금정산으로 이어진다. 원효산맥 중 가장 높고 험준한 천성산은 원효대사와 관련된 지명으로 수많은 전설을 담고 있다. 양산천과 회야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밖에 원효대사의 마지막 수도지로 알려진 울산광역시와 양산시 명곡동에 걸쳐 있는 대운산, 능선과 능선으로 이어지는 비탈의 경사가 심해 부산 근교의 3대 악산(惡山)으로 꼽히는 토곡산은 남알프스 주능선과 무학산에서 신어산에 이르는 낙동정맥의 이름난 산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전망이 뛰어나다. 천성산, 영축산과 함께 양산의 3대 명산인 천태산은 탄성을 자아내도 모자랄 만큼 그 광경이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하다는 '낙동강 낙조'로 유명한 경관을 자랑한다.

이렇듯 장엄한 산세와 깊은 골짜기 때문에 양산은 예로부터 '산수 수려하고 청량한 고장'으로 불렸다. 양산 사람을 두고 인내심이 강하고, 의리와 절개를 지키는 성격이라고 표현한 것도 산수와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두 줄기 산맥 사이로 사람이 스미고 도시가 흐른다

양산은 부산·울산 연계도시로 성장하면서 도시 이미지가 강하다. 하지만, 임야 비율이 무려 75%, 경남 동부에서 가장 산지가 많은 곳이기도 하다. 낙동강 제1지류인 양산천이 양산을 남북으로 가르고 있다. 이를 따라 35번 국도와 경부고속도로가 나란히 달린다. 양산천을 가운데 두고 동서 양쪽으로 험준한 산맥이 늘어섰다. 동쪽은 천성산을 중심으로 한 원효산맥, 서쪽은 가지산, 영축산, 신불산 등 영남 알프스 산군(山群)을 포함하는 영축산맥이다. 두 산맥 모두 단층운동 지역에 속해 지각이 충돌해 끊어지고 어긋나면서 형성됐다. 경치가 뛰어나고 보존가치가 높아 상당 부분이 가지산 도립공원으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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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박재에서 영축산 정상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뾰족한 바위 봉우리. 깍아지른 벼랑과 그 너머 풍경이 시원스럽다. / 유은상 기자

양산단층과 영축산맥

영축산맥은 양산단층의 지배 아래 있다. 양산단층은 경북 영덕에서 시작해 경주, 양산, 부산 낙동강 하구까지 170km 정도 이어진다. 지난해 9월 12일 전국을 들썩였던 규모 5.8의 경주 지진이 바로 이 단층에서 일어났다. 이 지진으로 양산단층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양산단층이 만든 최대 산군이 1000m 이상 고봉 7개로 이뤄진 영남 알프스다. 이 중 신불산(1159m), 영축산(1081m)이 울산 울주군과 경계를 이루며 양산에 걸쳐있다. 이 중 우리나라 3대 사찰 통도사를 품은 영축산은 양산을 대표하는 산 중 하나다.

양산에서 영축산맥은 영축산을 지나 시살등(981,m), 오룡산, 염수봉을 거쳐, 토곡산과 그 아래 오봉산에서 각각 낙동강을 만난다. 이들 산은 대체로 동쪽 사면이 급경사고, 서쪽이 완만한 모양새다.

영축산 줄기는 맑은 날 전망이 기가 막힌 시살등을 지나 오룡산(959m)으로 이어진다. 오룡산은 영남 알프스 최대 골짜기 배내골을 끼고 있다. 산줄기가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염수봉(816m)을 일으켰다. 염수(鹽水)는 우리말로 '소금물'인데, 옛날에 산불이 자주 일어나서 주민들이 소금단지 2개를 묻었다 해서 얻은 이름이다. 또는 천지개벽을 할 때 바닷물이 이 산까지 올라왔기에 지은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서쪽 밀양으로 흘러가는 단장천과 동쪽 양산천으로 합류하는 내석천이 이 봉우리에서 시작한다.

염수봉에서 남서쪽으로 줄기가 뻗어 매봉산(703m), 금오산(766m), 천태산(631m)이 밀양과 경계를 이루며 낙동강에 떨어진다. 이 중 천태산은 중국 저장성(浙江省·절강성)에 있는 천태산을 닮아 같은 이름을 얻었다고 전한다. 염수봉에서 동서로 뻗은 줄기는 오봉산(533m)을 끝으로 낙동강을 만난다. 오봉산은 봉우리가 5개라서 붙은 이름이다.

천태산과 오봉산 사이에는 토곡산(855m)이 낙동강과 맞닿아 있다. 비탈과 경사가 심해 '부산 근교 3대 악산(惡山)'으로 꼽힌다. 전망이 탁 트이는 곳에 서면 낙동강과 영축산·오봉산·금정산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울산단층과 원효산맥

양산천 동쪽에서 남북으로 길게 자리 잡은 원효산맥은 울산단층의 지배를 받고 있다. 영축산맥보다 낮고 경사가 완만한데, 이쪽 산맥이 더 오랜 세월 풍화작용을 받았기 때문이다. 울산 울주와 경계를 이루는 정족산에서 시작해 천성산을 지나고 부산 금정산에서 낙동강을 만난다.

정족산(鼎足山·748m)은 솥 정(鼎), 발 족(足)이라는 한자 그대로 '솥발산'으로 불렸다. 가마솥을 얹어 놓는 솥발처럼 생겨서 얻은 이름이다. 또는 옛날 온 세상이 물이 잠겼을 때 잠기지 않은 정상부가 솥발을 닮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옛사람들은 영축산맥에 있는 영축산에서 줄기가 뻗어 정족산으로 이어진다고 봤다. 그래서 조선시대 지도들은 대부분 영축산을 정족산과 연결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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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성산 홍룡사 관음전 옆으로 홍룡폭포가 흘러내리고 있다. / 유은상 기자

천성산(千聖山·921m)은 우리나라에서 동해 일출을 가장 먼저 볼 수 있는 곳으로 실질적인 양산의 대표 산이다. 조선시대 대부분 자료에는 원적산(圓寂山)으로 기록됐다.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현재 천성산 제1봉을 원효산, 제2봉(812m)을 천성산으로 불렀다. 그래서 천성산을 원효산(元曉山)으로 부르기도 했는데, 원효산맥이란 말도 여기서 나왔다. 이후 양산시에서 두 봉우리를 천성산으로 통합했다.

천성산은 신라 고승 원효대사와 관련이 깊다. 천성(千聖)이란 이름은 원효대사가 당나라에서 건너온 스님 1000명에게(千) 화엄경을 설법해 모두 성인(聖)이 되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산 곳곳에 암자가 많은데, 특히 북서쪽 산줄기에 있는 내원사가 유명하다. 원효가 창건했다는 사찰로 지금은 통도사 말사다. 지난 시절에는 선승을 많이 내기로 유명했다. 한국전쟁 이후로 비구니 사찰로 중건돼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독특하고 고즈넉한 홍룡폭포가 있는 홍룡사도 사람들이 많은 찾는 천성산 사찰 중 하나다.

천성산은 정상부에 고산습지 화엄늪과 밀밭늪이 있는데 생태학적으로 가치가 높다. 이와 관련해 2003년 정부가 경부고속철도 공사를 하며 천성산에 터널을 뚫으려 하자 내원사 지율스님이 300일 넘게 단식농성을 하며 환경보호를 주장했다. 당시 지율스님을 대표로 한 천성산 지킴이들이 도롱뇽과 천성산을 소송 당자사로 공사착공금지 가처분신청을 하기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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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황산 기슭에 북정리·신기리 고분이 자리 잡고 있다. / 유은상 기자

양산 진산 성황산

양산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양산천 동쪽 천성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각각 사적 93, 94, 95호인 북정리, 신기리, 중부동 고분군과 주변에서 나온 유물·유적은 적어도 청동기시대부터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청동기 이후 낙동강 범람으로 양산천 하류에 질 좋은 들판이 형성되자 본격적으로 정착 생활을 시작했다. 조선시대까지 지금 중부동 일대가 양산 고을의 중심인 읍치였다.

조선 초까지는 천성산이 양산의 진산(鎭山·고을을 수호하는 산) 노릇을 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진산은 원적산(圓寂山)'이라고 적혀있다. 천성산을 말한다. 하지만, 천성산 자체는 산세가 넓고 높아 실질적인 진산 기능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유사시에 대피할 수 있을 만큼 가깝고 적당히 높은 고을 진산은 성황산(城隍山·331m)이었다. 조선 후기 발행된 <해동지도>는 읍치 동북쪽에 있는 이 산을 진산으로 기록하고 있다. 양산시립박물관 뒤편으로 북정동 고분군과 신기로 고분군이 기댄 바로 그 산이다. 성황산은 달리 북산(北山) 또는 서낭산이라고도 불렸다. 서낭은 마을을 수호하는 신을 말한다.

정상 주변에 사적 97호 신기리 산성이 있다. 신라시대 낙동강을 통해 경주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으려고 쌓았다고 한다. 성황산에서 남쪽으로 바로 보이는 봉우리가 동산(289m)이다. 공교롭게도 동산에도 비슷한 산성이 있다. 사적 98호 북부리 산성이다. 이곳 역시 신라시대에 왜구 침입을 막으려 만든 것이라 하는데 학자들은 두 산성이 동시대 것으로 본다. 실제 이 성황산에 있는 북정리, 신기리 고분군, 동산에 있는 중부동 고분군은 가야시대의 것이지만, 소장품을 보면 화려한 금장식 등 신라적인 부분이 많다. 양산 지역이 가야시대에도 일찍이 신라에 많이 기울어 있었다는 의미다.

현재는 성황산과 동산이란 이름을 거의 쓰지 않는다. 동네 주민에게 그저 산책하기 좋은 뒷산일 뿐이다. 성황산은 북정리, 신기리 고분군을 중심으로 산책로가 잘 만들어져있다. 북정리 고분군에서 나온 부부총과 금조총 유물이 양산시립박물관에 보기 좋게 전시돼 있으니 이것도 둘러볼 만하다. 북정리 산성이 있는 동산에도 동장산성길이라는 산책로가 마련돼 있어 시민들이 자주 찾는다. 정상으로 가는 길에 곳곳에 소나무가 빽빽하게 자란 중부동 고분군을 지난다. 정상에는 정자가 있어 양산시청을 포함한 시내가 훤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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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축산에서 만난 다람쥐. / 유은상 기자

바람에 일렁이는 초록 물결 마음까지 물들인다

영남 알프스는 가을이 제격이다. 영남 알프스 가을 억새밭을 보지 않고는 억새의 아름다움을 논하지 말라는 말까지 있으니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가을이 아니어도 눈 내린 겨울, 초록이 무성한 여름, 철쭉이 수놓는 봄, 어느 계절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 싱그러운 초록 평원은 가을과는 다른 느낌이 있다. 가을 억새밭은 다소 서정적이고 감성적이다. 한 해 생명을 다하고 사라지는 모습이 저녁노을과 아주 잘 어울린다. 그래서 다소 무겁고 우울한 느낌도 든다. 음악으로 따지면 단조 풍이라 하겠다.

반대로 여름철 초원은 다르다. 생동감이 넘치고 활력이 솟아난다. 청명한 하늘 아래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은 초록 파도를 연상시킨다. 그 바람은 가슴을 열고 들어와 어느새 초록의 피가 되어 몸속에 흐르는 듯하다. 영축산과 신불산 정상 평원에서 느낀 바람이 그랬다.

진경산수화 영축산

양산시 하북면·원동면과 울산시 울주군 삼남면에 자리 잡은 영축산(靈鷲山·1081m)은 불교 색채가 짙게 밴 명산이다. 정상의 독수리 부리 모양 큰 바위 때문에 영축산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 영축산은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한 인도의 산 정상 바위봉우리 그리타쿠타(독수리 바위)를 의역한 한자식 표기다. 영험할 영(靈), 독수리 취(鷲)를 합친 '영취산'으로 표기했지만 불교식 발음 '영축산'으로 읽힌다. 산 아래에는 우리나라 3대 사찰로 꼽히는 통도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산자락 곳곳에 암자가 펼쳐져 있다.

오랫동안 영취산, 취서산, 대석산 등으로 불렸지만 2001년 양산시 요청으로 지금의 영축산으로 통일해 사용하고 있다.

통도사를 지나 백운암 아래에서 길을 잡아 올랐다. 지도상 능선에 도달하는 가장 짧은 노선이었기 때문이다.

깊은 계곡 숲속 공기가 싱그럽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숲속 친구까지 뒤따른다. 등산객이 준 음식에 길든 다람쥐들이 강아지처럼 따라오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 노력한다. 가져간 과자를 발아래 놓으니 겁도 없이 채 간다. 잠시 뒤 다람쥐 동네에 소문이 다 났는지 더 많은 놈이 따라온다.

하지만 금세 이들을 거들떠볼 겨를도 없어졌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자니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눈썹에 맺힌 땀방울이 하나씩 떨어진다. 지도상 짧은 거리는 그만큼 경사가 가팔랐기 때문임을 깨닫게 된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고, 거친 숨은 동료와의 대화까지 차단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함박재가 가까워지면서 하늘이 열렸다. 몸이 힘든 만큼 보람은 더 컸다. 능선 오른쪽으로 깎아지는 절벽과 하늘을 향해 경쟁하듯 뾰족하게 솟은 바위가 눈길을 잡는다. 그 자체가 진경산수화다.

저 멀리 영축산 정상을 바라보며 2∼3개 작은 고개를 넘자 180%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넓디넓은 신불평원(영축평원)이 한껏 팔을 벌려 맞이한다. 신불평원은 영축산 아래에서 신불산까지 연결돼 있으며 그 면적도 3300㎡(약 100만 평)에 이른다.

정상 아래쪽에는 길게 돌무더기가 이어져 있다. 단조산성이다. <여지도서> 등에 언급되지만 언제 만들어졌는지 자세한 내용은 없다. 전설에는 산신 할매·할배가 하룻밤에 쌓았다는 설과, 임진왜란 때 아낙들이 치마폭으로 돌을 옮겨 쌓았다는 설 등이 전해진다. 대략 신라 때 축조한 것으로 짐작되며 임진왜란 때 동래성, 언양읍성 등이 함락되고 나서 의병들이 목숨을 걸고 지켰던 영남의 보루였다는 기록이 있다.

하늘 평원 신불산

영축산 정상에서 멀리 시선을 뻗어 본다. 왼쪽으로는 밀양 재약산과 천황산이 높이를 다투고, 앞쪽 신불평원과 신불산은 손에 잡힐 듯하다. 오른쪽 발아래에는 울산 울주군 언양과 양산 하북면 시가지가 희미하게 펼쳐져 있다. 기온이 높고 습한 날이라 시원한 전망을 보장하진 않았다.

그러나 크게 아쉽거나 마음 쓰이지 않았다. 신불산으로 향하는 내내 왼쪽으로 펼쳐진 초록의 향연만으로 충분했다. 이곳 단조고원습지는 복원을 위해 울타리를 쳐놓고 출입을 막고 있다. 정족산 무제치늪(울산 울주군)의 3∼4배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 고산습지로 각종 희귀 동식물이 자랐지만 사람들 등쌀에 생채기를 입었다. 조금씩 복원이 되고 있다지만 아직 다 아물지 않은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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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불재. / 유은상 기자

다시 언덕을 넘어서자 듬직한 봉우리가 마주한다. 그 아래로는 나지막한 골짜기가 누워있다. 신불산과 신불재다. 억새 숲 가운데로 나무 덱이 잘 만들어져 있어 제주도의 어느 오름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아래로 한발 한발 내려설수록 바람 세기가 더욱 강해진다. 이곳이 바로 바람길인 모양이다. 온몸을 깨우는 시원한 바람이 마음을 더욱 자유롭게 한다.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으면 바로 영화의 한 장면이 된다.

곧장 능선을 올라 신불산(神佛山·1159m) 정상에 선다. 울산시 울주군 삼남면·상북면과 양산시 하북면 경계에 있으며 영남 알프스 영축지맥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다. 신불산은 신령이 불도를 닦는 산이라 하여 붙은 지명이다. 정상은 왕뱅, 왕방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모두 왕봉을 말하는 것으로 정상에 묘를 쓰면 역적이 난다는 말도 전해진다.

신불산에서 오른쪽으로 내려서면 신불 공룡능선이다. 공룡의 등 비늘같이 뾰족뾰족 치솟은 바위 능선 위로 구름이 흐르면 거대한 공룡이 꿈틀대는 듯하다. 산악인은 이곳을 신불산 절정으로 꼽기도 하지만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며 산행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다시 신불재로 돌아와 가천마을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하산한다.

우리나라 3대 사찰 통도사, 문화재 800여 점 소장

통도사(通道寺·양산시 하북면)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불보(佛寶) 사찰'로 우리나라 3대 사찰이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여겨진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오면서 모셔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을 쌓았다.

창건 설화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사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자장율사가 이들을 제압하고 그 자리에 통도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대신 작은 연못을 만들어 용 한 마리만 남겨 절을 수호하게 했는데 그 연못이 지금의 구룡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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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박재를 지나 영축산으로 향하는 길에 시원하게 펼쳐진 신불평원을 마주하게 된다. 뒤편 왼쪽이 신불산이며 오른쪽이 영축산 정상이다. / 유은상 기자

통도사는 불법을 통달해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이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 탓에 영축산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의 산을 닮아 이름 지었다는 설도 전한다.

통도사는 가람과 석물 하나하나가 모두 문화재다. 경내에는 국보 제290호 대웅전과 금강계단, 보물 제334호 은입사동제향, 보물 제471호 봉발탑을 비롯해 병풍·경책·불구·불화와 고려대장경(해인사 영인본) 등 800여 점의 문화재가 소장돼 있다. 이것 또한 놓치지 말아야 할 관람 포인트다.

또 매표소 산문을 통과하면 왼쪽 자동찻길과 오른쪽 인도를 통해 절에 도달하게 된다. 각각 1∼2km 거리의 터널을 이룬 우람한 소나무 숲도 볼거리다.

그뿐만 아니라 영축산 기슭 곳곳에는 13개의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암자가 있다. 암자를 따로 찾아보는 암자기행도 색다른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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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도사 대적광전(왼쪽) 뒤편으로 영축산이 보인다. / 유은상 기자


함안 풍요의 땅 보듬은 병풍 닮은 산

함안의 산  

경남의 중앙부에 자리 잡은 함안은 동쪽으로 창원 북면, 남쪽은 창원 내서읍·진전면·진북면, 서쪽은 진주 지수면·사봉면·이반성면, 서북쪽은 의령 용덕면·정곡면, 북쪽으로는 낙동강을 경계로 창녕 남지읍·도천면·길곡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함안의 전체 지형은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은 '남고북저(南高北低)'로 함안의 3대 하천인 함안천·석교천·광려천 모두 남쪽에서 발원해 북쪽으로 흐른다.

함안의 산은 인접 시·군과의 경계를 이루며 군 전체를 감싸 안은 형국이다. 창원 북면과 경계를 짓는 동쪽은 천주산·작대산·무릉산, 진주와 마주한 서쪽은 방어산·괘방산·오봉산·미산령·백이산 등이 연봉(連峰)을 이루며 남쪽으로 뻗은 형세다. 남쪽은 군에서 가장 높고 가야시대 철(鐵) 생산지인 여항산·서북산·봉화산·광려산 등이 지맥을 이루며 창원 내서읍 등과 맞닿아 있다. 이와 함께 칠서·칠원·대산·산인면의 경계에 자양산과 안국산이 자리하고 있다. 의령과 경계인 법수·대산면은 특별히 내세울 산이 없다. 창녕과 마주한 칠서면도 그렇다. 세 곳 모두 낙동강을 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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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대한 바윗덩어리로 이뤄진 여항산 정상. 발아래 깍아지른 절벽과 시원한 전망에 감탄하게 된다. / 유은상 기자

함안의 주산(主山)이자 진산(鎭山)인 여항산(艅航山·770m)은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에 포함돼 있지는 않지만 어느 산과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산으로, 함안 군민의 자존심이다. 여항산을 오르는 코스는 봉성저수지 위 좌촌마을에서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개 코스가 있는데 어느 코스이건 무난하다. 소나무숲이 울창한 등산로는 지친 심신을 달래기에 그만이다. 정상부에 다다를수록 경사도가 심하지만 쉬엄쉬엄 오르면 그만한 보상이 따른다. 발아래 낭떠러지 때문에 초심자는 다리가 후들거리기도 하지만 사방으로 탁 트인 조망이 압권이다.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모를 정도로 뛰어난 풍광을 자랑한다. 함안 군민이 왜 여항산을 아끼고 자랑스러워하는지 몸이 먼저 알게 된다.

저마다 뿌리 깊은 역사 안고 우뚝 솟았구나

함안(咸安)은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때부터 불리기 시작한 이름이다. 다 함(咸)과 편안할 안(安), 한자 그대로 다 함께 편안하게 사는 세상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강물이 임금을 향해 북쪽으로 흐른다 해서 한때 역적의 땅이란 불명예를 안았다. 하지만, 강은 그저 낮은 곳으로 흐르는 것일 뿐, 이 땅에서 역적이 난 적은 없다. 도리어 후덕하고 순박한 이들이 평화롭게 삶을 일구었다.

함안 북쪽에 자리 잡은 남강은 동으로 대산면을 지나 낙동강과 만난다. 남쪽에는 여항산(770m)을 중심 산으로 한 낙남정맥이 북으로 팔을 뻗어 고을을 감싼다. 강과 산맥이 품어 만든 풍성한 들판이 칠원, 가야, 군북 분지다. 사람들은 선사시대부터 이들 분지와 함께 낙남정맥이 함안 땅에 펼쳐놓은 수많은 구릉에 기대 살았다. 강력했던 고대국가 안야국(아라가야)은 이런 배경에서 가야시대 맹주국으로 500년을 지속했다. 안야국의 옛 영광은 구릉마다 고분군이란 자취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산(山) 위에 솟은 산(山), 고분군

고분군(古墳群)이란 말 그대로 옛날 무덤이다. 보통은 고고학적 가치가 높은 것을 가리킨다. 대체로 가야와 신라시대 커다란 무덤이 모여 있는 것을 일컫는다. 함안은 대부분 지역에 두루 이 고분군이 있다. 전체적으로 130곳이 넘는다고 한다. 고분군은 주로 마을 주변 구릉(낮은 산) 위에 있다. 예컨대 함안군 가야읍 가야리 선왕골 고분군은 삼봉산(三峰山·271m) 남동쪽 사면에 있다. 가야읍 신음리 고분군은 괘안마을 북동쪽 구릉에서도 해발 30m 내외에 분포한다. 이들 구릉은 함안을 둘러싼 낙남정맥이 분지를 향해 내리뻗은 줄기다. 커다란 봉분이니, 산 위에 또 다른 작은 산이 있는 모양새다. 고분군이 있는 곳은 대체로 지석묘(고인돌)도 있는 곳이 많다. 함안 구릉들이 선사시대부터 중요한 삶터 노릇을 했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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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가야 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함안 말이산 고분군. 그 규모와 흔적만으로 당시 찬란했던 문화 수준을 엿볼 수 있다. 아름다운 능선을 자랑하는 고분군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산책길이다. / 유은상 기자

<함안군지>에 소개된 고분군은 42곳이다. 이 중 으뜸은 가야읍 말산리와 도항리에 걸쳐 있는 말이산 고분군이다. 말이산(末伊山)은 해발 40~70m 등성이로 이어진 길쭉한 구릉이다. 말산(末山)이라고도 한다. 아주 오래전에는 두산(頭山), 수산(首山)이라고도 불렸다. 뜻 그대로 머리 산인데, 머리의 옛말이 '마리'다. 결국, 마리를 소리 그대로 한자로 옮겨 말이산이 된 것이다. 여기서 머리란 우두머리를 말한다. 말이산 고분군은 안야국 왕의 무덤이 있는 산이란 뜻이다. 1587년에 당시 정구 함안군수가 펴낸 <함주지>(咸州誌·함주는 함안의 옛 이름 중 하나)에도 '세상에 전하기를 옛 나라의 왕릉이라 한다(傳古國王陵)'고 기록돼 있다. 왕의 무덤인 만큼 함안 지역 고분군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말이산 구릉에만 고분이 1000기 정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굴과 도시화로 어느 정도 훼손되기는 했지만, 1500년 전 만들어진 상태 그대로 잘 보존돼 있어 고대 역사를 실감하기에 손색이 없다. 그래서 말이산 고분군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 등재대상으로 선정됐다. 다른 함안 고분군 중에서는 칠원면 오곡리 고분군과 군북면 원북리 고분군이 규모가 크다.

함안 진산 여항산, 칠원 진산 작대산

조선시대까지 함안은 함안 고을과 칠원 고을로 나뉘어 있었다. 함안 고을 진산(鎭山·나라가 지정한 고을을 수호하는 산)은 여항산이다. 옛 고을의 중심지인 읍치(邑治)는 현재 군청이 있는 가야읍이 아니라 함안면 봉성리 일대다. 여항산은 읍치가 기대기엔 제법 멀다. 그래서 당시 읍치는 여항산에서 함안면 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산줄기 중 비봉산(飛鳳山)을 주산(主山)으로 삼았다. 지금 함안초등학교 뒷산을 말한다. <함주지>(1587년)를 편안한 정구 군수가 이 산을 봉황이 날아오르는 형국으로 보고 이름을 봉황산이라 지은 듯하다. 그는 이 봉황을 지키고자 읍 터 주변에 오동나무를 심고, 대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오동나무와 대나무가 봉황의 먹이라는 데서 착안한 풍수지리적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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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칠원읍에서 바라본 작대산. / 유은상 기자

옛 칠원 고을은 현재 함안군 칠원, 칠서, 칠북면과 창원시 지역 일부를 포함한다. 읍치는 칠원면 구성리 일대에 있었다. 칠원 고을 진산은 작대산(爵大山·687m)이다. 창원 북면과 경계를 이루며 천주산(天柱山·639m)과는 능선으로 바로 이어져 있다. 천주산까지가 옛 칠원의 영역이다. 작대산은 천지개벽을 하며 온 천지가 물에 잠겼을 때 산이 작대기만큼 남았다고 붙은 이름이다. 작대산은 또 청룡산(靑龍山)이라고도 불렸다. 작대산 골짜기에 산정이란 산골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옛날 용이 살다가 승천한 용지굴이 있는데 여기서 청룡산이란 이름이 나왔다. 옛 기록은 모두 청룡산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어 이것이 더욱 유래가 깊은 지명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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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인면 자양산 정상 표지석. / 유은상 기자

700년 꽃씨를 머금은 조남산

사적 제67호 성산산성(城山山城)은 함안 고대사를 현재로 이어주는 통로다. 여항산에서 가야 분지로 길게 뻗어나온 산줄기, 조남산(照南山 혹은 造南山·140m) 정상부에 자리한 옛 안야국의 성이다. <함주지>에는 가야국 옛터라고 기록했다. 안야국이 신라에 점령되었을 때 용감하게 싸우던 어느 장군이 패배를 원통해하면 이 산으로 들어온 후엔 흔적이 사라졌다는 전설이 전한다.

1991년부터 최근까지 발굴을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유물이 많이 발굴됐다. 가야시대보다는 신라시대 이후 유물이 대부분이다. 그 중 아라홍련은 옛 함안의 역사가 현대에 부활한 상징적인 꽃이다. 2009년 성산산성 유적지 안 연못에서 연꽃 씨앗이 여러 개 발굴됐다. 분석 결과 700여 년 전 고려시대의 것으로 밝혀졌다. 정성스런 노력 끝에 씨앗에서 싹을 틔우는 데 성공했고, 2010년 7월 첫 꽃이 피었다. 함안군은 이 꽃에다 옛 함안의 영광을 담아 '아라홍련'이란 이름을 붙였다. 주로 7~8월 함안박물관에 가면 주변에 흐드러진 아라홍련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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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라홍련. / 유은상 기자

자양산에 올라 함안을 굽어보다

함안을 떠나기 전 자양산(紫陽山)을 오른다. 정상 부근에 송신탑과 글라이더 활공장이 있는데, 활공장에서 바라 함안 풍경이 멋지다. 자양산은 산인면의 주산인데, 조선시대 지도마다 빠짐없이 등장할 만큼 중요한 산 중 하나였다. 옛 이름은 자구산(紫丘山)이다. 자양산에서 북쪽으로 보이는 너른 들판이 대산면(代山面) 평야 지대다.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지역이라 제방을 만들기 전에는 메기가 침만 뱉어도 홍수가 진다고 할 만큼 침수 피해가 심했다. 그래서 일부러 평야 이름에 뫼 산(山)을 붙여 대산이라 불렀다. 이름이나마 산을 만들어 홍수의 두려움을 떨치고자 한 것이다.

대산과 반대편으로 가야 분지를 사이에 두고 자양산과 마주한 산이 군북면에 있는 백이산(伯夷山·369m)이다. 옛 이름은 서산(西山)이다. 조선시대 임금 단종을 위해 절의를 지킨 생육신 중 한 사람인 어계(漁溪) 조려(趙旅·1420~1489)의 충절이 서린 산이다. 후세 사람들이 그를 중국 충절의 상징 백이숙제 형제에 빗대어 이 산을 백이산으로 불렀다고 기록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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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항산의 울창한 소나무(위)와 여항산 산딸기(아래). / 유은상 기자

드높은 격랑에도 흔들리지 않은 존재감

함안군 지형은 독특하다. 도내 대부분 지역은 임야 비율이 60∼70%에 이를 정도로 산지가 많고 주로 북쪽에 자리 잡아 북고남저 지형을 이루고 있다.

함안은 여항산(艅航山·770m), 서북산(西北山·738.5m), 오봉산(五峰山·525m), 방어산(防禦山·530m) 등 비교적 높은 산이 남쪽으로 이어지고 있다. 임야 비율도 52.14%(215.61㎢)로 다른 곳에 비해 적다. 북쪽으로는 낙동강과 남강이 흐르면서 남고북저 지형이 형성돼 있다.

특히 두 강으로 흘러드는 여러 지류를 따라 충적평야가 발달하면서 선사시대부터 싹트기 시작한 문화는 아라가야로 이어지면서 찬란하게 꽃피었다.

단순히 주어진 풍족한 환경 덕분은 아니었다. 강의 범람은 잦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 속에 탄생한 것이다.

이 때문에 함안 사람에게 산은 더 가치 있다. 지금이나 그때나 산은 물리적 심리적으로 든든한 배경이 됐다. 피난처이자 삶터였던 셈이다. 함안의 진산이자 주산인 여항산은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여항산에서 이어진 지맥과 그 산자락 아래에 터전을 만들었고 그 흔적은 성산산성, 말이산 고분군 등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이한 지형에 얽힌 여항산 유래

여항산은 함안군 여항면 주서리·강명리 일원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에 걸쳐 있다.

백두대간이 끝나는 지리산 영신봉에서 동남쪽으로 흘러 김해 신어산까지 이어지는 낙남정맥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다. 지리산권을 제외하면 낙남정맥에서 가장 높다.

여항산이라는 이름은 물이 범람해 모든 것이 다 잠기고 꼭대기의 배만큼만 남았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현재는 '배 이름 여(艅)'에 '배 항(航)'을 사용하고 있지만 <경상도지리지> 등 조선시대 대부분 기록에는 '남을 여(餘)', '배 항(航)'으로 표기했다. 한자 뜻 그대로 '배만큼만 남았다'로 풀이되다 18세기나 19세기 때 변경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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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항산 어원처럼 정상 바위가 산꼭대기 위에 올려놓은 배처럼 보인다. 뒤쪽으로는 우뚝 솟은 서북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 유은상 기자

또 1586년 군수로 부임한 정구(鄭逑)가 남고북저 지형 탓에 역모의 기운이 있다고 여겨 풍수적으로 이름을 바꿨다는 설도 있다. 산이 높은 남쪽은 배가 다닐 만큼 낮다는 뜻에서 여항(餘航)으로, 지형이 낮은 북쪽은 대산(代山)으로 고쳤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항, 대산은 그 이전부터 사용하던 지명이라 설득력이 낮다.

함안은 젖줄인 남강과 낙동강이 매년 범람하는 상습 침수지역이었다. 이를 방지하고자 강과 하천 주변으로 둑을 쌓았고 결과적으로 함안군은 국내에서 가장 긴 둑방(338km)을 가지게 됐다. 이런 사정에 비추어볼 때 과장되긴 했지만 여항산 대부분이 물에 잠기고 꼭대기 배만큼만 남았다는 설명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이 밖에도 물이 산꼭대기까지 차올라 정상에 각(곽) 하나만 놓을 자리만 남았다는 데서 '각(곽)데미 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고자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고, 큰 피해를 본 미군이 '갓뎀(goddam·제기랄, 빌어먹을)산'이라 부른 것이 또 다른 유래라는 이야기도 전한다.

여항산은 8개 공식 등산코스가 있다. 대부분 사람은 좌촌마을에서 시작하는 3개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한다.

포장길을 끝나는 지점부터 울창한 소나무숲이 등산객을 맞는다. 30도를 넘어서는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지만 숲속은 전혀 다른 세상이다. 가뭄 탓에 온 나라가 걱정이지만 오히려 산행에는 도움이 됐다. 낮은 습도 때문에 산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이 신선하다. 발걸음 또한 가볍다.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경사는 가팔라지지만 그렇게 힘에 부치지 않는다. 잠시 바위에 궁둥이를 붙이고 쉬면 그만이다. 가슴을 넓혀 심호흡을 하다 보면 땀은 금세 식고 가쁜 숨길도 잠잠해진다. 숲은 생각보다 울창하다. 1970년 이 산에서 표범이 잡혔다는 신문보도가 믿어진다.

능선에 올라서면 곧장 정상이 눈에 들어온다. 예상보다 큰 바위 봉우리가 떡 하니 위용을 과시한다. 여느 유명 산과 비교해도 모자람 없이 당당하다. 급경사를 오르는 나무 덱이 놓여 예전보다 긴장감은 적지만 역시 만만치 않다.

정상에 서면 다시 놀라게 된다. 발아래 천 길 낭떠러지에 먼저 놀라고, 탁 트인 조망에 다시 감탄한다. 가을 어느 멋진 날에만 만날 수 있는 파란 하늘과 뭉게구름이 펼쳐져 있어 감동은 더 깊다. 특히 저 멀리 남강까지 펼쳐진 넓은 평야가 아늑하다.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리면 만나게 되는 층층이 출렁이는 산그리메도 일품이다.

한국전쟁 아픔 서린 서북산

여항산과 인근 서북산(西北山·738.5m)은 현대사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다. 서북산은 함안군 여항면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진전면 경계에 있다. 여항산에서 능선을 따라 남쪽으로 3.7km 거리다. 깊은 사연만큼 산 이름에도 뭔가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을듯하지만 진북면 서북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이란다.

정상 표지석 아래에 서 있는 '서북산 전적비'는 당시 상황을 잘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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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항산숲. / 유은상 기자

1950년 8월 미군과 국군은 마산 일대를 지키고자 총력을 쏟았다. 미 제25사단이 새로 투입되면서 진주 일대에 주둔하던 북한군 정예 2개 사단을 공격했지만 지형적 이점을 살린 북한군의 거센 저항에 피해만 보고 물러난다. 결국, 미군은 마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고, 한시가 급한 북한군은 부산으로 진격하고자 총공세를 퍼부었다. 미군과 국군 또한 이곳이 무너지면 한순간에 부산까지 쉽게 내줄 수밖에 없어 목숨을 걸고 저지했다. 전투는 9월 15일까지 45일간 밤낮없이 이어졌고 서북산 정상 주인은 19차례나 바뀌게 된다. 결국, 미 제25사단 제5연대가 북한군을 격퇴하면서 유엔군의 총반격작전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중대장 로버트 티몬스 대위와 장병 100여 명이 산화했다.

이후 아들인 주한 미8군 사령관 리처드 티몬스 중장과 제39사단 하재평 소장을 비롯한 장병, 지역 주민이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자 1995년 11월 전적비를 세웠다.

서북산 너머에는 그때 그들이 보았을 진동만과 멀리 진해만 바다가 여전히 파랗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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