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산] (16) 금원산
진양기맥 뻗어내린 산줄기 황금원숭이산·검은산 지명
누워있는 모양 유안청 계곡 한여름 산행 무더위 식혀줘
동봉, 탁 트인 전망 '으뜸' 문바위·마애삼존불도 볼거리

"울면서 왔다가 울면서 간다." 거창을 두고 한 말이다. 중앙관리가 발령을 받으면 너무 멀고 불편할까 봐 지레 겁을 먹고 왔다가 임기가 끝나 떠날 때면 인정과 산수에 반해 떠나기 싫어 울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거창에는 1000m 를 훌쩍 넘는 산이 10개가 넘는다. 이들 산은 남덕유산(1507m)에서 이어진다. 남덕유 남쪽 능선을 따라 월봉산(1279m)을 거처 금원산, 기백산(1332m)으로 흐르는 산맥을 진양기맥이라 일컫는다. 그중에서도 금원산이 빼어나다. 거창 대표 산으로 꼽아도 크게 이견이 없을 것이다.

산이 높으니 계곡이 깊고 여기에서 흘러내리는 물 또한 좋다. 그 아래 자리 잡은 유안청 계곡과 지재미 계곡 또한 금원산을 거창 대표 산으로 만든 일등공신이라 하겠다.

금원산 산등성이에서 바라본 풍경. 첩첩 겹친 녹색 능선이 장관이다./유은상 기자

찔끔 장맛비 뒤에 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폭염경보까지 내려졌다. 도내 지역들은 경쟁하듯 최고 기온을 갈아치웠다. 금원산을 찾은 날 거창 낮 최고기온은 34.9도. 도내 최고였다.

출발 전부터 걱정해 주는 사람이 많았다. 괜찮을 거라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은근히 부담으로 밀려왔다.

금원산 휴양림 유안청 계곡에서 시작하는 산행 코스를 짰다. 임도를 따라 자운폭포를 스쳐 지나고서 유안청 2폭포 앞에서 숲 속 계곡으로 발을 들였다.

순간 에어컨을 켠 듯 시원한 기운이 몰려온다. 폭포 소리는 효과음이 돼 체감온도를 더 낮췄다. '회사서는 더운 날 고생이 많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이곳이 더 시원하네…. 하하 천국이다'며 속으로 웃었다.

먼저 마주치는 유안청 2폭포는 누워 있는 폭포다. 부드러운 바위 위로 물이 미끄러지듯 흘러내린다. 미끄럼을 타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면 금세 유안청 1폭포에 이른다. 나무들이 장맛비 때 모아 둔 물을 토해내면서 제법 위용이 느껴진다. 폭포에 가까이 내려서자 기온은 더 떨어진다. 날리는 물 분자에 냉기가 가득 담겼다. 절로 감탄이 나온다.

유안청은 조선시대 향시를 준비하던 선비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이 계곡 어딘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계곡과 폭포 이름에 그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계곡의 매력은 선비만 느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이태의 소설 <남부군>에서 수백 명 남부군이 물속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했던 곳이 바로 여기다. 이곳이 죽음의 산을 넘나들었던 그들에게는 잠시 휴식처였던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40년이 지난 1993년 이곳은 자연휴양림이 됐다.

계곡 옆에는 사람들이 벌써 자리를 깔고 수박을 먹으며 이른 피서를 즐기고 있다. 신선이 따로 없다. 여전히 이 계곡은 사람에게 휴식과 안식을 주면서 사랑받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폭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2코스를 따라 산을 오른다. 금원산 정상까지는 2.7㎞로 2시간이면 넉넉하다.

금원산(金猿山·1353m)은 거창군 위천면과 북상면, 함양군 안의면에 걸쳐 있는 산이다. 한자를 그대로 풀면 황금 원숭이 산이라는 뜻이다. 멀리서 보면 산이 검게 보인다고 해서 '검은 산'으로 불렸다고 한다. 언제부터 금원산으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후 이 산에서 날뛰던 금빛 원숭이를 어느 도승이 바위에 가두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계곡에서 멀어질수록 다시 기온이 올라가면서 후텁지근한 기운이 감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괜찮았다.

임도를 지나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서부터 숨이 차오른다. 나무 아랫길이라 뙤약볕을 피할 수 있어 다행이라 스스로 달랜다. 아마 산속 기온은 산 아래보다는 대략 5도에서 7도가량은 낮은 것 같다.

쉬다 가다를 반복하면서 8분 능선에 오르자 하늘이 열린다. 그런데 어쩌랴, 쏟아지는 땀을 지체할 수가 없다. 유안청 폭포의 시원함을 그리워하며 내 몸이 스스로 폭포로 변해버렸다.

능선을 타면서 경사는 다소 완만해졌다. 이번에는 계곡에서 느끼지 못했던 시원한 바람이 땀을 식히며 위로해 준다.

머지않아 동봉에 도착했다. 숨을 고르고 나서 주위를 살핀다. 멀리 덕유산과 이어진 고봉 준령이 손에 닿을 듯 쫙 펼쳐져 있다. 움츠렸던 가슴이 확 열린다. 멀리 두었던 초점을 가까이 당기자 이번에는 파란 하늘을 수놓은 수많은 잠자리 떼가 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에서는 더위에 허덕이는 동안 이미 이곳은 가을로 향하고 있었다.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250m가량 더 가야 정상이다. 하나 정상은 표지석만 있을 뿐 숲에 뒤덮여 시원한 전망을 내놓지 않는다.

사실 금원산은 계곡과 동봉 전망은 빼어나지만 육산인 탓에 기암괴석의 깎아지른 절경과 짜릿한 산행의 묘미는 제공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산객들은 대체로 금원산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진 현성산(960m) 또는 남동쪽으로 이어진 기백산 중 하나를 추가해 등산 코스를 완성한다. 이들 산 정상은 금원산에서 각각 4㎞ 떨어져 있으며 화강암이 노출돼 금원산이 주지 못한 2%의 짜릿함을 채워준다.

금원산 아래서 보면 왼쪽이 유안청 계곡이고 오른쪽은 지재미골이다. 계곡의 풍광만 보고 따지자면 지재미골은 유안청 계곡보다 못하지만 문바윗와 가섭암 마애삼존불 등이 있어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문바위(門岩)는 금원산 휴양림 관리사무소에서 500m 떨어져 있다. 임도를 따라 오르다 계곡을 건너면 럭비공처럼 생긴 어마어마한 덩치의 바윗 덩어리가 앞을 막아선다. 그 웅장함과 위압감에 주눅이 든다. 높이 50m, 둘레 150m나 되는 이 바위는 옛날 가섭사 일주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 노출된 단일 바위로는 가장 큰 것이라고 안내판이 일러준다.

금원산 지재미골 문바위. 우리나라에 서 노출된 단일 바위로는 가장 크다./유은상 기자

바위에는 '달암 이선생 순절동(達岩 李先生 殉節洞)'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고려 말 두 왕을 섬길 수 없다며 지조를 지켜 순절한 이원달 선생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문바위를 돌아들면 가섭암 터다. 기와로 된 관리소 건물을 지나 돌계단을 오르면 'ㅅ'자 형태로 두 개의 큰 바위가 서로 기대 서 있다. 그 사이로 형성된 20㎡쯤 돼 보이는 굴 속 바위 면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고려 때 작품으로 보물 제520호로 지정된 가섭암 마애삼존불이다. 2m가량 높이의 가운데 불상이 아미타불, 양옆으로는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짐작된다. 아늑한 바위 굴의 분위기와 빼어난 조각은 아니지만 자연스러운 불상 표정에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진다.

지재미골 문바위와 가섭암 마애불은 힘들이지 않고 차를 타고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굳이 산행 계획이 없어도 더위를 피해 계곡에 발도 담글 겸 한 번쯤 찾아봐도 좋은 곳으로 추천하고 싶다.

금원산에서 만난 소나무. 바위 틈에 튼튼하 게 뿌리내렸다./유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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