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시인의 <금강>

다석의 사상은 동서양을 두루 통하면서 하나로 돌아온다.

만법귀일(萬法歸一). 모든 현상과 만물은 그 근원이 있다는 말이다. 다석의 종교관 또한 '가르침은 여럿이지만 진리는 하나'라는 일원다교(一元多敎)에 근거하여 모든 종교가 모습은 달라도 근원은 하나임을 밝혔다. 그의 사상의 본줄기는 기독교이므로, 다석은 그 근원이자 하나의 진리를 가리켜 하느님이라 불렀다.

다석은 하느님은 '왼통(전체)이며 하나로 늘 변치 않고 없이 계신다'고 하였다. 일찍이 없던 우리 말과 글로써 절대자에 대한 개념을 세운 것이다.

다석은 사람이 이마로 하늘을 이고 있어 하늘임(님)이라 이름 부른다고 했다. 남부여대(男負女戴)라는 말처럼 우리는 불과 반세기 전만 하더라도 지아비는 등에 짐을 지고 지어미는 짐짝을 머리에 이고 다녔다. 아이를 등에 업은 아녀자가 짐을 옮길 곳은 양손과 이마 위 정수리뿐이다. 그래서 어미가 짊어짐은 곧 하늘을 모신 듯이 임(戴)이 되는 것이다.

또 하늘님은 하나로 늘 계신 님이라 영원하다고 하였다.

이 같은 하늘임이란 말의 생김 꼴에 대한 풀이는, 보거나 들을 수 없어 불명확한 절대자의 이미지를 머릿속에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도대체 하늘임이 무엇인지, 존재에 대한 물음에도 답을 해준다.

즉 전체로서 영원한 존재(存在)인 하늘은 땅과 사람을 낳은 근원이 된다. 사람이 태어난 것은 부모의 정(精)과 태(胎)를 통해 나왔지 부모의 육신이 그 근원은 아니다. 낳고 길러준 부모의 은혜가 크긴 하지만 하늘보다는 아래여서, 우리가 죽어서 돌아갈 곳은 본래 난 그곳이지 부모의 뱃속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은 만법의 귀일처(歸一處)가 되는 것이다.

이 같은 하늘의 존재를 사람들은 매양 무한한 공간으로만 인식하려 한다. 하늘이 인간에게 내려준 생명과, 심성(心性)의 속알인 덕(德)과 의로움(義)와 슬기(智慧)를 하늘이 지어준 줄을 알지 못하고 그냥 만들어졌고, 나의 의지로써 관장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편 '만법귀일'을 덧붙여 설명하면 이렇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만법이 하나로 돌아오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이는 불교 공안인데, 근세 한국 선불교의 중흥조인 경허(鏡虛)선사의 법제자 만공(滿空)스님이 들었던(擧) 참선 화두로도 유명하다.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하자면 그 하나는 다석의 말씀대로 왼통으로 늘 계셔 어디로 돌아갈 데가 없는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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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동엽 시인.

우리들은 하늘을 봤다

1960년 4월

역사를 짓누르던, 검은 구름장을 찢고

영원의 얼굴을 보았다.

<중략>

하늘 물 한아름 떠다,

1919년 우리는

우리 얼굴 닦아놓았다.

 

1894년쯤엔,

돌에도 나뭇등걸에도

당신의 얼굴은 전체가 하늘이었다.

 

하늘,

잠깐 빛났던 당신은 금세 가리워졌지만

꽃들은 해마다

강산을 채웠다.

위의 시는 신동엽의 대작 <금강> 가운데 있다.

<껍데기는 가라>며 쇠북을 울린 저항시인 신동엽. 그렇게만 알고 있었던 어느 날, 그의 장편 서사시 <금강>을 펴서 이 구절을 접하고는 뛰는 가슴을 달래기 어려웠다. 단숨에 4800여 행의 서사시를 읽어가며 "신동엽은 거룩한 글을 이 세상에 남긴 큰 시인"이란 믿음이 생겨나기에 이르렀다,

난데없이 <금강>이란 시를 강독의 화제(話題)로 가져다 온 것은 서사시 <금강>이 동학(東學) 혁명을 주제로 한 것이고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내천(人乃天) 사상 때문이 아니다. 이 시인이 '혁명'과 '사상' 그 이상의 거룩한 존재, 혁명과 사상을 잉태시킨 하늘님을 알아차리고 나서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는 느낌 때문이다.

이 시는 4·19의거, 3·1만세운동, 동학농민전쟁이라는 풍운의 역사를 역순으로 읊었다. 그 거사(擧事)의 주인들은, '우리들은 영원의 얼굴인 하늘을 보았다'고 선언한다. 시인은 그들의 자유, 독립, 평등을 향한 성난 항쟁에는 하늘이 내려와 함께 하고 마침내 전체가 하늘이었다고 적었다.

동학은 19세기 후반 조선의 사회적 혼란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사상으로 등장했다. 창시자 수운 최제우는 시대적 상황을 타파하는 보국안민(輔國安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의 계책은 천명(天命)을 바로 아는 데서 비롯된다 하였다. 천주(天主) 한울을 모신 사람은 신분, 빈부, 남녀 구분 없이 평등하다고 하여 당시 민중들에게 새로운 사회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였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저항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은 그 머리맡에 "세상 사람들이 각자 자기를 위한 마음뿐으로 한울의 이치를 순종치 않고 한울의 명을 돌아보지 아니하므로 마음이 항상 두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一世之人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 心常悚然 莫知所向矣)"고 하여 당시의 시대 정신적 상황을 적절히 나타내었다.

임금은 임금대로 외척이나 세도정치에 빠져 황음(荒淫)과 다르지 않았다. 지방관과 토호는 착취를 일삼았다. 호랑이보다 무서운 학정(苛政猛於虎)을 피해 만백성은 유랑 걸식하거나 민란(民亂)을 일으켰다. 온 나라 전체가 거꾸로 뒤집혀, 마음은 항상 공황(恐慌)이 엄습한 시대를 말한 것이다.

기미독립운동은 억울하게 살 수 없는 의분(義憤)을 내세웠다. 삼천만 겨레를 하나로 일어서게 한 '기미독립선언문'에서 '우리는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만방에 선언'한다고 밝혔다. 나라를 뺏기고 혼마저 잃어버린 백성에게 더 이상 노예로 살 수 없다는 의로운 마음이 일어난 것이다.

4·19의거 역시 하나였다. 도탄에 빠져 해지는 줄 몰랐던 군주와 관리들, 그 지배는 일본제국의 식민통치로 넘어갔고, 다시 해방의 기쁨도 잠시 독재정권의 전횡이 우리 겨레의 얼을 빼앗았던 시대에 들고 일어선 거룩한 일이다.

이 모두가 하나로 보면 잃어버린 것의 회복이다. 하늘 아래 밝은 세상을 되찾고자 하는 절규였다. 그때 그들에게 비굴한 두려움 대신 맹수 같은 용맹을 안겨 그들을 떠받힌 신앙이 하늘이고, 하늘 물로 때 묻은 얼굴을 닦아냈으며, 대지가 온통 하늘인 때에 흘린 피울음은 꽃들로 피어나 해마다 강산을 채웠다고 시인은 읊어 나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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